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신호등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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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venivediveci] 쪽지 캡슐

1999-12-02 ㅣ No.1228

아스팔트 위의 초록불이 깜빡이고 있다. O · O · O · O · 저 초록불이 깜빡이고 있슴은 나에게 어서 건너가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기다리고 다음에 건너라고 하는 걸까? 초록불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서 가기 시작하면,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이 빨간불로 변하여 서둘러 가던 방향에서 되돌아와야 하고, 초록불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서 가지 않으면, 아직도 깜빡대고 있는 그 불앞에 망설이고 있는 자신을 원망한다. 뛰어가려다 되돌아올 때는 나의 신중하지 못했음에 아쉬워하고, 가지 않고 주저할 때는 나의 소심함에 답답해한다. 망설이지 않고 대범하게 달려들다가 결국 건너지 못할 때는 나의 지나친 자신감에 좌절하고, 곰곰이 생각하느라 결국 한 발을 내딛지 못할 때는 나의 지나친 신중함에 부끄러워한다. 보고 있는 경찰관이 있더라도 달려갈 수 있는 빠른 발과 보고 있는 경찰관이 없더라도 가지 않을 수 있는 느긋함이 내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자신감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느긋하게 되돌아볼 수 있는 신중함이 내게 있다면... 도로공사는 초록신호등을 몇초동안 깜빡이도록 설계했고... 하느님은 이 세상일들이 얼마동안 깜빡이도록 설계하셨다... 내 앞의 가지가지 일들이 오늘도 깜빡이고 있다. O · O · O · O · 저 일들이 깜빡이고 있슴은 나에게 어서 일어나 주저함없이 행하라고 하는 걸까, 아니면 차근히 앉아 기다리고 생각하라고 하는 걸까? 수많은 교차로에서 일어나는 교통사고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깜빡이는 신호등 앞에서 기도한다. 주님, 제게 사려깊은 자신감과 망설이지 않는 신중함을 허락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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