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18주일] 생명의 빵(요한6,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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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8-05 ㅣ No.118

 


 

[연중 제18주일] 생명의 빵(요한6,24-35)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늘에서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신다. (탈출 16,2-4.12-15)
그 무렵 2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3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나는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겠다.
12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3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14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15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에페 4,17.20-24)
형제 여러분, 17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20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며, 당신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6,24-35)
그때에 24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탈출16,2-4.12-15)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2)

 

여기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에 해당하는 '위다템'(widathem)'알다'(창세19,33), '이해하다'(잠언10,19) 등의 뜻을 지닌 동사 '야다'(yada)의 2인칭 복수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는 단순히 어떤 사실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 어떤 대상을 매우 자세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게 됨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녁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양식으로 배부르게 되는 경험을 통해, 하느님이 주님, 곧 그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아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은 메추라기와 만나 사건의 중요성 나타내 주고 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출애굽 과정에서 권능의 팔과 큰 재앙으로 이집트에서 행하신 구원의 업적을 통해 자신이 주님,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심을 알리셨다(탈출6,7.8).


그런데 이제 다시 메추라기와 만나를 통해 똑같은 사실을 알리시려고 하신다. 이것은 곧 하느님은 계약에 신실하신 구원의 주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풍성하신 은혜의 주 하느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쳤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13)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로 번역된 '왓타알 핫셀라우'(wathaal hasellau)에서, '날아와' 로 번역된 '왓타알'(wathaal)은 '올라가다'(창세13,1 ; 1역대14,10), '올라오다'(창세2,6 ; 여호4,16)란 뜻을 지닌 '알라'(alla)의 미완료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로 '와우' 계속법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왓티알 핫텔라우' 는 저녁이 되자, 메추라기 떼가 지평선 너머에서 이스라엘 진영 위로 갑자기 올라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의 숫자가 남자 장정만도 약 60만여명이라 했는데, 여기서 장정이란 20세이상 결혼한 남자를 가리키고, 이 숫자를 인구수로 계산했으므로, 적어도 한 가족의 수는, 자녀를 둘로 잡았을 때, 적어도 240만 명으로 추정된다.

약 24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영으로  올라오는 메추라기 떼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 메추라기 떼의 규모가 '하룻길 되는 너비로 떨어뜨려,땅 위에 두 암마 가량(약 90cm)'(민수11,31) 되는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 그 광경에 압도 되었을 것이다.


한편 '메추라기'를 뜻하는 '셀라웨'(sellaye)는 짧은 날개와 작고 둥근 머리와 통통한 몸집을 가진 (科)의 철새이다. 이 메추라기는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뗴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왔다가 가을 쯤 아라비아와 시리아 쪽으로 이동해서, 겨울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메추라기 떼가 이스라엘 진영에 내린 것은 단순히 철새 이동에 의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하느님께서 마치 이집트에 메뚜기 재앙을 몰고 오신 것처럼, 당신의 초자연적 전능으로 바람을 일으키시어, 바다 쪽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오신 것이다(민수11,31).

그런데 이 메추라기는 40년간 내렸던 만나(탈출16,35)와는 달리 1개월 동안만 내려졌다(민수11,21).


'이슬이 내렸다' 로 번역된 '하예타 쉬크바트 핫탈'(hayetha shikbath hatal)은 

직역하면 '그 이슬의 층이 었었다' 이다. 새 성경에서 번역을 생략한 '쉬크바트'는 '눕다'(창세19,4 ;2열왕9,16)란 뜻을 가진 동사 '샤카브'(shakab)에서 유래한 명사 '셰카바'(shekaba)의 연계형으로  '셰카바'는 (얇은)층(layer)을 의미한다.

 

이것은 '핫탈'(이슬 ; the dew)이 진영을 중심으로 그 주변 사방을 완전히 덮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진영 둘레에' 로 번역된 '싸비브 람마하네'(sabib lammahaneh)'그 진영을 향하여 둘레에' 란 뜻이다.

