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레지오

2005년 6월호_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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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마리애 [legio] 쪽지 캡슐

2005-05-19 ㅣ No.3

<그리운 이름을 만나러 가는, 어농성지>


어느 해인가의 봄에 그곳엘 갔었다. 윤유일(尹有一·바오로) 순교자를 생각하면서 갔었다. 이 땅의 어딘가에 그가 남기고 간 손톱자국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곳조차 없다. 그러나 누가 그를 잊겠는가. 그의 큰 그릇됨, 탁월한 식견, 역사를 꿰뚫어 본 형형한 눈빛을 누가 기억하지 않겠는가.
어느 해인가의 가을에도 그곳엘 갔었다. 성지로 들어가는 길 옆 논에서는 메뚜기가 뛰어다녔다. 빈 병을 들고 메뚜기를 잡으러 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그런 추억은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순교자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에 대한 메뚜기만한 추억도 간직할 수가 없다. 강완숙. 이 위대한 여인을 생각하자면 대쪽이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버릴 것도 가질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이 거침없었던 여인. 그랬으리라. 그의 가슴이 하느님으로 가득 차 터질 것만 같은데, 이 세상의 무엇이 그녀에게 티끌보다 더 값있어 보였으랴.
어느 핸가의 장마가 끝난 여름에도 그곳엘 갔었다. 어둑어둑 해질 무렵, 풀냄새 가득한 성지 안에서는 교우들이 웃자란 잔디를 깎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가만가만 성지 안을 둘러보고 돌아가려는 나에게 풀을 깎던 청년이 다가와 종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어농성지 안내서였다. 그는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며칠 후에 순교자 현양대회가 있으니 시간이 있으시면 들르라고 했다. 누군가가 우리 사이로 끼어드는 듯싶어 고개를 드니, 청동의 주문모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듯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3리 325, <어농성지>를 그런 마음으로 찾아가곤 했었다. 겨울에도 봄에도 또 가을에도….
낯익은 길을 따라 성지로 꺾어들자니 어농의 교우들이 내건 ‘순교자들의 얼은 우리들의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반갑다. 그 밑으로 처음 보는 <어농성지>라고 새긴 커다란 안내석이 보인다. ‘아하!’ 하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랬다. 성지 건너편의 야트막한 야산이 어느새 성화작업을 마치고 있는 것이다. 주차장에 가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성지와 붙어있는 논배미 건너편의 야산에 성당이며 사제관이 들어서면서 그 사이가 말굽 모양으로 재미있게 변했다. 이 반원형의 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 마련되어 있다.
성당을 뒤로하고 성지 안으로 들어서니 순교자 윤유일의 동상이 힘찬 모습으로 앞을 막는다. 이 동상은 언제보다도 좀 특이하다. 빛의 각도 때문인지, 밑에서 바라보는 사람과 동상 사이의 불편한 높낮이 때문인지 늘 어떤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윤유일 순교자의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얼굴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한 손에 성경을, 다른 손에 성작을 들고 우뚝 선 순교자의 늠름함과 담대함이 몸 전체에서 풍겨온다. 어떤 시각에 바라보아도 얼굴은 검게, 보이지 않는데 온몸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순교자 윤유일은 입교한 후인 1789년, 선교사를 모셔오고자 하는 초기교회의 염원을 안고 중국의 주교에게 보내는 밀사가 되어 두 번이나 베이징을 다녀온다. 이때 그는 구베아 주교로부터 성작, 미사 경본을 받았으며, 포도나무를 길러 포도주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포도나무 묘목을 가지고 들어오기도 한다. 결국 1794년 12월 24일, 윤유일은 지황(池璜, 사바), 최인길(崔仁吉, 마티아)과 함께 이 땅에 발을 딛는 첫 사제인 주문모 신부를 서울까지 모셔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주 신부의 입국사실과 그의 거처가 관가에 알려지면서 최인길, 지황과 함께 잡히는 몸이 되고… 그 형벌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세 분은 그 이튿날 숨을 거두어 순교하였다. 1795년 6월 28일, 그때 윤유일은 36세, 최인길은 31세, 지황은 29세였다. 순교 후 장한 세 분의 시신은 지금의 한양대학교 동쪽으로 알려져 있는 ‘살곶이다리’ 부근의 강물에 버려졌다. 어디로 흘러갔는가, 세 분의 영혼을 감쌌던 그 뼈와 살과 피의 옷은!
성지 안 너른 잔디밭은 여전히 푸르고 정갈한데 꽃과 풀과 나무들은 세월과 함께 자라서  더욱 무성하게 아우성친다. 전에 이곳은 파평 윤씨의 선산일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과 동생 윤유오(야고보)의 묘지가 이곳에 있음이 확인되면서 성지개발에 불을 붙인다. 여기에 있는 많은 묘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신이 없는 의묘(擬墓)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어농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윤유일, 지황, 최인길과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사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동정 순교자, 윤운혜(루치아)와 정광수(바르나바) 부부 순교자, 그리고 최초의 여회장 강완숙(골롬바) 등 9명의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한 성지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성지로 들어서며 바라보자면 맨 위 오른쪽에 있는 것이 동생 윤유오 순교자의 묘소다. 그리고 왼쪽이 맏형 윤유일 순교자의 의묘이고 옆이 아버지 윤장의 묘소다. 그 밑으로 윤점혜를 비롯한 일가 순교자들의 의묘들을 조성하고 비석 뒤편에 이분들의 행적을 간략하면서도 힘찬 글로 새겨 넣었다. 존경하는 오기선, 최석우 신부의 글도 보여 반갑다.
야외제대를 중심으로 건너편에는 주문모 신부의 동상이 있고, 지황, 최인길, 강완숙의 의묘가 나란히 길을 이루며 마련되어 있다. 강완숙 순교자의 묘소 옆 쉼터에 앉아 성지 안에 펼쳐져 있는 봉분들을 바라본다. 꽃처럼 아름답다. 아니 꽃보다 아름답다. 미사주를 만들기 위해 윤유일이 중국에서 가져온 포도를 상징하는 포도잎과 포도가 양각된 화강석판을 기단으로 두른 묘지들. 그곳에서도 저렇게 함께 계실까. 천상에서도 이분들이 하나가 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자니, 어농성지는 바로 끓어오르는 기쁨 그것이 된다.
주문모 신부는 윤유일 등이 처형된 후, 6년 동안 강완숙의 집에 은신하면서 정약종, 황사영과 함께했는가 하면, 강완숙의 도움 속에 왕실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 등을 입교시키고, 충청도를 거쳐 전주까지 지방 전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해의 칼날이 피를 뿌리며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자 1801년 3월 자수, 그해 5월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최인길은 역관(통역관) 집안 아들이었고, 지황은 궁중악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신앙의 여명기를 치열하게 산 선각자였고, 큰 진리를 위해 두려움 없이 국경을 넘나든 장한 밀사들이었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필립보)의 어머니인 강완숙. 그녀는 1760년 충청도 내포에서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때 4천여 명이던 신자가 5년만에 1만 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여신도였다고 하니, 주 신부와 함께한 그녀의 노고는 눈부시기만 하다. 옥중에서 3개월을 보내고 7월 2일, 형장인 서소문밖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강완숙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다른 여교우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 마흔하나였다.

