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이 나라가 최우선으로 규명해야할 과제(시스템 클럽에서 퍼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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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숙 [cla4927] 쪽지 캡슐

2008-11-05 ㅣ No.8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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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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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 격하는 '한국군 와해'를 위한 대남전술


북한정권의 제1목표는 적화통일이고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는 북한의 끝없는 공작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일성 교시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 보면 북한은 군에 간첩을 침투시켜 군사정부를 입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반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군의 역량을 파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의 월간지 문예춘추 2003년 1월호에는 김정일의 극비 지령 문서인 ‘학습제강’이 게재돼 있고, 그 중 하나의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적군 와해공작은 전쟁승리의 중요한 조건의 하나다. 대포를 쏘고 총을 쏘는 것만으로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와해공작을 강화하는 것 이야말로 적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 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군에 주사파 세력을 입대시켜 지휘관의 부정을 캐서 양심선언을 하게하여 군지휘권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지휘관의 부정을 가지고 이웃 병사들을 선동 포섭하는 등의 방법으로 군을 와해시키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에는 군을 학살집단으로 몰아가는 선동 선전 모략전을 수행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군과 경찰은 양민학살집단이요 우익정권의 폭력배로 몰려 있다. 국가는 군과 경찰만으로 지킬 수 없다. 군, 경, 민이 하나로 똘똘 뭉치지 못하면 전쟁에 패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좌익세력은 한국군, 한국경찰, 주한미군을 살인집단으로 매도하는 작전을 폈고, 그 결과 군과 경찰과 주한미군을 국민으로부터 불신 받는 존재, 증오스러운 존재로 매도하는 데 성공해왔다.  

1989년5월에 동의대사태가 발생했다. 학생들이 경찰관 7명에 시너를 뿌려 사망케 했고, 이로 인해 시위참가 학생 전원이 구속되고 주도한 46명은 방화, 살인 등의 혐의로 최고 무기징역이 확정됐으며 학교당국은 81명의 학생을 제적시켰다. 그런데 김대중 시절인 2002년4월,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동의대사건을 일으킨 당시의 중범자 46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경찰의 죽음은 민주화를 저지하려다 죽은 반역의 죽음이 된 것이다.

1948년에 제주 4.3사태가 발생했다. 빨치산 김달삼이 소련군 스티코프 중장과 박헌영의 사주를 받아 1948년의 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군경가족을 무참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살인한 폭동이며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양민이 희생됐고, 그 중에는 억울한 양민도 꽤 많았던 것으로 이해돼왔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당시인 1999년12월16일에 특별법이 제정됐고, 여기에서 '폭동' 혹은 '반란'이란 명칭이 '사건'으로 바뀌고, 국가 공권력이 폭동-반란 세력으로 몰리게 됐다.  

1999년 9월, 성공회대의 한홍구 교수, 동국대의 강정구 교수, 한겨레21의 고경태 기자 등이 한겨레21과 인터넷을 통해 주월한국군이 값싸게 고용된 미국의 용병이요, 임산부까지도 불도저로 깔아 죽인 양민학살 집단인 것으로 매도하여 32만5천의 파월장병들은 부인, 자식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좌익세력에 의한 한군군 격하운동이었던 것이다.

1980년에는 5.18사태가 발생했다. 광주 시민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정치권에서 철저한 진상조사 없이 화해차원에서 타협한 결과가 한국의 최정예부대로 알려진 공수특전단이 광주에서 무고한 양민을 마구 살해하고 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한 학살집단으로 매도되기에 이르렀다. 공수부대가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사람 70%를 죽여도 된다며 병사들에게 술과 환각제를 먹여가지고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광주에 들어왔다는 것이 5.18단체측 주장이었고, 영화 화려한 휴가도 그런 식으로 제작됐다. 그러나 5월17일 광주에는 전국적으로 가장 적은 수인 600여명만이 파견됐었고, 파견된 부대는 전남 금마에 있는 7공수 여단으로 여단 병력의 40%는 호남출신이었다.

