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총정리편] 네가 정말 사랑하느냐 그러면 나를 따르라 (요한21:14~25)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05-30 ㅣ No.293

(공동번역)총정리편

  네가 정말 사랑하느냐 그러면 나를 따르라

 

(요한21:14~25) 

14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15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베드로가 '주님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이르셨다. 16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이르셨다.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그러나 '주님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분부하셨다18 이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었다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19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20 베드로가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 오고 있었다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굽니까?' 하고 묻던 제자였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22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23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다만 '설사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한복음은 인간의 행위와 열심과 노력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폭로하구요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열심의 필연성 극명하게 대조를 해서 구원에 있어서 하느님의 주권을 오롯하게 부각을 시키시고 명실상부한 복음의 핵심 정석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처음시작에서부터 빛과 어두움을 등장시켜서 이 세상의 어둠과 예수 그리스도의 빛되심을 대조시켜요 그리고 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거부하는 어두움을 빛의 능력으로어두움이 어떤 능력이 있어서 빛을 자각하는게 아니라어두움이 물러가는 그런 형국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그러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거부하는 어두움을 빛의 능력으로 구원해 내시는 하느님의 열심을 요한복음을 통하여 읽어내셨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보세요 1장 서두부터 빛과 어두움을 대조시켜서 어두움을 쾅빛이 전부그렇게 대조하고 있는거예요그래서 은혜가 어둠 즉 역사를 먹는 형국으로 그려지고 있는 거지요?

(요한복음 1:9-11) 9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이게 역사의 실존인데 그 역사의 실존을 은혜가묵시가 뚫고 들어와서 부숴버리는 거죠맞아주지 않는다고 내가 못들어갈 것 같으냐?라고 들어오는 거죠그게 요한복음 처음부터 끝까지의 이야기인거죠

(요한복음 3: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래서 유대주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계속 싸우죠 1장부터 끝가지 계속 충돌해 갑니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11:9) 예수께서는 '낮은 열 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낮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조예요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성경 전체의 복음은총의 복음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또 한책으로 요약하고 있는거죠

이 빛과 어둠의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나온 거예요 창세기 첫째 날 빛이 창조됐어요  빛은 무엇인가발광체는 네째날 만들어지니까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인거죠첫째날 그 빛예수님이 창조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 첫째 날은 첫째 둘째 셋째날이 전부 언약 즉 묵시를 담고 있는 것처럼 첫째 둘째 세째 일곱째 날까지의 모든 창조의 내역을 그 첫째 날이 뭉뚱거려 묵시화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니까 빛이라는 것이 어두움을 분별해 내어서 어두움을 확 몰아내는 그러한 안식의 나라가 반드시 올것이다가 일곱째날의 안식거든요

그게 요한묵시록에서 빛이 있는데 태양이 필요 없는 그런 곳이 우리에게 주어지죠 새하늘과 새 땅그러니까 진짜 빛에 의해서 그 태양이라는 발광체가 부정당하는 거죠 진짜 빛이 오므로 말미암아 역사 속의 옛 창조가 부정당한는 새하늘과 새 땅이 요한묵시록에서 오잖아요첫째 둘째 세째 일곱째 날에 공통적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입니다.

새 창조가 어떻게 일어나냐면 저녁에서저녁은 완전한 밤이 아니라 빛을 함유하고 있는 어스르함을 저녁이라 합니다그러한 저녁이 빛의 역할에 의해 점점 물러가서 아침이 되는낮이 되는 형국으로 창조는 이렇게 일어날 것이다가 창세기 1장이란 말입니다첫 창조그 이야기가 요한복음에서 그대로 그렇게 계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빛이신 그분이 오셔서 어두움을 어떻게 몰아내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의 그 창조의 일을 이루어 내시는가를 그려내는게 요한복음이라는 말이예요.

이 어두움은 유대주의인본주의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인간의 가능성을 여전히 의지하고 있는 유대주의 인본주의를 어두움밤이라고 하는 거죠그 밤을 빛이 와서 몰아내는 것입니다어떻게 몰아내느냐 하면어두움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어두움은 끝까지 어두움인데 빛이 몰아내죠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이 어떻게 끝나냐 하면 베드로베드로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총칭하는 하나의 상징이예요 그 베드로가 끝까지 쟤는요?”하고 끝나는 거예요요한복음은 너무 엉뚱하게 끝나죠베드로라는 수제자가 쟤는요?하고 끝나는게 요한복음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너나 잘해남신경쓰지말고!!!

이러한 요한복음의 내러티브 속에서 빛의 대척점에 서있는 어두움은 유대주의인간의 가능성을 여전히 신뢰하고 수호하고자 하는 인본주의 그것이 은혜의 주로 오신 빛을 거부하게 한단 말입니다우리 안에 여전히 그 어두움이 있어요그걸 빛이신 주님께서 뚫고 들어오셔서 몰아나가고 있는 과정인거죠 지금!!! 그렇게 빛과 어두움은 화해가 불가능한 것이었죠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어두움이었던 자들이 빛의 자녀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라고 기록하죠

(에페소 5: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오로의 편지조차도 이렇게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죠그러면 어떻게 해서 어두움이었던 자들이 빛의 사역에 의해서 어두움이 빛으로 흡수가 되는거예요그것을 구원이라하고 요한복음은 그것을 끝까지 내레이션하고 있는 거죠

 

