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부활 제4주일]착한 목자 (요한 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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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4-22 ㅣ No.98

 


 

[부활 제4주일]착한 목자 (요한 10,11-18)

 

 

베드로는, 우리는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다며,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구원받는 데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다고 한다. (사도4,8-12)
그 무렵 8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우리가 병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오늘 신문을 받는 것이라면, 10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11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다. (1요한3,1-2)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착한 목자이며,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신다. (요한10,11-18)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1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5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18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제1독서 (사도4,8~12)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 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11~12)

 

베드로는 산헤드린 최고 의원들 앞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면서 과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신 마태오 복음 21장 42절 말씀을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에 자신이 기록한 서신인 베드로 1서 2장 7절에서도 예수님께 관하여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하고 언급한다.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에 없어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집주인)은 그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모퉁이 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어 자신이 그 건축물의 주인임을 드러낸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장 22절 인용이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러한 구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면, 이스라엘은 이방의 강대국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들어서 집을 짓는데 긴요한 모퉁이 돌, 즉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내용을 역설적으로 적용하여 자신의 사명의 성격을 나타내셨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무가치하게 여겨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요한2,20~22) 교회의 모퉁이 머릿돌이 되셔서 귀하게 사용되실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서'에서 '주어진'으로 번역된 '데도메논'(dedomenon)'주다'(give)를 뜻하는 '디도미'(didomi)완료 수동태 분사인데, 여기서 수동태는 그 주체가 유일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구원받는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에서  '없습니다'해당하는 '우크 에스틴'(uk estin)현재 시제이다. 

여기서 현재 시제는 변치 않는 진리(truth)사실(fact)을 나타낸다.

그리고 본절에서 '구원'에 해당하는 '소테리아'(soteria)'치유' '구원' 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먼저 '치유' 육체적 구원이라는 의미 갖는다(히브11,7). 이 경우는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고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役事)를 가리킨다(사도3,6~8).

 

두번째, '구원'은 영적인 구원의 의미이다(2코린7,1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제관과 그 무리들이 구원받지 못할 백성임을 밝힌 셈이다.

위의 두 가지를 종합하면, 베드로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이중적 의미를 통해서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관과 무리들을 향해 '성전의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육신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질병이나 물질의 축복만을 구한다. 또 반대로 어떤 이들은 육신의 일이나 현세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영적인 구원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온전해지는 총체적이고도 전인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복음(요한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11~12)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0장 7절에서 11절과 동일'나는~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라는 양식을 사용해서 당신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밝히셨는데, 여기서는 '착한 목자'로 밝히신다.

이것은 '양의 문'과 '착한 목자'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하는 '칼로스'(kalos; good)'도덕적으로 선한', 혹은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칭찬할 만한' 등의 의미를 전달한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목자이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다윗은 주님을 가리켜서 '나의 목자'라고 하였다(시편23,1).

히브리어 '야훼로이'(yaheh roi)는 새 성경이 번역한 것처럼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라는 뜻인데, 70인역(LXX)은 이것과 다르게 '주님께서 나를 먹이신다'(kyrios poimainei me'; '퀴리오스 포이마이네이 메')로 번역했다.

'먹이신다'에 해당하는 '포이마이네이'(poimainei)'포이마이노'(poimaino)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이며, 목자의 직분을 잘 나타낸다.

말하자면, 양을 인도하고, 안내하고, 다스리며, 보호하고 양육하다는 뜻이 이 동사 안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이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주님께서 자신을 이처럼 계속적으로 돌보고 계심을 다윗은 증거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들 때에, 너무나 유명한 시편 23장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 속에 담긴 목자의 의미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에 해당하는 '텐 프쉬켄 아우투 티테신'(ten psychen auteu tithesin; lays down his life; gives his life)능동형으로서,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일치하는 선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오셨다(1요한2,2).

죄 중에 있는 인생들을 속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오신 것이며, 많은 이들의 죄를 대속하는 몸값은 예수님 당신의 목숨이셨다(마르10,45).