검찰 자료에 의하면 계엄군에게 먼저 물리적 공격을 가해 피를 흘리게 한 쪽은 학생들이었고, 수십명 단위의 경찰을 인질로 잡고 수십 개의 파출소와 방송국 그리고 세무서에 불을 지르고 경상도 차량을 불태우고 경상도 사람들을 집단 구타하여 살해하고, 계엄군을 향해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굴리고 계엄군을 향해 탈취한 군장갑차와 대형차량을 돌진시켜 병사들을 깔아죽이고, 방위산업 업체에서 350여 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탈취하고, 그것을 가지고 수십 개의 무기고를 털어 2개 연대 규모의 무장에 해당하는 무기를 탈취하고 그 무기를 가지고 계엄군을 공격하고, 수많은 목진지를 점령하여 동시다발적인 매복 작전을 수행하고, 2,700명 정도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6차례에 걸쳐 공격하였고, 고립된 병사들을 난자하여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 군인들이 호남 여인들을 욕보이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나무에 걸어 놓았다는 등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유언비어를 아직도 믿고 있는 국민이 상당 수 있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이렇듯 광주사태에서 한국군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시할 수 없는 수의 국민으로부터 오해와 불신을 받고 있다. 이는 군의 명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안보가 심각한 수준으로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광주사태의 진상에 대해서는 군의 명예와 국가안보를 위해 반드시 사실대로 규명돼야 할 과제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한국군만 살인집단으로 매도된 것이 아니다. 주한미군도 살인집단이요 범죄집단인 것으로 매도돼 있다. 파월장병을 살인집단으로 매도하던 바로 그 시기인 1999년 9월, 저들은 느닷없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자극적인 이슈로 부각시켰다. 미군이 노근리 주민을 아무런 이유 없이 마구 총을 쏘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고 그 결과 상당한 국민이 반미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국가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이어서 2004년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노근리사건의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너무 다르다.  

일본으로부터 폭우를 뚫고 부산으로 날아온 스미스 부대와 24사단은 15,965명 중 1주일간의 지연작전에 4,525명을 잃었고, 오산-옥천 전투를 치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에서 7,305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병이 요구하는 물을 뜨러 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어깨, 늑골, 머리에 부상을 입고 금산 지역을 헤매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한국청년의 밀고로 36일째가 되던 8.25. 북괴에 포로가 됐고, 평소 체중 86kg가 체포됐을 때에는 58kg였다.

일본에서 발간된 한국전사에 의하면 1950년 7월 18일 영일만에 상륙한 미1기병사단은 바로 그 영동지역에서 북한군 주력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방어전을 폈다. 충북 남단 지역을 나란히 방어하고 있던 25시단과 1기병사단은 피란민 때문에 골치를 않았다. 임신부가 소형무전기를 숨기고 접근해와 북한군 관측장교 역할을 해주었고, 미군 보급차량이 갑자기 피난민들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고, 피난민이 묻어놓은 지뢰에 피해를 입었기도 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공격하는데 피난민을 총알받이로 이용했고, 지뢰제거용으로 이용했다. 미군은 이들 피난민을 쏘아야 할지 실로 난처해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신부, 애기를 업은 엄마들로부터 총격을 받은 미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때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근리 비극은 이렇듯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문화의 일각일 뿐, 이제 와서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한국인들을 위해 미군은 3년간의 전투에서  4만명의 생명을 잃었고, 10만명이 부상당하거나 실종됐다. 밴프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을 바쳤고, 클라크 UN사령관도 아들을 바쳤다. 워커 중장이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런 미군을 향해 저들은 양민학살자라 매도하고, 맥아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통일이 됐을 것이라며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소란을 피운 적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박대통령 시절에 온 지혜를 짜내서 미군을 붙들어 두기 위한 고육책으로 한미연합사를 창설했지만 저들은 이를 해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2002년12월 저들은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을 각색하여 전국적으로 반미정서를 확산시켰고, 그 결과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미선이-효순이가 죽은 도로는 좁은 커브-길이고, 공병장갑차는 매우 높고 창이 작아 시야가 매우 좁다. 차의 폭은 3.7m, 두 대가 서로 교차했다. 두 대의 차폭을 합치면 7.4m인데 도로 폭은 겨우 6.3m였다. 왼쪽은 낭떠러지, 오른 쪽은 산이었다. 한 대의 차가 산으로 바짝 부치는 과정에서 차는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교차를 시도했고, 그 와중에 사고가 난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장갑차가 앞으로 가면서 뭉개고 뒤로 가면서 뭉개며 악랄하게 죽였다고 방송했다. 한 가정 당 2억 이상씩을 받았는데도 저들은 60만원이 웬 말이냐며 국민을 흥분시켰다. 방송이라면 무조건 믿는 국민이 하루아침에 혈맹을 배반하는 가장 의리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것이다.