(요한복음 12:46-47)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47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나는 이 세상을 단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여기 보면 빛과 어두움의 전쟁을 구원의 이야기로 풀고 있단 말입니다주님은 어둠을 구원해 내기 위해 빛으로 어둠과 전쟁을 벌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단말요 그런데 여기 47절 ‘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단죄하지 않을 것이다나중에 내가 한 말이 그를 심판할거다 라고 이야기 하시거든요우리가 예수님의 말을 안들어도 심판 안당하나요이 땅에서는 심판 당하지 않아요!!!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의 은닉성이요.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이 이 땅에서 심판을 당한다면 이 세상은 곧바로 멸망당해야 합니다그리고 예수 안믿는 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못살고 훨씬 어둡게 살아야 돼요 그 말이 이 말입니다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을지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너희들을 심판하지 않을거야! 그러나 나의 말나의 말씀에 의해 너희들은 심판을 당한다 이런 뜻이에요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재화나 가치들을힘을 많이 획득하고 소유한 것으로 복을 받았다 그것들을 잃은 것으로 저주를 받았다 이렇게 판단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는 거예요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는 저주받았다 하지 말라는 거에요 나중에 심판은 말씀이 한다는 뜻이거든요 나중에 하느님의 말씀이 심판할 때까지 너희들은 그런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거에요. 아무리 추악하고 보잘 것 없이 보이는 인간도 지금 빛에 의해 장악당하고 있는 그런 하느님의 백성의 삶일 수도 있으니까 너희들이 판단하지 말라는 이런 뜻인 거예요그리고 결국 그 전쟁에서 그 빛이 승리해내시고야 마는 것 그것이 구속사인거에요따라서 오늘 요한복음을 마무리 지으면서 우리는 빛과 어두움이라는 대척점의 존재가 어떻게 빛의 의해서 빛의 자녀로 환골탈퇴하는가를 결론 맺어야 하는거에요.

오늘 본문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베드로라는 인물이 끝까지 어둠의 모습으로 폭로가 되고 그 어둠을 열심히 쫓아다니시면서 먹이시고 섬기시는 빛이신 예수의 모습이 결론으로 부각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어요한 쪽은 계속 실패하는데 한 쪽이 집요하게 쫓아 다니는거에요아침(조반)을 싸들고요이것을 구원이라 하는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그렇게 끝나는 거에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던 사람이에요이렇게 베드로는 나머지 제자들의 대표로 그 자리에 서있는 거에요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함축하고 있는 교회전체의 대표에요그래서 수제자인 베드로가 그곳에 서는 거에요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기도의 현장에서 세번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죠!! 거기에 베드로가 있었죠세번이라는 말은 딱 세번 그렇게 권고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예수님께서 정말 처절하게 부탁을 했다는 뜻이에요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잤죠나중에는 예수님이 이제는 자고 쉬라 하죠이것은 인간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베드로를 통하여 폭로한다는 말이에요. 내가 이렇게 3번을 너희들을 깨웠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나의 죽음 앞에서 자는 자들이지이것에서 우리는 열처녀의 비유를 읽어낼 수 있는거죠다 자는 거에요그러나 그 중에 하느님의 선택 사랑 편애를 받은 자를 하느님께서 확 덮쳐 깨워서 문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는게 구원입니다그렇게 세번 권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잠을 자고 대 제사장 집뜰에서 예수님을 세번 부정한 것도 모자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고 세상으로 파견까지 받죠(요한20:21). 그런데 베드로는 또다시 동료들을 선동해서 갈릴레아 호수로 가서 물고기나 잡고 있는거에요 어떠세요성경이 끝까지 집요할 정도로 베드로를 묵사발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시나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셨을 때 자기가 죽을 지언정 예수님을 그 지경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한사람이에요베드로의 열심 의지가 돋보이죠진심이었읍니다그러니까 말코의 귀를 짜르는 거에요그 현장에서요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늘밤 너는 세번 부인한다고 하였을 때에도 극구 부인했던 사람이었지요그런데 베드로의 그런 열심다른 말로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는 어둠 속의 인간들의 열심이 어떤 결국으로 종결되어지는지 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아인본주의자들아유대주의들아 너희들의 열심을 동원하여 나에게 오겠다는 것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이 바벨탑 사건인 거에요이렇게 인간 측의 열심은 요한복음 1장에서 부정되기 시작해서 21장 끝까지 부정되고 있다고요그런데도 오늘날 성당(교회)에서는 인간의 열심을 너무나 부추기고 선동하는 면이 없지 않죠열심 있으면 훌륭한 성도고 열심 없으면 불성실하고 성숙하지 못한 성도라고 몰아부쳐요그래서 열심을 내어 하느님을 섬기자라는게  교회의 표어처럼 되어있어요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요 우리가 요한복음 전체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열심과 노력으로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하느님을 돕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인간측의 열심이 부정당하고 기각당하는거죠그게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에요영원한생명은 하느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고요하느님의 일이 하느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라는 뜻은 그 믿음의 반대편에 있는 어떤 행위로 너희들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잖아요그러니까 오히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열심과 노력을 하느님의 은혜의 복음에 의해묵시에 의해 부인당하는 거에요공격당하는 거에요.  맞아 이걸로는 안되는 것이구나.를 배우고 가는 거에요이게 그리스도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에 흐르는 베드로의 열심과 열정이 갈릴레아 호수에서 고기 잡는 것으로그리고 쟤는요?’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으로 폭로가 되는 거에요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했겠어요앗 속았다 했겠냐고요 그렇게 베드로의 모습들이 빈 그물로 상징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요그것이 숯불 앞에 베드로의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거에요인간의 노력은 꽝!이다라는 말이에요그게 이 세상속 어둠들의 결국이고열매인거에요그런 어둠들인 인간들에게 빛이신 예수께서 집요하게 찾아오세요그리고 그 실패한 인간들의 열심에다 말씀을 던지세요빈그물로 허덕이고 있는열매가 하나도 없어요베드로의 열심의 결론이에요.

