방학동성당 게시판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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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blasius] 쪽지 캡슐

2000-01-02 ㅣ No.244

낙 타

                                 ---- 김진경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거나 그런 상루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네 오히려 우리 앞에 펼쳐진 끝없는 사막을 묵묵히 가리키겠네
섣부른 위로의 말은 하지 않겠네 오히려 옛 문명의 폐허처럼 모래 구릉의 여기저기에 앙상히 남은 짐승의 유골을 보여주겠네
 
때때로 만나는 오아시스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사막 건너의 푸른 들판을 이야기하진 않으리 자네가 절망의 마지막 벼랑에서 스스로 등에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설 때까지 일어서 건조한 털을 부비며 뜨거운 햇빛 한가운데로 나설 때까지 묵묵히 자네가 절망하는 사막을 가리키겠네
 
낙타는 사막을 떠나지 않는다네 사막이 푸른 벌판으로 바뀔 때까지는 거대한 육봉 안에 푸른 벌판을 감추고 건조한 표정으로 사막을 걷는다네
사막 건너의 들판을 성급히 찾는 자들은 사막을 사막으로 버리고 떠나는 자
 
이제 자네 속의 사막을 거두어내고 거대한 육봉을 만들어 일어서게나 자네가 고개 숙인 낙타의 겸손을 배운다면 비로소 들릴걸세
여기저기 자네의 곁을 걷고 있는 낙탁의 방울소리
자네가 꿈도 꿀 줄 모른다고 단념한 낙타의 육봉 깊숙이 푸른 벌판으로부터 울려나와 모래에 뒤섞이는 낙타의 방울소리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별의 인도로 낙타를 타고 끝없는 사막을 건넜던 그들의 그림자를 떠올려 봅니다. 묵묵히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절망하지 않고 생의 사막을 건너 밝은 빛을 만났던 그들을 생각하며 김진경 시인의 낙타를 읽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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