예수님께서 의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불경한 자,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으신 사실(로마5,6~8)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당신 목숨마저 양들을 위해서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대조된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점을 물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았으며(마태23,4), 사람들을 모두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마태23,15).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었던 것이다(마태7,15).

오늘날도 역시 가장 경건한 것처럼 보이는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노략질하는 이리가 있을 수 있다.

사탄위장술의 대가이기 때문에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하며, 사탄의 졸개인 마귀들도 자기들을 의로움의 일꾼으로 꾸미는 특성이 있다(2코린11,13~15).

착한 목자와 같은 일꾼과 마귀의 일꾼을 분별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과연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주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삯꾼'에 해당하는 '미스토토스'(misthotos; the hired hand)'고용하다', '일을 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미스토오'(mistho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주인이 아니라 돈 때문에 고용이 되어 일하는 사람이다.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품꾼'을 뜻하는 히브리어 '싸키르'(sakir)번역어로 나타난다(탈출12,45; 레위19,13 등).

이 사람들은 양들을 돌보는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보수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참된 목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이들은 비록 외형적으로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참된 목자는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질 물질에만 있기 때문이다.

 

'목자가 아니고'에 해당하는 '카이 우크 온 포이멘'(kai ouk on poimen; is not the shepherd)에서 '온'(on)'에이미'(eimi; is)의 현재 분사인데, 부정어 '우'('ou'; 모음 앞에서는 'ouk')가 분사와 함께 쓰일 때에는 강한 어조나 대조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목자가 아니라는 확실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또한 현재 시제가 진행 중의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앞으로도 도무지 목자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요한10,1; '도둑이며 강도다'; 로마2,21.22; 마태21,12.13; 마태23,16~19).

착한 목자들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양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자기 양처럼 여기고 보호한다. 

하지만 삯꾼은 다르다. 그는 다만 품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어서 양들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은 주인 의식이 없기 때문에 양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요한 복음 10장 11절에 나오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보면'에 해당하는 '테오레이'(theorei; sees) '테오레오'(theoreo)단수 3인칭 현재 시제이며, '응시하다', '감지하다'기본적인 뜻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즉 이것은 양을 노리는 이리가 접근하는 것을 현재 감지하고 있는 긴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양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 '이리'로 번역된 '뤼콘'(lykon; the wolf)원형 '뤼코스'(lykos)는 성경에서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 (마태10,16)고 말씀하신 것과,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감독들에게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와 양 떼를 해칠 것(사도20,29)에 대해 경고한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들의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제에브'(zeeb)의 번역어로 나오는데, '제에브'(zeeb) 개과로 알려진 육식성 포유 동물로서 혼자서, 혹은 떼를 지어 사냥을 하며, 용감하고 난폭하며 탐욕적이어서 보통 먹을 수 있는 분량 이상을 사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리가 접근한다는 것은 양들에게 위험이 임박했다는 징조인데, 이때 삯꾼은 양들의 안전을 지키려고 위험에 맞서는 대신에 양들을 버리고 도망치고 만다.

'버리고 달아난다'에 해당하는 '아피에신~카이 퓨게이'(aphiesin ~kai pheugei; abandons~and run away)는 모두 단수 3인칭 현재 시제로서, 위험을 감지한 삯꾼이 취하는 약삭빠른 행동을 실감나게 보여 주며, 이 두 동사가 모두 현재 시제라는 점은 삯꾼들이 늘 이와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이 말씀의 뜻은, “나는 착한 목자로서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목숨을 내놓으려고 이 세상에 왔다.”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요한 15,13-14.공동번역).”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당신을 ‘목자’로, 우리를 ‘양’으로 표현하셨지만,

이것은 좀 더 쉽게 알아들으라고 사용한 표현일 뿐이고,

실제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벗’이 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과 신앙인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도 아니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도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벗’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기만 하면 저절로 예수님의 벗이 되는 것은 아니고,

충실한 벗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목숨을 내놓는다.” 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다 내준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만 내놓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사랑이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충실한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은 하나입니다.

사랑 실천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요한 10,12-13).”

이 말씀은, 거짓 목자, 또는 사이비 목자를 조심하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사이비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얻을 이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위험이 다가오면, 또 기대한 만큼 이익을 얻지 못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양들을 버립니다.