빈 그물 위에 말씀이 떨어지고 그 말씀에 순종에 의한 153마리의 고기가 잡히는 거에요. 153마리는 당시의 모든 물고기의 종류의 숫자입니다하느님의 일의 완료성종결성이에요그건 무엇으로 이루어지나요인간의 노력으로는 꽝빈 그물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느님의 일이 완료되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거기에 베드로의 한 일은 아무것도 없죠 그게 구원인 것이에요모든 일은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시작되고 완료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을 그런 복음의 진리를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주는 거죠.

예수님은 그렇게 실패자로 폭로가 되버린 베드로를 부르세요부르시는 그 호칭이 조금 이상합니다.

 

(요한복음 21:15)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베드로가 '주님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이르셨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아가페로 부르셨는데 필레오로 대답한 것이다 라는 거 아니에요요한은 아가페 필레오 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막써요예수님은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르시죠그러면 요한의 이름을 1장에서 베드로라고 직접 바꿔주세요그리고 21장까지 베드로를 시몬으로 부른 적이 한번도 없어요그런데 왜 궂이 여기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나요?

(요한복음 1:41-42)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 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42 그리고 시몬을 예수께 데리고 가자 예수께서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앞으로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게파는 베드로 곧 바위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지금 숯불 앞에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나요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마태복음으로 가서 십자가를 지기 바로 전에 에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봐야 돼요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이 갈릴레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미리 예견하셨는데 그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6: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칼을 들어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

흩어지리라에 마크하세요.지금 제자들이 갈릴리에 있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요하느님이 목자를 쳤더니 양들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란 말이에요그 흩어져 있는 양들의 대장인 베드로에게 지금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어요그러면 이 흩어짐과 시몬이란 이름을 들으면 순간 떠오르는 게 있죠시몬이란 이름이 시므온 이거든요히브리어로요야곱의 12아들 중에 시므온이 아버지로부터 유언을 받는데 흩어질 것이다라고 합니다.

(창세기 49:5-7) 5 시므온과 레위는 단짝이라칼만 잡으면 사나와져 나는 그들의 모의에 끼어들 생각도 없고 그들이 모이는 자리에 섞일 마음도 없다홧김에 사람을 쳐 죽이고 닥치는 대로 소를 박살하는 녀석들! 7 저주받으리라화가 나면 모질게 굴고골이 나면 잔인해지는 것들내가 그들을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분산시키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흩뜨리리라.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의 누이인 리나의 강간 사건으로 하몰의 아들 세겜을 비롯해서 부족들을 몰살시킵니다그 일로 인해서 시므온과 레위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는 거에요시므온과 레위는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어버린 자기 자신이 이 우주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자기들의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향해서 아무 때나 칼을 들 수 있는 세상 모든 죄인들의 모형으로 저주 받고 있는 거에요그래서 하느님이 이들을 무상으로 건지는 사건이 모세 오경을 비롯하여 구약에 죽 나타나 있는 거에요레위지파와 시므온 지파가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유산(상속 기업)을 받아 유지가 되잖아요그 이야기 인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갈릴레아로 흩어져 버린 베드로를 필두로 한 불가능한 당신의 백성들 앞에서 베드로를 시몬시므온으로 부르심으로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흩어져 갈릴레아로 흩어져서또한 갈릴레아라는 장소의 의미도 멸시와 천대와 심판의 장소였잖아요그러한 갈릴레아로 흩어져 저주를 받아 소멸되어야 하는 운명의 시므온을 상기시키라고 그 흩어져 있는 제자들의 대장인 베드로를 시므온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그리고 그들이 갈릴레아로 간 사건을 그 앞에서(마태복음 26:31) 하느님이 목자를 침으로 양들이 흩어진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렇게 저주를 받아 흩어져야하는 상황에서 시므온이 정말 흩어지게 되나요아닙니다.

(여호수아 19:1) 둘째 몫은 갈래를 따라 시므온 후손 각 지파에게 돌아갔다그들의 유산은 유다 후손의 유산 한복판에 들어 있다.

그 얻은 유산은 브엘세바 곧 세바와 몰라다와 흩어져 소멸당해야 할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기업을 무상으로 받아 소멸을 면하게 되는 거에요여기에서 유다 지파는 누구겠어요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죠.

예수의 은혜로 죽어야 할흩어져 소멸되어야 할 어떤 자들이시므온 들이 살아나는게 구원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오늘 그 시므온과 유다 지파의 후손이 대척점에 딱 서있는 거에요시몬아 내가 너를 어떻게 구원하니네가 내 구원 사업에 뭘 도와줄 수 있니그러면 어떻게 살아나야돼내 은혜를 받아야지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요한복음 21장 전체가 다 그말이에요.

 

루가복음으로 가면 오늘 본문의 시몬과 창세기의 시므온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루가복음 2:25-35) 25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그에게는 성령이 머물러 계셨는데 26 성령은 그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죽기 전에 꼭 보게 되리라고 알려 주셨던 것이다. 27 마침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 갔더니 마침 예수의 보모가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려고 어린 아기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다. 28 그래서 시므온은 그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32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33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을 듣고 감격하였다. 34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누가 나오죠아셀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가 나온다고요그 지파가 아셀지파라고 굳이 기록되어 있어요그러므로 그 시므온 이야기도 시므온 지파의 이야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거잖아요소멸되어야 할 시므온이 유다 지파의 후손이 이 세상에 진짜 왔더니 그 시므온이 정말 그 앞에 와 있는 거에요그리고는 그 유다 지파의 후손을 보자마자 안고 이제 그 창세기 49장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구나 증거하고 죽는 거에요똑같이 그 시므온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에요그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예수님께서 부르는 거에요이것은 복음의 독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쳐 주는 거에요.

