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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드는, 역사에 남을 용산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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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하 [jiyoha] 쪽지 캡슐

2009-07-21 ㅣ No.10064

                                    역사를 만드는, 역사에 남을 용산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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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7월 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꼭 반년이 되는 날이었다. 반년이 됐다는 것에는 반년이 지나도록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그 불가해한 사실이 포함된다. 언제 어떻게 해결이 될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지난 5월 18일 이후로 무려 두 달 넘게 용산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다. 그동안 병환을 겪으시는 노친 곁에서 생활하느라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연 용산미사에 자주 참례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마음 아팠다.
 

▲ 두 달만에 참례한 용산미사 / 전에는 큰 도로 쪽에 제대를 모셨는데, 언제부턴가 골목 안쪽에 제대를 모신 것을 보게 되었다. 자연 제대가 큰 도로 쪽을 향하는 형태가 되었다.  
ⓒ 지요하  용산미사

서울성모병원에 노친의 약을 지으러 가는 일 외로도 두 번 먼길 나들이를 했다. 노무현 젼 대통령의 49재를 맞아 지난 9∼10일 봉하마을을 갔다온 일과 '굿자만사(가톨릭 굿 뉴스 자유게시판에서 만난 사람들)' 모임 참석 일로 15일 서울을 갔다 온 일이다.

봉하마을을 갔다 오는 일은 3박 4일의 긴 여정이어서 방학중임에도 서울에서 생활하는 딸아이를 집에 내려오게 했다. 15일 서울에 갈 때는 노조 파업으로 일터에 가지 않은 동생 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용산 생각으로 마음이 묘하게 불편했다. 15일 저녁의 굿자만사 모임 자리에서는 "오늘 서울까지 와서 용산미사에도 참례하지 않고, 용산미사를 외면한 것 같은 형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불편하고 죄스럽게 느껴진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럴 정도로 나는 늘 용산미사를 생각하며 살았다. '재개발'의 음험한 문제점 속에서 공권력의 과도한 행사로 무참하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다섯 영혼들을 무시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 '남일당성당' 모습 / 참사가 벌어진 건물 이름이 '남일당'이었다. 그 건물 바로 옆 건물에서 매일같이 미사가 거행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남일당성당'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 지요하  용산미사

민주 국가에서 다섯 명의 시민이 공권력이 관련된 상황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는데도 아무도 사과하는 사람이 없는 현실, 유가족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다섯 명의 시신을 순식간에 부검 처리해 버린 일, 법원의 공개 결정에도 불구하고 검찰이 1만 쪽에 이르는 방대한 수사기록 중에서 3천 쪽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사실, 순천향대병원 냉동고 안에 시신들을 가둬놓고 유가족에게 시신 공개조차 하지 않는 일 등을 생각하면 민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분과 한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공분 속에서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느님을 믿고 사는 천주교 신자이므로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도를 해야 했다. 가엾은 다섯 영혼들을 위로하고, 유가족들의 참혹한 슬픔과 쓰라린 심정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과 행동이 천주교 신자인 나에게는 참으로 중요했다.

매일같이 저녁 7시에 참사 현장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하느님께서 배려하신 일임을 굳게 믿는다. 이 땅에 천주교회가 존재하고 가난한 이들, 억울한 이들과 함께 하는 정의로운 사제들이 있어 억울한 영혼들과 유족들을 위로하는 미사가 연일 거행된다는 것은 얼마나 장엄하고도 의미 있는 일인가.

천주교의 그런 사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영혼들과 유족들은 어디에서 위안을 받고 슬픔을 달래며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 모든 불의한 일들은 두꺼운 장막에 가려지고 간단히 망각의 어둠 속으로 묻혀버리고 말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 하느님 교회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 교회의 존재 가치와 당위성을 한껏 살려내면서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주는 일은 신자된 사람의 소명이 아닐 수 없다. 그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미사에 참례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는 일이지만 바로 그것 자체가 천주교 신자로서 크게 공덕을 쌓는 일이 아니겠는가.


▲ 다섯 영혼들 영정 앞의 촛불들 / 용산참사 다섯 명 열사들의 영혼은 매일같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일반 시민들의 촛불로 위로를 받는다.  
ⓒ 지요하  용산미사

그래서 나는 7월 20일, 용산참사 발생 6개월을 넘기는 날의 미사만큼은 꼭 참례하고자 했다. 아내가 적극 거들어주었다. 아내는 방학을 맞았지만 이 달 말일까지는 오전 근무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오전 근무만 하고 집에 오니 내가 오후에 서울을 갈 수 있고, 또 다음날 아침 일찍 첫 버스로 내려오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봉하마을에 갈 때와는 달리 어머니께 20일의 용산미사에 참례하고 싶은 의향을 말씀드렸다. 병환을 겪기 시작하면서 심경에 변화가 생겨서 내 승합차 뒷문 유리에 붙어 있는 '조중동은 사죄하라'는 딱지를 떼라고 성화를 부리셨던 어머니는 용산미사 참례는 반대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또 서울엘 간다하니 서울의 손주들에게 음식 보낼 궁리를 하셨다.