(양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목자가 아니라 사이비 목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너희는 누구에게도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이를 속일 것이다(마르 13,5-6).”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마르 13,21-22).”


바오로 사도는 거짓 사도들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진짜 사도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심 없이 일하지만,

거짓 사도, 또는 사이비 사도는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서 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은 예수님의 일에 방해만 되기 때문에,

사탄이 하는 일과 같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이비’를 식별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진짜와 거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첫 번째 식별 기준은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이비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라는 말씀은, “나는 내 양들을 사랑하고”로 해석됩니다.

이 ‘사랑’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

즉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신적인 사랑(아가페)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사랑, 일치, 결합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라는 말씀은,

참된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마르 12,31)”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신앙인의 일치의 원형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완전한 일치입니다.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예수님과 우리도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요한 10,16).”

여기서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이라는 말은,

원래는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 즉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아직’ 예수님을 안 믿고 있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 밖에 있다고 해서 목자의 양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종교와 신앙이 다르다고 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다만 안 믿는 사람들 자신들이 그 진리를 모르고 있거나 외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밖에’ 있는 양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 노력도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즉 선교활동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고,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신앙인 자신도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안에’ 있다고 자만하거나 방심하면 안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목자와 삯꾼의 차이  

오늘 우리 사회는 물론 교회에서조차도 그 존재 이유인 헌신적이고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위해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증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가난과 소외와 불의에 맞서는 ‘양 냄새나는 목자’, ‘국민과 함께하며 국민의 아픔과 시련을 어루만져주는 정치지도자’,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서로를 따뜻이 품어주는 손길이 있어 소박한 행복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그리운 때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양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양떼를 잘 알고 친히 하나하나 생명을 돌보시는 목자로 표현된다. 당시 팔레스타인 관습에 따르면 여러 목자의 양떼들이 밤중에는 한 우리에 갇혔다가 날이 밝아 목자들이 오면 각기 자기 목자들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을 따라갔다. 예수님은 ‘삯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착한 목자’이시다(10,11).

‘착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착한 목자는 양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에 자기 양들을 잘 알며(10,14) 헌신적이며 사랑으로 책임을 질 줄 알며, 목숨까지도 내놓는 희생을 감수하는(10,11. 17) 지도자이자 동반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0,1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밖의 ‘다른 양들’도 그분의 목소리 곧, 복음 말씀을 듣고 모이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목소리를 들을 것입니다’란 미래형 표현은 일종의 예언으로서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다는 약속과 확실성을 시사한다. ‘착한 목자’는 ‘모두’를 사랑하며, 그 사랑은 끝이 없다.

삯꾼은 착한 목자와는 전혀 다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0,12-13) 삯꾼은 양들과의 친밀한 내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므로 무관심하며(10,13) 헌신적이지 않으며 오직 품삯과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한다. 이런 삯꾼의 모습은 영광만을 서로 주고받는 유대 지도자들(5,44; 12,43), 율법을 모르는 이들을 저주하거나(7,49) 사람들을 회당에서 내쫓는 바리사이들(9,22. 34)을 가리킨다.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국민과 하느님 백성들에게는 무관심하고 사랑이 없으며, 자신의 안위에 영달과 출세만을 추구하는 지도자들도 없지 않다. 사랑으로 섬기고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 양 냄새나는 착한 목자, 사랑의 지도자, 더불어 삶을 호흡하는 진정한 동반자는 어디에 있는가? 허허로운 들판처럼 텅 비어 있고, 외딴 섬의 황혼처럼 쓸쓸한 외로움과 씁쓸함이 밀려오는 그 자리에 우리의 무관심과 이기적인 죄의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지도자와 동반자를 찾기 어렵다면 ‘나’ 자신이 ‘먼저’ 그런 존재가 되어보는 것은 어떤가? ‘나’를 떠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손길을 내밀고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시간과 땀과 재물을 내어놓고 생명을 주고받는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권위는 진정한 사랑 실천에 있는 것이지 ‘이름뿐인 직함’에 있지 않으니... 나 자신부터 ‘삯꾼’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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