주님은 그 시몬을 숯불 앞으로 부르시죠그 숯불이라는 단어는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세번 부인했었던 바로 그 앞에 있던 숯불이었습니다숯불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단 두번 나오는 거에요주님은 베드로를 흩어져 소멸될 수 밖에 없는 시므온의 자리에 앉힌 거에요너는 죽어야 되는 거니까그래서 숯불 앞에 앉혀 놓은 거에요너가 시므온이이다그리고 그 자리에 앉은 베드로를 시몬(시므온)이라고 부른 거에요.

그리고서는 예수님은 부르십니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τούτων ( toutōn)은 이것들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첫번째이것은 이 사람들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니이런 뜻으로 번역해도 부방해요두번째그리고 너가 이것들 배와 그물과 기타 고기 잡는 도구들그리고 고기 잡는 행위이것들 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니이런 뜻으로 번역해도 부방해요그리고 세번째로 니가 이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이런 뜻으로 번역해도 부방해요그러나 문맥상 첫번째 해석이 타당한 것 같아요베드로는 처음부터 줄곧 자신이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 것처럼 말해왔어요그리고 그렇게 행동했어요가장 앞서서 말고의 귀도 자르고가장 앞서서 죽으러 가자고 했던 것도 베드로였어요진짜 너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라고 물으시는 거에요망신 줄려고 부르시는 것 아녜요너 정말 너의 열심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그 실체를 드러내시는 거에요너 어떻게 해야되겠니물으시는 거에요.

이 질문이 성도의 구원받는 시점에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성도가 성화의 절정인 지점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어때너가 너의 열심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이래도 말야성도의 정답은 무엇인가아닙니다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저를 지옥에 보낸다 할지라도 저는 아무 할 말 없습니다저는 하느님 앞에서 없음이니까요 , nothing이니까요. 이게 성도가 궁극적으로 내놓고 가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 질문 앞에서 바로 그 저주 받은 시므온의 자리로 단번에 내려가 꽃힙니다우리들은 정말 그 베드로처럼 흩어져 저주받아 흩어질 시므온의 자리에 망설임 없이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요? 그래 맞아요나는 언제든지 내 유익을 위해서 칼을 뽑아 야비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남을 죽일 수 있는 존재예요이렇게 처절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맞나요그런사람들 없어요다들 가슴을 치면서 죄인입니다(내탓이오)죄인입니다(내탓이오)하면서도 그래도 쟤보다는 조금 낫다는 생각을 요만큼씩은 다 가지고 있어요.

복음은 그 작은 크기의 여지를 밀고 들어와서 부숴버립니다그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그러면 나는 뭐냐정말 나는 뭐야?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그 작은 것까지도 부숴버릴 때까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릴 계속 공격해 들어갑니다시므온의 자리입니다숯불의 자리 앞으로저주 받아 흩어진 자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그래서 그곳에서 나는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내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그 어떤 행위로도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구나행복에 이를 수 없구나를 깨닫는 것이 신앙생황이에요무슨 대단한 것 내놓아서 하느님께 칭찬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베드로 앞에는 숯불이 놓여있고 예수님의 사랑확인의 질문이 세번에 걸쳐서 이어집니다뭘 상기시키고 있나요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던 그 사건을 상기시키는거에요 그것을 아는 베드로가 선뜻 대답을 할 수 있겠어요세번 예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베드로는 세번 저주하며 부인했어요예수님은 그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왜 예수님은 물어보실까요베드로는 얼마전까지도 큰 소리로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당신을 사랑할꺼에요그래잖아요그런데 여기서는 한풀 꺽였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을 당신이 아시잖아요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님께서 떠넘기고 있어요자기가 대답 안하는 거에요단서를 하나 붙이는거에요네 그런데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은 주님이 아시잖아요이렇게 되묻는거에요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답을 주님께 떠넘기는 것입니다이제는 베드로 특유의 자신감이 없는 대답입니다성도는 바로 그 시몬의 자리시므온의 자리흩어져 저주 받은 자리숯불이 놓여진 그 앞자리예수를 세번 부인한 저주 받은 그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성도는 나는 목숨을 걸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를 고백하는 게 성도의 신앙생활의 성화가 아니라 점점 우리 자신이 없어져야 되는 거에요그 자신이 없어지는 자리로 하느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와서 쌓안고 가는 거에요빛이 와서 말입니다그런데 점점 기고만장해지고 점점 자신있어져요그게 아닙니다성도는 자신있는 자리로 가는게 아니에요.

주님은 세번이나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어요세번째 질문에서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인가? ‘마음이 슬퍼졌다’ 헬라어 엘류페데(ἐλυπήθη )라는 단어는 고통스러워하다 슬퍼하다 미치겠다라는 뜻입니다나는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 사랑한다는 확신이 나에게서 없었졌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고통스러워 죽겠다는 거에요그렇지요인간측에서의 나오는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의 은혜 앞에서 묵사발되는 거에요정말 목숨 바칠 줄 알고 있었는데 삶을 살다 보니까 점점 나는 안되겠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에요나는 먼지티끌인 존재이구나가 계속 드러나는 거에요그러니까 나중에 주님 앞에서는 주님이 저를 사랑하지 않으면 제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이런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이게 바로 신앙의 여정 속에 있는 성도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런데요 재미있는 것은 지금 부터입니다베드로가 확신있는 대답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라고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그런데 베드로가 이 저주 받은 자리에서 흩어져 소멸될 자리에서 무슨 배짱으로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까요?

