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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3일(12월16일) 뱌와의 복자 호노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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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2-04-05 ㅣ No.2066



축일 10월13일(12월16일)
뱌와의 복자 호노라토 O.F.M cap
Beato Onorato (Venceslao) Kazminski Cappuccino
Biala (Polonia), 16 ottobre 1829 - Nowe-Miasto, 16 dicembre 1916
 







하느님의 어머니 덕분에 반항아의 신앙이 회복되다
미래에 신앙의 전사가 될, 벤체슬라오 코즈민스키(Kozminski)는 아직 중학생에 불과한 11살 어린 나이에 실제로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잃었다. 1844년, 졸업을 한 그는 바르샤바 미술대학의 건축학과에 등록했다. 1845년 그는 아버지와 사별하게 되고, 1846년 4월에는 러시아 제정의 폴란드 점령에 대한 반란을 꾀하다가 친구들과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교도소 감방에서 벤체슬라오는 영적인 극변을 체험했고, 성모님의 전구 덕택에 그는 신앙을 되찾게 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영성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느님의 어머니께서는 나의 어머니의 기도에 감동되시어.. 나를 위하여 주님께 전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교도소 감방으로 나를 찾아오셨고, 신앙에로 나를 온유하게 이끌어주셨습니다." 벤체슬라오는 1848년에 석방되어, 같은 해 12월 21일, 모든 친지들의 놀라움 속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뱌와(Biała)의 호노라토 형제'라는 이름을 받았다.



카푸친 사도직의 열렬한 수행자
1829년 10월 16일, 본 호노라토 형제는 (폴란드의) 뱌와 퍼들라스카(Biała Podlaska)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는 스테파노 코즈민스키와 알렉산드라 카흘로바(Kahlowa)의 아들이었고, 세례 때에 ‘벤체슬라오’라는 본명을 받았다. 카푸친으로서 서원을 서약하고 철학 및 신학의 학업 과정을 밟은 다음, 그는 185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바르새바에서의 사도직 활동 내내, 호노라토 형제는 열정적이며 부지런한 일꾼이었다. 그는 또 지칠 줄 모르는 고해 사제이면서 설교자였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남녀 평신도로 구성된, 성 프란치스코의 재속 삼회(현 재속프란치스코회)와 '살아있는 묵주기도'라는 헌신적인 신자들 모임 또한 부지런히 고취시켰다. 그것뿐만 아니라 호노라토 형제는 '펜의 사도직'을 활기차게 실행한 다작의 작가였다. 그의 저작물로는 42권의 강론집과 21권의 서간집이 있고, 뿐만 아니라 여러 신학적, 역사적 주제를 다룬 다수의 출판물도 포함된다.  



다량의 창설자
1855년, 호노라토 형제는 성 펠릭스의 수녀회를 창설했고, 1860년, 성녀 글라라의 카푸친 수녀회도 창설했다. 1863년의 '1월 폴란드 반란' 후, 그는 자크러침(Zakroczym) 형제회 안에서 1892년까지 갇혀 있었고, 그 이후로 1916년까지는 너베-먀스토(Nowe-Miasto) 형제회 안에 감금되었다. 자크러침에 있는 그의 고해실에서, 수많은 수도, 수녀회들이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1889년 6월 21일에는 그가 창설한 17가지의 수도, 수녀회들이 교황청의 인준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수도자들의 공적인 사도직 활동을 금지시켰고, 때문에 이들 남녀 수도회 회원들은 서약은 했지만 수도복을 입지 않기로 했고 공동생활을 영위하지도 않기로 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러시아 정부당국에 의해 대부분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이 모든 것을 이뤘다는 점이다. 당시 카푸친들의 공적 봉사는 고해실 안에 국한되어 있었다. 호노라토 형제는 시대의 징후들을 읽을 줄 알았다. "하느님의 소망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일할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거룩한 교회에 대한 영웅적 순종
새 수도단체들을 확고히 자신의 지배 아래에 두려는 주교들로부터의 여러 비난과 신고에 따라, 교황청은 1907년 그 수도단체들에 제약을 가했고, 그들과 호노라토 형제와의 접촉에도 제약을 가했다. 호노라토 형제는 자신이 창설한 그 새로운 단체들이 자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자신에게 가해진 그 제약에 복종했으며 단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했다. 그는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의 대리자께서 몸소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계시해주었는데 나는 지극히 큰 믿음으로 이 명령을 수행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거룩한 교회에 대한 영웅적 순종을 보일 기회가 여러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Totus Tuus' – 성모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는 종
1995년부터 20년 이상 동안, 호노라토 형제는 러시아 내의 카푸친회 총봉사자 수석대표였다. 1916년 12월 16일, 뱌와의 호노라토 형제는 노베-먀스토 형제회에서 선종했다. 오늘날 그의 시신은 그 형제회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1897년, 성모님의 종으로서 그는 마리아님의 손을 통해 그리스도께 자기 자신을 봉헌했었다. 그는 성모님께 둔 무한한 신뢰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었다. "마리아님, 저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옵니다! - Tuus totus!" 1999년, 호노라토 형제를 시복시켰던 교황이 다름 아닌, 동포인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교황 자신도 교황직의 좌우명의 관념으로 동일한 어구를 채택했던 것이다. 즉, "Totus Tuus – 온전히 당신의 것!"