성지를 나오며 바라본 성모상 옆에는 앵두나무꽃이 핏빛으로 아름다웠다. 성지와 주차장 사이의 논은 농약을 쓰지 않고 오리를 논에 풀어서 벼를 기르는 친환경농법에 의해 농사를 짓는다. 10여 채의 까만 오리집이 논두렁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모를 내고 나면 논 가장자리로 그물을 친 후 저 오리들을 논에 집어넣으리라. 이 친환경농법의 논을 둘러싸고 반원형으로 <십자가의 길>이 서 있는 것이다. 14처를 따라 기도소리는 나직나직 울리고, 오리들은 꽥꽥거리며 논물을 헤집고, 벼들은 소리 없는 함성이 되어 자라는 모습을… 아, 저기에서 윤유일 순교자는 묵묵히 지켜보고 계시겠구나. 논 옆, 14처가 끝나는 곳에 서 있는 <끝기도>를 읽는 내 눈시울이 갑자기 흐려진다.
 <주 예수님, 저를 도우시어 매일의 삶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시고, 갈바리아 산까지 함께 가게 하소서. 인생살이의 모든 슬픔과 기쁨, 상처와 치유, 실패와 성공들은 진실로 저를 당신의 신비에로 이끄는 작은 십자가요 부활이나이다. 저에게 믿음을 주시어 저 항상 당신과 함께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됨을 굳게 믿도록 해 주소서. 아멘.>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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