베드로는 사랑이라는게 인간측에서 나오고 생산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점에서 안것입니다우리는 여기서 사랑의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지금부터 우리가 세상에서 갖고 있는 사랑의 개념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애틋하고 그립고 무엇이든 다해주고 싶고 그런데 지금 죽이고 싶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감정에 의해서 수시로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그런거죠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절대 그런거 아니죠분명 지금까지 베드로에게서 나온 행위들은 우리가 정의하고 기대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행위는 아니었어요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의 사랑고백에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예수님은 그래 맞아 하고 수긍해 준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보세요우리가 정의하고 있는 사랑은 나의 의지를 발동해서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헌신을 하고 용납을 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말해요물론 그것은 사랑의 여러 국면중 한부분인 것은 맞아요그러나 전체는 아닙니다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예수님을 실망시켰구요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으며 가장 중요한 순간에도 잠만 자는 등 예수님을 배신했다고요그런데 그게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는 주님을 사랑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를 하고 왜 나는 예수를 믿고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나오지 않지라고 하는 질문을 하는 우리라면 혼내줘야 되는거에요?  그런 질문은 하는게 아니에요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다 그런 생각 한번씩은 갖어 보셨죠하루에도 여러번씩이요 그렇지만 우리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게 하느님을 사랑하나요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요?순도 100% 거짓말이죠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눈에 보이는 자기 자식도 지속적인 사랑을 줄 수 없는게 인간입니다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게 불가능하구요그래서 사랑은 그렇게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이전에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데 주님은 요한복음 14장 15장 등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의 전제와 근거를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4: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얘야 너 나 사랑하니’ 물으셨다면우리는 전부 그럼요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죠그런데 그때 가 나를 사랑한다면너는 지금 내 계명을 지키고 있어야 되는데.’ 여기서는 우리 모두 자신이 없어집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합니다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신잖아요.

(요한복음 14:21) 내 계명을 받아 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베드로가 무슨 계명을 지켰나요예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도 들어먹지 않았던 놈인데요어떻게 베드로가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을 하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또 수긍해 주시냐고요주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잖아요.

(요한복음 14:2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 거죠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저가 내 계명을 지킬거고 그러면 내가 저 안에 들어가 저희와 거처를 함께 할 거래요그런데 우리가 성령을 받았죠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에여그리스도가 성령께서 내안에 들어와 함께 거처하고 계신다고요그렇다면 지금 하느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전제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먼저 거처를 삼아 들어와 버린거죠반드시 하느님 자신이 성취해 내기겠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성취해 내는지를 보시라는 거에요.

(요한복음 14:25-26)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니와 26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 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지요그런데 우리가 계명을 지키지도 않았고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일단 먼저 우리가 하느님의 거처가 되었어요어떻게 그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보세요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완성하다 완전히 지키러 왔다는 뜻 그러면 그 계명율법은 누가 지키나요예수께서 지켜서 우리에게 거져 전가시켜 주시는 거에요그 이후에 우리가 지켜내야 할 율법이 없다그러면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역의 완료성을 우리가 부정하는 거에요그래서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하는 거에요없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절기,기념일을 안지켜도 되는 거구요부활절 성탄절 이런거 안지켜도 되는 것입니다살아서 나와 함께 있는 분을 자꾸 제사지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십일조가 계명이죠그러면 지켜야 하나요그렇게 주님이 계명을 다 지켜서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었어요그럼 계명을 지킨 자는 어떻게 된거라 했어요주님을 사랑하는 자라 했잖아요아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인데하느님의 사랑안에 들어있는 자로서 그의 사랑에 의해 끌려가는 그 행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행위인 거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사랑의 개념은 쌍방이 뜻이 연합이 되고 존재가 연합이 되어 하나가 되는 상태, Union의 상태를 사랑이라고 그래요그러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선 우리의 뜻과 비전과 야망이 그대로 있도록 놔두시면 안되죠그렇다면 하느님과 하나될 수 없잖아요하느님께서 우릴 사랑하는 방법이 우리의 뜻과 비전과 야망희망을 부수는 형국으로 나타나는 거에요하나가 되기 위해서연합이 되기 위해서사랑하기 위해서요.

우리 인간의 육신은 하느님의 뜻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만 추구하고 있다고 로마서가 이야기 합니다우리 뜻과 비전과 야망이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비워지는 거에요그런데 그 상태에 의해서 우리가 하느님에 의해 우리를 부인당하면서 끌려가고 있는 상태내가 점점 비워지면서 하느님께서 나를 점점 점령해 가지요내가 이끌려 가는 상태를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에요왜냐하면 점점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니까요.

그러니까 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눈꼽만큼도 나올 수 없어요. 주님께서 지켜내신 아버지의 계명이 무엇이었는지 보세요.

(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38 이것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한마디로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에요이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완료로 쳐들어오게 될때 그 세목의 율법은 싹 사라지는 거에요진짜 빛이 올 때 태양이 필요없는 것이 되듯 말이죠주님께서 그 계명을 어떻게 지켰는지 보세요.