나는 가족 나들이가 아니고 혼자 움직일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것이 비용도 적게 든다. 버스와 전철을 이용하면 시간도 단축된다. 거기다가 운전 고생도 하지 않으니 세 가지 득을 보는 셈이다. 하지만 도리 없이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어제도 서울에서 일박하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오늘 아침 7시 10분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지방에서 사는 핸디캡을 또 한번 실감하면서….    
      

<2>


▲ 초 봉헌 / 용산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은 축성된 초를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리고 그 초를 제대 앞과 분향소 다섯 영혼들의 영정 앞에 놓아 드린다.  
ⓒ 지요하  용산미사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아이들의 자취방이 있는 합정동으로 가면서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올해 대학교 4학년인 딸아이는 용산미사에 함께 갈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친구들과 에버랜드에 가 있다는 1학년생 아들녀석은 아직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지하철 안의 주위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의 큰소리로 아들녀석에게 호통을 쳤다.

"대학생 놈들이 사회문제에도 좀 관심을 갖고 뜻 있는 일에 참여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만날 놀기만 하면 되냐? 네 친구들에게 용산참사 문제에 대해서, 또 용산미사에 대해서 설명 좀 하고 모두 일곱 시까지 용산으로 데리고 와. 알았어?"

아빠를 따라 용산미사에 두어 번 참례한 경험이 있는 아들녀석은 그렇게 해보겠다는 대답을 했지만 왠지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녀석은 끝내 용산에 오지 않았다. 나는 별 수 없이 딸아이만 데리고 미사에 참례해야 했다. 아쉬운 대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딸아이도 함께 하지 않았다면, 두 아이를 서울에 두고도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미사에 참례하는 심정이 적잖이 괴롭고 섭섭할 텐데….


▲ 분향소를 찾는 이들 / 참사발생 여섯 달이 지나는 20일 저녁에는 더욱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고 분향소를 찾았다.  
ⓒ 지요하  용산참사

용산참사가 발생한지 반년이 되는 날이라는 인식 덕인지, 그 인식이 알게 모르게 공감과 각성의 폭을 확대시킨 결과인지 참으로 많은 이들이 미사에 참례했다. 내가 여러 번 용산미사에 참여한 중에 지난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기념일' 미사 때 가장 많은 이들이 참례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보다도 몇 곱절은 더 오신 것 같았다.

나는 복잡하고 비좁은 통로 아닌 통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남일당성당'의 풍경을 관찰했다. 미사 중 영성체 후 시간에 이강서(서울대교구 빈민사목담당) 신부님이 다시 한번 들려주신 말씀이지만, '남일당'은 참사가 발생한 건물의 이름이었다. 그 건물 바로 옆 골목에서 매일 미사가 거행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남일당성당, 또는 남일당본당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남일당성당은 이날 완전히 십자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전에는 큰 도로 쪽에 제대를 모셨고 골목 안쪽으로 신자들이 자리했는데, 언제부턴가 골목 안쪽에 단을 설치하고 그 단 위에 제대를 모시고 있었다. 사제들이 제의실로 사용하는 건물의 한 방과 가까운 자리였다. 그 제대가 놓인 곳으로부터 큰 도로 쪽으로 반듯한 골목이 있고, 또 그 제대 자리로부터 10여 미터 지점에서 팔을 벌인 듯이 두 개의 골목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두 개의 골목길이 만나는 지점의 위쪽에 제대를 모시고, 그 앞으로 또 양옆으로 신자들이 꽉 차게 자리하니 완전히 십자가 형태를 이루는 것이었다. 두 골목의 모양만으로는 십자가 형태가 될 수 없을 터였다. 그 골목의 한 곳에 제대가 모셔지고 사제들이 자리하고 두 개의 골목길에 신자들이 꽉 들어참으로써 온전히 십자가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 제의실 안의 사제들 / 사제들이 제의실로 사용하는 건물 방 안에도 사제들이 가득 찰 정도로 많은 신부님들이 오셨다.  
ⓒ 지요하  용산미사

사제들은 50여 분이 오셔서 제대 주위와 제대 아래 한 옆과 제의실로 사용하는 방까지 메우다시피 했다. 이강서 신부님은 많은 신자들의 참여에 감격하신 목소리였다. 2,200명 정도 오셨다고 했다. 매일같이 미사를 지내며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의 수를 파악해온 익숙한 눈대중일 테니 거의 정확한 수치일 터였다.              