위와 같이 우리 군과 경찰 그리고 주한미군이 당하고 있는 명예실추는 북한 및 친북좌익들이 이룩해낸 고도의 심리전의 성공사라 할 수 있다. 1980년에 국가에 충성했던 군이 15년 후에 반란-내란군으로 몰리게 되는 것은 애국심의 말살을 의미한다. 국가는 어려울 때 국민에 나서달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국가로부터 부름을 받아 목숨 걸고 싸운 전사가 내일의 국가로부터는 훈장을 박탈당하고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장차 국가가 어려울 때 누가 나가 싸우려 할 것이며, 신뢰 잃은 국가가 어찌 당당하게 국민에 나서달라 호소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 국가는 패망한 월남처럼 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뒤집는 행위는 국가를 멸망케 하는 이적행위요 국가전복 행위라고 생각한다. 한국군이 당하고 있는 명예실추 역시 이러한 차원과 시각에서 재 조명돼야 할 것이며 이는 대한민국 군출신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광주사태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5월21일, 계엄군은 시민들을 행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많아 발생했는데 그 무차별 발포에는 반드시 발포 명령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5.18측 주장이다. 그러나 검찰수사결과를 보면 5월21일의 총 사망자수는 35명, 이중 22명은 자상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사망했고, 13명만이 총상으로 사망했는데 이중 9명이 카빈소총에 의한 것이고, 4명은 기타총상으로 기록돼 있다. 이날 시민의 70%가 카빈총에 의해 사망한 한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표현한 5월21일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문제시 하는 5월21일의 살인은 누가 저질렀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5.18측 사진 중에는 여성을 나체 상태로 난자하고, 전기톱으로 머리를 자른 사진들이 나온다. 이런 식의 살해행위를 계엄군이 저질렀는지 제주 4.3사건에서처럼 북한세력이 저질렀는지 우리는 따져야 할 것이다. 좌익수가 170명이 들어 있고 수용자가 2,700명이나 되는 교도소를 장갑차 등을 몰고 6차례나 공격한 것도 사실로 나와 있다. 검찰 증언들에 의하면 교도소를 공격한 장갑차와 차량들에서 술병들이 나오고 환각제가 나왔다 한다. 이들 젊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결심으로 교도소 습격에 나섰는지, 아니면 배후 교사자가 있는지 우리는 연구해야 할 것이다. 부동자세로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대형차량들이 지그재그로 돌진했는데 운전자를 잡고 보니 술에 취하고 환각제를 보유했다고 한다. 이들을 문초하니 “뒤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다”고 실토했다 한다. 교사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교사자들은 광주시민일까 아니면 북한 측 사람일까 하는 것도 규명돼야 할 문제다. 고립된 계엄군을 난자하여 죽인 사람, 경상도 사람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죽이고 경상도 차량들에 불을 지른 사람들은 북한사람인가, 광주사람인가, 교도소 공격을 사주한 사람은 북한 사람일까, 광주사람일까, 5월 21일 카빈총으로 시민을 살해한 사람이 광주시민인가, 아니면 북한 사람인가,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는 악성 유언비어는 광주시민의 작품인가, 아니면 북한의 선동 전문가들의 작품인가? 조그만 아이에게 돈을 주고 돌멩이를 실은 리어카를 끌게 하고 뒤에서는 어른이 밀게한 교사자는 광주시민인가, 북한의 소요확산 전문가인가?  조그만 아이를 협박하여 광주세무서 커틴에 불을 붙이도록 교사한 사람은 어디 출신인가? 이런 문제는 광주시민의 명예와 5.18측의 명예를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군과 5.18측 모두의 명예를 위해 광주에서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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