(필리피서 2:5-8)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아니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목숨까지 비워가며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 상태가 계명을 지킨거죠그런데 계명을 지키는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라 했잖아요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 속에서는 목숨까지 비워서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삶이 나오게 되어있는 것이에요.

하느님과 어떤 대상이 계약의 관계속에 들어가서 이 대상이 목숨까지즉 완전히 비워짐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이 이 대상의 삶에서 성취가 되는 그 언약의 관계에 그걸 사랑의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그 언약의 관계나는 너를 구원할거야예수의 피로 구원할거야라는 그 언약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과 하느님 사이에이 관계가 하느님이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들이 하느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하느님의 뜻에 연합되어 가는 자니까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랑의 과정을 통과하여 결국 사랑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그런 거에요그게 사랑이에요.

 

(요한복음 17:21-23) 21 아버지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 22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나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이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며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이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신 것같이 저희도 사랑한고 하지요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가 예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요그러면 그 사랑과 똑같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겠다는 거에요그런데 그 죽음에 상황에서 하느님 맞아요하느님 저를 지옥 보내도 저는 아무할 말 없어요하고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그 지점으로 끌려가는 상태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상태인 거에요.

베드로 보세요 계속해서 자기의 열심과 노력을 유발시켰는데 계속 실패하는 거에요그리고 결국은 숯불 앞에 앉아가지고 아무 할말없이 주는 빵이나 받아먹고 있어야 되는 상태를 보세요하느님이 그 기고만장했던 베드로를 점점 부수고 들어가서 결국 얼굴 시벌겋게 만들어서 숯불 앞에 딱 앉혀 놓는 그 상태그 전체 과정이 자기 부정의 과정이에요그걸 사랑이라고 말하는 거에요.

베드로가 점점 자기 부인이 되어서 제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어요그런데 하느님이 저를 끝가지 이렇게 조반까지 챙겨서 찾아오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시니 내가 어떻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저 하느님 사랑해요주님이 아시잖아요베드로가 대답하는 거에요그게 사랑이에요그 낮은 쪽으로 뚝 떨어져 버리는 거에요.

이제 예수 믿고 이렇게까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라는 소리 하지 마세요그렇게 사랑은 인간 측에서 내놓을 수 있는게 아니에요하느님 쪽에서 덮쳐와서 우리를 끌고 가는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언약적 관계 속에서의 그 하느님과 그 대상과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

 

(요한복음 17:24) 아버지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내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아버지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주신 그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보세요 창조이전부터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었어요창조이전부터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언약이 있었어요그런데 바오로가 하느님이 자기를 다마스코에서 창조이전에 선택했다고 하죠우리도 마찬가지에요창조이전에 언약의 관계안에 있는게 우리라는 거에요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하느님을 사랑한 인생인 것입니다.

(요한1서 4:9-10) 9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0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은 그사랑 하나에요일방적 사랑그런데 그 사랑에 의해 내 마음을 다른데 주고 있던 그 상태에서 마음을 거둬들여 하느님께 옮기게 되는 거에요이제 다른 것을 믿을 게 없게 되니까요예수만 믿는 자로 변해가는 거에요그걸 하느님께서 사랑이라고 쳐주는 거에요왜냐하면 점점 연합이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요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다라고 요한이 이야기 하는 거에요.

쉬운 말로 창조이전에 택해진 하느님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계약속에서 그들은 하느님과 완전히 연합되어지는 그 지점으로 가게 될 것이니까요그 전체 과정을 소급해서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그러니까 하느님을 위해서 대단한 헌신을과분한 헌금을도에 지나는 봉사는 하는 행위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매일매일 자기를 부인당하며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빈 그릇으로 해체되어져 가는 그 모든 과정을 하느님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사랑은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서 하느님의 정하신 목적지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챙겨가시는 거에요. 내가 내 놓는게 사랑이 아니고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계약에 의해서 자기를 부인당하고 하느님의 목적 성취를 위해서 사용 당하셨던 예수님의 삶이 계명을 지킨 거라면 우리 성도의 계명 지킴역시 자기를 부인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형국으로 나타나는 거에요그게 계명을 지키는 거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에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도둑질간음살인 안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게 아니에요물론 이와같은 것은 예수 안믿는 사람들도 하는 거니까 우리도 당연히 하는 거에요그러므로 이걸 계명지킨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로나를 사랑하는 자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로 성숙되어져 가고 지어져 가는 것을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거에요그걸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거구요그리고 그렇게 계명을 지키는 자로서 자신을 부인당해 가면서 비워져 가는 삶이 이웃 사랑인거에요.

(요한일서 5: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사랑하는 걸하느님을 사랑하고 계명 지키는 것에서 볼 수 있어요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고 계명 지키는 게 뭐라고 했나요우리는 죽었다 깨나고 못하는 건데 하느님이 우리에게 했다고 했습니다십자가지고 자기 부인당하면서 처절하게 티끌의 자기로 내려가는 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계명 지키는 거라고 했잖아요그 상태가 이웃을 사랑하는 상태인거예요왜냐하면 인간이 기고만장해서 나는 너를 사랑해 줄 수 있어 나는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이런 사랑 있어 없지 하는 것은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걸 구원이라는 걸 오해시키는 거잖아요죽이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부인되어지고 점점 연약해져 가고 겸손해져 가고 못나가고 바보가 되어져 가고 이런 평판을 당하여 감에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는 자리에서 내려오지를 않아요그 때 세상은 이런 바보들을 보면서 욕을 하는데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 바보들을 보면서 저런 바보들도 하느님께서 끌고가는 구나하느님의 자녀로 완성시켜 가는거구나그리고 저 모습이 바로 바보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무장 해제 당하면서 하느님 앞에 순종하고 하느님 앞에 티끌로 드러나는 삶인 거구나를 가르쳐주는게 이를 살리는 거에요그래서 이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내가 작아()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상태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다른 말로 자기를 부인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 때 그 때 하느님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걸로 쳐준다는 거에요그게 이웃사랑이에요.

