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성당 게시판

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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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규 [monk] 쪽지 캡슐

1999-11-04 ㅣ No.198

+찬미예수님

다름이 아니라 좋은 글이 있어서요...

아! 염태동 선생님도 축하드립니다.

 

성크리스토퍼 성당에 새로 부임한 루디 신부는, 곧 세라피나 할머니를 주목하게 되었다. 세라피나 할머니는 매일같이 신자들이 다 집에 가고 없는 한가한 시간에 텅 빈 성당을 찾아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루디 신부 역시 이전부터 인기척이 없는 그런 시간에 성당에 들르는 버릇이 있었다. 성무일도서를 읽는 데 정신집중이 더 잘 되었기 때문이다. 시원한데다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성당 안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기도할 마음이 생겼다. 바로 이 귀중한 시간에는 늘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류머티즘으로 인한 통증도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런데 성크리스토퍼 성당의 상황은 달랐다. 성당에 찾아간 시간이 세라피나 할머니와 일치했을 경우, 루디 신부의 마음은 도무지 평안하질 못했다. 가장 구석 자리로 물러나 앉더라도, 항상 맨 앞줄에서 장궤하고 노래 부르듯이 큰 소리로 가도를 올리는 세라피나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부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니라 세라피나 할머니는 교회의 전통적인 기도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세라피나 할머니는 주님의 기도마저 마음대로 뜯어고쳐 이렇게 읊었다.

"하늘 나라에 마음을 두고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모든 성인의 대축일이 되시오며, 그 나라님이 오지 않으시며..."

세라피나 할머니는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모르는 것이 분명하였다.

세라피나 할머니가 암송하는 말도 안 되는 기도문을 처음 들었을 때, 루디 신부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참으로 딱하군! 주님의 기도는 기도 중의 기도로 가장 거룩한 기도인데... 예수님이 몸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도 제대로 외지 못하다니... 아주 힘이 탁월해서 뭇 성인들이 이 기도를 가지고 기적적인 치유를 하기도 했는데 말이야. 내가 듣기로는 예수님이 처음 제정하셨을 때와 온전히 똑같은 마음 상태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그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태양과도 같이 빛난다는데... 사실 말해서 아직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본 적도 없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지만 말야. 어쨌든 저 할머니는 그런 체험은 생전 못해 볼 거야. 어림도 없지. 저런 황당무계한 말을 가지고 어떻게..."

어느 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루디 신부는 그 일을 좀 손보기로 했다.

’나는 세라피나 할머니의 본당 사제이니만큼, 주님의 기도를 똑바로 외도록 가르쳐 주는 것은 나의 의무이기도 해.’

무릎 관절이 욱신욱신 쑤셔 왔지만, 고통을 참으며 루디 신부는 성무일도서를 내려놓고서 성당 맨 뒷좌석에서 할머니가 앉아 있는 맨 앞좌석까지 걸어나가 말했다.

"주님의 기도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다니 기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할머니께서 외고 계신 기도의 말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말과 똑같지 않군요..."

신부는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바로잡아 준 다음, 결론지어 말했다.

"올바른 말로 기도를 하면 영적으로 더 한층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세라피나 할머니는 루디 신부에게 가르쳐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는 류머티즘으로 인한 통증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성당 뒤쪽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는 할머니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주의 기도를 똑바로 외는 소리를 들으며 매우 흡족해 했다.

성무일도서를 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신부는 생각했다.

’이제 할머니가 틀리지 않고 외시니 분명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영적 은혜를 받게 될 거야.’

그런데 그가 다음 시편 구절을 막 읽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할머니의 기도 소리가 뚝 끊겼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시작되었는데,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하늘 나라에 마음을 두고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모든 성인의 대축일이 되시오며..."

루디 신부는 안됐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사뭇 철학적인 명상에 잠겨 이렇게 중얼거렸다.

"낡은 미신을 타파하고, 하나밖에 없는 좁고 험난한 정통 노선을 따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팔에 살짝 손을 대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전기가 통하는 것같이, 뜨거운 불길이 그의 온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불쾌한 느낌은 없었고, 오히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지극히 행복한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놀랍게도 류머티즘으로 인한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청년 시절의 건강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외쳤다.

"하느님, 류머티즘이 완전히 치유되었어요!"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눈부신 빛에 감싸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을 들어 보니, 다름 아닌 세라피나 할머니가 그의 팔에 손을 얹은 채 그 옆에 서 있었다. 세라피나 할머니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두 눈은 천정에 높이 걸린 두 개의 태양과 같이 빛났으며, 얼굴도 온통 초자연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라피나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나도 밝게 빛나고 있어서 신부는 눈이 부셔 오래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런 현상은 10초 남짓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루디 신부가 환상이나 환영을 본 게 아님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분명 세라피나 할머니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 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경외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루디 신부에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신부님이 새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문을 금새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괜찮으시다면 다시 한 번 올바로 가르쳐 주시겠어요?"

자아 도취로 우쭐하여 감히 거룩하신 그 분을 인도하겠다고 나섰던 자신이 심히 부끄러워 신부는 더듬더듬 말했다.

"걱정 마세요, 할머니. 하느님은 할머니의 기도 방식을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그날부터 본당 신자들이 세라피나 할머니의 기이한 주님의 기도에 대해 트집잡으려 할 때마다 루디 신부는 미소만 지으며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여러분 모두가 그분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닐 기유메트의 책 "독수리 날개에..." 중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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