미사의 주례는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장 김용태 신부님이 맡으셨고, 복음 봉독과 강론은 서울대교구 빈민사목부 임용환 신부님이 해주셨다. "지금 여름의 최 절정에 와 있는 것처럼 용산참사도 투쟁의 꼭대기에 와 있다"는 강론 내용이 의미 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고(故) 윤용현님의 부인 유영숙씨가 낮에 순천향대병원 앞에서 있었던 피눈물 어린 이야기를 토로한 후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모든 신자 여러분께 감사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사랑으로 용기와 힘을 주실 것을 부탁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신자 석에는 과거 대통령 후보였던 백기완 선생과 민주당 송영길 의원, 민노당 강기갑 대표와 진보신당 노회찬씨 등의 모습도 보였다. 수녀님들 사이에 스님도 한 분 앉아서 끝까지 자리를 함께 했다. 승복을 입고 염주를 쥔 채 천주교 미사 전례에 끝까지 함께 하시는 스님의 모습은 내 눈에 참으로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그 스님 모습을 미처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 크다.  
      

<3>

1995년 5월 사상 유례 없는 '명동성당 침탈' 사건이 벌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이기 때문에 명동성당 침탈 사건이 벌어졌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민주화가 이룩되었으므로 '민주화 성지'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 수녀님들의 환호 / 참사발생 6개월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더욱 많은 수녀님들이 미사에 오셨다. 임용환 신부님의 강론에 수녀님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있다.  
ⓒ 지요하  용산미사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정권 시절의 전임자들은 감히 생각도 못했던 폭거를 자행한 사람이 이른바 '문민정권'을 표방하는 김영삼 대통령이라는 사실에 많은 국민이 경악하고 분노했다. 그가 바로 '개신교 장로'이기 때문에 한국통신노조간부 농성을 진압하기 위해 명동성당 구내로 경찰병력을 투입하는 과감성을 발휘했다는 말은 상당히 신빙성이 가는 말이었다.

그때로부터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경찰국가'의 면모를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다. 용산참사 현장에서 매일 저녁 거행되는 용산미사에 여러 번 참례하면서 경찰국가의 실체를 체감하곤 한다.

용산참사 현장은 이미 어느 모로는 '본당' 성격을 갖추었고, '성지'가 되어 가고 있다. 성당도 성지도 아닌 곳에 천주교 사제들이 상주하다시피 하며 매일같이 미사가 거행되는 곳이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수많은 교구와 수도회의 사제들이 적게는 서너 분에서 많게는 70여 분까지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는 곳이 이 '남일당성당' 말고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런데 이 특별한 '성지성당'은 이미 두 번이나 공권력에 침탈을 당했고, 계속 공권력의 침탈 위험에 놓여 있다. 경찰병력에 에워싸인 상태로, 감시의 눈초리 안에서 미사를 거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경찰이 노골적으로 유린 행위를 자행하여 사제들이 폭행까지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런 일은 언제 또 발생할지 모른다.


▲ 50여 분의 천주교 사제들 / 제대 주위에서, 재대 아래에서, 또 제의실로 사용하는 건물 방 안에서 도합 50여 분의 사제들이 참사발생 6개월이 지나는 날의 미사를 봉헌했다.  
ⓒ 지요하  용산미사  

연세 일흔이 넘은 노 사제도 땅바닥에 넘어져서 발로 밟히고, 사제들의 로만 칼라 복장도 마구 찢겨지는 모습을 보면서, 개신교 장로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6월 4일 청와대에서 있은 7대 종단대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광주교구 김희중 주교님이 그 문제를 거론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놀란 듯이 "알아보겠다"는 말을 했다는데, 그 후로 더욱 험악한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은 뻔뻔스럽게도 유럽 순방 중에 바티칸으로 가서 교황님을 알현하는 일도 벌였다.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마치면서 괜한 소리 한번 해본다. 천주교 신자인 한승수 국무총리, 김경환 법무부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당신들 한번 용산미사에 참례해 보시라. 천주교 신자이니 용산미사에 참례할 수 있지 않은가? 용산미사에 참례하여 회개도 좀 하고, 유족들의 아픔도 좀 헤아려보고, 기도로 힘을 얻은 다음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과' 권유도 좀 해보고,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해결책을 적극 모색해 보시라.  


09.07.21 19:49 ㅣ최종 업데이트 09.07.21 19:49  지요하 (sim-o)  
출처 : 역사를 만드는, 역사에 남을 용산미사 - 오마이뉴스
용산참사, 남일당, 공권력 침탈, 용산미사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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