  

(요한복음 12:49-50) 49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하였다. 50 나는 그 명령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안다그래서 나는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일러 주신 대로 말하는 것뿐이다.'

50절에 그 명령이 십자가 지고 죽으라는 거에요그런데 그 명령을 행하는게 영생이라고 합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서 하느님과 뜻이 하나가 되는 게 연합이잖아요그 상태가 영생이라는까요이게 사건적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표출이 되는지는 아무관계 없어요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도 그 자체가 영생인 거에요그래서 여기에서 너가 나를 사랑하니그래 내 사랑이 너를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이렇게 예수님과의 대화에 상대였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거에요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똑같은 명령을 하신다는 거에요그러니까 우리도 이 땅에서 죽는 거에요옛 자아의 죽음하느님에 의해서 사살되는 거에요.

그렇게 내 뜻이 부인되어지고 내 야망과 욕심이 꺾이고 내가 비워지는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꿋꿋이 그 과정을 겪어내면서 예배와 찬양과 기도를 쉬지 않는 이들 그들이 하느님 사랑하는 거에요이웃사랑하는 거에요.

 

(요한복음 15:12-16)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예수님이 목숨을 버려 죽었잖아요마찬가지에요여러분 우리는 이웃에게 무엇을 베풀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인간은 그렇게 은혜를 알지 못하고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베풀기 시작하면 항상 내가 남에게 무엇을 주었다라고 하는 그러한 자기만족을 챙겨갖게 되어 있어요 선교도 내가 갖고 있는 뭔가를 주러 가는게 아니에요전교라는 것은 밥 얻어먹은 거지가 밥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거예요마찬가지로 섬김이웃사랑도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나눠주는게 아니라 내가 그 앞에서 부인되어지므로 말미암아 이것이 내가 주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옮겨지게 돼야 되는거에요. 우리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지 말라는게 아니에요그걸 나누면서 우리의 영광을 챙겨 가지면 그것 자체가 죄가 되는 거에요사랑을 일단 그런 식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사랑은 내가 그 상대방 앞에서 죽는 거에요예수님의 사랑에 의해서 부숴지는 모습을 그 들 앞에서 폭로당해주는 거에요. 연약한 모습으로요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저를 놓지 않고 있다라고 하는 그걸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보여주는 거에요그래서 그들이 나를 존경하는게 아니라 나를 붙들고 있는 하느님을 보도록 만들어 줘야 되요대부분 우리는 우리의 잘남을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그래서 우리는 성경 읽는 것기도하는 것헌금하는 것기타 등등을 이야기 하면서 자랑을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사랑이라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주님의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내가 주님에게 무엇을 해 드려서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게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으로 주님의 말씀하시네요사랑하는 것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거라 그랬는데 그것은 예수님 밖에 할 수 없는 거니까 그 예수님에 의해 내가 친구가 된 것처럼 그 친구가 되었다는 걸 다른이들에게 알려주는 거에요나는 예수에 의해서 예수의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그게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여러가지 기특한 행위를 해서 나는 당신을 이정도로 사랑해 줄 능력이 있습니다.를 보여 주는게 아니라 나는 당신을 사랑해 줄 능력이 없습니다그런데 이런 나를 목숨바쳐 사랑해 주는 분이 계십니다그래서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고 성도가 되었습니다를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그게 바로 생명의 본체이신 예수를 소개하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렇게 나의 못남이 상대방에게 자주 폭로되게 되다 보면어느 순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됩니다왜냐하면 내가 그 앞에서 솔직하게 낮아지다 보면은.

그런데 대부분은 그 낮아짐을 견디지 못해서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라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착하다고 해요자꾸그런 열심을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참아주는 것을 착하다고 하는데 그거 말고 나라는 존재를 솔직하게 그 앞에 들켜 주는 거에요그래야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못난 인간이라는 것을 억지로 인정하려하지 않아도 내가 인정이 되요그러다 보면 그 남이 나보다 낫게 여겨지게 될때 그 때 진짜 사랑이 나오는 거에요.

그렇게 자꾸 낮아져야 나에게만 향하던 그 사랑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나눠지는 것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사랑을 연습하는 거에요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낮아져요그러면 진정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이웃사랑을 하게되는 거에요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연습해야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완전 파산상태 이잖아요사랑도 신뢰도 다 잃어버린 상태죠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부르셨어요베드로는 이미 자기 측에서 유발되어 나온 모든 사랑이 가짜라는 것을 확인한 상태이에요그래서 베드로는 빈그물 그리고 숯불 앞에 앉아 있는 거에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조반을 손수 준비해서 그에게 찾아오셨다는 거에요베드로가 안거에요바로 저 사랑안에 머무는게저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게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구나를 그 자리에서 안거에요.

나는 이렇게 계속 실패 했을지라도 저러한 주님의 집요한 사랑이 나를 놓지 않는 이상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자로 완성이 될거고 바로 지금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안거에요그래서 베드로가 예 나는 자신은 없지만 주님이 아시잖아요?’ 주님이 날 끌고 가고 계시잖아요 하고 대답을 하는거에요어차피 사랑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는 거니까요그 대답을 들은 주님이 뭐라 하나요'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이게 이웃 사랑입니다여기에 지금 하느님 사랑이웃 사랑이 나오는데 계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게 어디에서 유발되는지 알고 가라는 뜻이에요.