"내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생애와 그분 덕행의 완성, 그리고 그분의 가장 내밀한 영을 알게 되었을 때, 그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내 유일한 바람은 그분을 완벽하게 본받고, 그분의 회칙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내 보기로,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모범들은 봉쇄구역을 벗어나 세속에 살면서도 완덕을 기하는 것인데 이것을 불가능한 것이라 마음속으로 생각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수도단체들이 마땅히 모방하기로 선택한 마리아님, 그분이 이런 숨은 생활의 본보기이시며 모범이십니다." - 뱌와의 복자 호노라토

 














Beato Onorato (Venceslao) Kazminski Cappuccino
16 dicembre 
Biala (Polonia), 16 ottobre 1829 - Nowe-Miasto, 16 dicembre 1916

Onorato, al secolo Vencesalo Kozminski, nacque a Biala Podlaska il 16 ottobre 1829. Ricevuta la prima educazione in famiglia e compiuti gli studi primari a Plock, si reco a Varsavia per gli studi di architettura. Nel 1846 subì una crisi religiosa, superata la quale entro n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a Varsavia, e venne ordinato sacerdote il 27 dicembre 1852. Si dedico ad un'intensa azione pastorale fondando ben 26 Istituti religiosi, di cui 18 esistono tutt'oggi. Fu scrittore fecondo, direttore spirituale e confessore ricercatissimo. Morì a Nowe Miasto il 16 dicembre 1916. Fu beatificato da Giovanni Paolo II il 16 ottobre 1988.

Martirologio Romano: Nella città di Nowe Miasto in Polonia, beato Onorato da Biała Podlaska (Fiorenzo) Kazminsky, sacerdote dell’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che si adoperò egregiamente nel servire i penitenti, nel predicare la parola di Dio e nel confortare in carcere i prigionieri.

 

 


Venceslao Kozminski nasce nel 1829, la famiglia lo educò cristianamente e lo fece studiare presso il ginnasio di Plock. Frequentando l'ambiente della scuola di belle arti di Varsavia, influenzato dall'illuminismo, abbandonò la fede. Arrestato nel 1846 dalla polizia zarista, poiché sospettato di far parte di una organizzazione politica, rinchiuso nel carcere di Varsavia, vi trascorse un anno durante il quale contrasse il tifo e temette la condanna a morte. Durante questo periodo aveva ricercato e trovato nuovamente la fede in Dio.
Nel 1848 entrò nel noviziato di Lubartòw, alla vestizione gli fu dato il nome di fra Onorato, fu ordinato sacerdote il 27 dicembre 1852, subito iniziò l'insegnamento ai chierici cappuccini, impegnato nella predicazione e nella direzione dei terziari francescani.
Nel 1863 i russi decretarono l'abolizione degli ordini religiosi, Onorato venne trasferito prima a Zahroczym e quindi a Nowe-Miasto.
Lottò contro il potere zarista che voleva staccare la chiesa polacca da quella di Roma, per mezzo della devozione mariana e della diffusione del terz'ordine francescano. Di sicuro fu molto difficile operare in un paese dove era vietato fare apostolato e formare novizi, per questo motivo diffuse i valori evangelici interpretati dal terz'ordine formando varie congregazioni, queste vivevano il vangelo di Cristo così come si trovavano nella vita ordinaria, senza saio, senza convento, nascosti ma vivi nella fede. Queste congregazioni furono approvate dalla santa sede il 21 giugno 1889, ma in seguito a denunce furono imposte delle restrizioni a queste comunità.
Nel 1905 per motivi di salute non esercitò più il ministero nei confessionali ed inizio una importante corrispondenza epistolare con i propri figli spirituali, circa 4000 lettere manoscritte sono conservate negli archivi di Varsavia, oltre alle sue numerose prediche, ad una "enciclopedia mariana" e ad un diario spirituale.
Dal 1895 fu commissario generale dei cappuccini sotto la dominazione russa.
Morì all'età di 87 anni il 16 dicembre 1916, dal 1975 il suo corpo riposa nella chiesa di Nowe-Miasto.
Il 16 ottobre 1988 Giovanni Paolo II lo ha proclamato beato.


Autore: Carmelo Rand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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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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