너 나 사랑하니네 사랑해요그러면 그 사랑으로 네 이웃을 사랑해라는 뜻이에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이게 뭐 사제가 양들을 맡게 되는 그림이라고 사기들 치는데 여기에 분명히 내 양이라고 합니다언제 사제 양이라고 했나요사제에게 맡겨진 양은 없어요모두 예수님양이에요그리고 여기에서 베드로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지 사제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우리 모두 이 이야기를 알아들어야 합니다주님께서 세번째 질문을 하시고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후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이웃 사랑의 명령을 하달하시고 어떻게 그 불가능한 베드로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계명을 지키는 자로 영생을 가진 자로 만드실 것인지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어차피 베드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그러면 어떻게 나를 사랑하고 내양을 먹이고 이웃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를 17절 이후가 대답해 주는 거에요.

 

(요한21:17~19)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그러나 '주님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고 분부하셨다. 18 이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19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뜬금없이 너 나 사랑하니 내 양을 돌봐라’ 이 이야기를 하시다가 이제는 그 전까지는 너가 너의 열심을 유발하여 너의 노력을 내놓아 나를 사랑할려고 했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할려고 했는데 지금 봐라 모두 빈 그물아니니너 숯불 앞에 앉아 있지 않니그러면 너가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내양을 먹이는)을 할 수 있는 길이 뭐겠냐그 삶 자체가 니가 니 신발신고 니가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결과 아니냐?라는 뜻이에요그러면 내가 너의 삶에 개입해서 밖에서 허리를 묶어 너를 끌고 갈 건데 니가 원치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그러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영생을 사는 자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발자국도 못가게 된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원하는 방향은 전부 내 영광만 챙기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내 신을 신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거에요그런데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착한 일을 시키냐하면 이웃하느님 사랑을 시키냐 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느님 사랑을 시키고 이웃을 사랑하게 시킨다는 거에요.

 

예수 믿는 게 쉽지 않아요예수 믿는게 누룩이고 겨자씨에요보이지도 않고 티도 안나요힘들어요 예수 믿는게천국이 천국을 사는 자들이에요감춰져 있기 때문에 힘들어요감춰진 천국을 사는 삶이기 때문에 나의 일을 드러내 칭찬을 받을 수 없어요나의 행위를 드러내어 사랑을 받아요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올바른 복음을 이해한 교회는 다소 차가워보여야 됩니다그러나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뭔가를 하는 것은 진짜 사랑아니에요진짜 사랑은 그들을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것입니다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부인당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그렇게 살란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빛이신 주님에 의해서 어둠인 세상의 실체가 폭로되고 결국 어둠이 빛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자인하고 빛의 도움을 구하게 되는 복음의 이야기를 일관성 있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 아니고 예수님이 전부입니다이것이 요한복음성경 전체의 대 주제입니다복음의 핵심입니다신앙생활은 나의 뜻을 내놓고 주님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내가 끌려가는 거에요그래서 주님이 나를 따르라 하는 거에요.

그 십자가의 길을 내가 너 안에 들어가서 끌고 갈텐데 너 이제 나 따라 와야돼 !!! 십자가의 길 자기부인의 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그러니까 그냥 놔두면 그 길을 누가 따라 가겠어요그래서 예수님이 띠를 띠우고 끌고 간다고 하잖아요그래서 안따라 갈 수가 없어요그래서 성도가 부정당하고 해체당하고 부인 당하는 것입니다그나마 몇가지 성취해 놓은 일조차도 부끄러워 못내놓는 형편이 되는 거에요전에는 꺼내놓고 자랑하던 그 일을 이제는 말도 할 수 없는 형편으로 가고 있는 거에요이게 잘가고 있는 거에요.

 

(요한21:20-22) 20 베드로가 돌아다 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 오고 있었다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굽니까?' 하고 묻던 제자였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22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너는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보세요 예수께서 너 나 사랑하니 내 양을 돌보라’ 세번씩이나 이렇게 얘기를 해주고 이제 되었지이제 나를 따라야 돼이제 허리를 묶어 내가 데리고 다닐꺼야그랬더니 사도 베드로의 반응은 그럼 쟤는요하고 요한복음이 끝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인간은 이렇게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존재다(‘쟤는요?’)라는 것이 성경입니다그러니까 예수님만 붙든 상태가 계명을지키는 것이고영생을사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거에요.

인간은 스스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에요그러나 그것을 처절하게 깨닫기 위해서는 열심히 사랑해 봐야 됩니다그러나 어느날 그 사랑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그 상대방에게 전해지거든 아 나는 계속 실패 했는데 하느님께서 나를 낮은 자리까지 끌고 내려 가셔서 그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보이게 만드셨구나내가 저를 진짜 사랑하게 되었구나.’ 그 때 하느님을 찬양하는 거에요.

성도는 이렇게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옛자아를 부인당하고 그 세상과 닿아 있던 옛자아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놓아가게 되는 거죠나의 옛 자아가 세상과 이어져 있었습니다옛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이죠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이 옛 자아를 부인 당하는 것입니다그래서 그 결과는 옛 자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던 세상이 점점 심심해 지는 것입니다무료해 진다고요하느님 없으면예수 없으면 그냥 그렇게 처절한 거에요아픈 것입니다예수로 행복하세요.

 

 

  



1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