새 성경은 '싸비브'를 '땅 곳곳으로', '사방'(사면)(1사무31,9 ; 시편52,3)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원래 그 뜻은 '~둘레에'(round about, around)란 뜻이다.


그리고 '람마하네'는 '진'(진영)을 뜻하는 명사 '마하네'(mahane)에 전치사 '레'(le)가 결합한 것으로, 여기서 전치사 '레'는 '~쪽으로', '~을 향하여' 란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본문은 진영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듯, 이슬이 진영 둘레에 내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메추라기가 진영 안에 덮인 것과는 달리, 만나가 이처럼 진영 둘레에 내린 것은 사람의 발에 밟혀서 쓸모없게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신 하느님의 세심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진영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내렸다는 것 역시 만나를 거두러 나갈 때 각 진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깝고 편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은 큰 일은 물론 세심한 문제까지 일일히 보살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14)


원문 성경에는 '작은', '세미한', '잘기가', '잔'(이사29,5 ; 1열왕9,12참고)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따크'(taq)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만나가 마치 가루와도 같은 매우 작은 결정체였음을 보여 준다.

 

한편, '알갱이들이'로 번역된 '메후쓰파쓰'(mehusphas)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쓰인 단어로, '둥글며'(a round thing) 혹은 '얇은 조각 같은 것'(a fine flake like thing)으로 영어 성경에서 번역되었다.


이처럼 본문은 모양과 빛깔과 맛 등, 보다 구체적으로 만나를 묘사한 탈출기 16장 31절에 비해 외관적인 묘사에만 치중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생전 처음 보았기 때문이고, 또한 아직은 그 맛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탈출기 16장 31절에는 "이스라엘 집안은 그것이 이름을 만나라 하였다.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  라고 되어 있었다.

 

'만나' 라는 이름은 탈출기 16장 15절에,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고 서로 물은 데서 나왔다. 그러니까, '만나'(manna)'이게 무엇이냐?'(what is this?) 라는 뜻이다.

 

한편 탈출기 16장 21절에는 "그들은 아침마다, 제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 들였다. 해가 뜨거워지면 그것은 녹아 버렸다." 고 전한다.

 

여기에 대해서 지혜서 16장 27-28 "불에도 없어지지 않던 그것이 잠깐 비치는 햇살에 따뜻해지자 그냥 녹아 버린 것은, 당신께 감사하기 위하여 해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동틀 녘에 당신께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고 계시해 주고 있다.

 

 

연중 제18주일 복음(요한6,24~35)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35)

 

요한 복음 6장 27절은 오병이어 기적의 진정한 의미가 되는 영생의 양식을 주는 주제가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는 중요한 구절이다.

 

'~말고 ~하라'로 번역된 '메~알라'(me ~alla; not~but)는 전자는 부정하고, 후자는 긍정함으로써 후자를 강조하는 구분이다.

 

여기서 먹어도 결국 죽게 될 '썩어 없어질 양식'과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증하시고 인정하신 예수님께서 주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대조하여 후자를 취할 것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서 종종 쓰신 용어인데, 메시야 동의어로 보는 것이 옳다(다니7,13).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 양식을 주시는 분으로 선언하신다.

여기서 '줄 것이다'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will give) '디도미'(didomi)미래 시제로서 진행적인 의미와 더불어 받는 자들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이 양식을 얻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양식은 인간이 자신의 방식대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썩어 없어질 양식' 구별된다.

'디도미'(didomi) 안에 들어 있는 '하사하다'(grant), '수여하다'(bestow)는 의미가  나타내듯이, 이 양식은 하느님에 의해 은총으로만 주어지는 선물인데(에페2,8.9), 인간의 대속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 선물로 받을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한다.

 

한편,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에스프라기센'(esphragisen; has ealed; has placed his seal of approval)'봉인하다', '인을 치다'를 의미하는 '스프랑기조'(sphrangizo)의 부정(不定) 과거 시제이므로 '인을 치셨다'로  번역해야 한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 '하탐'(hatham)을 번역할 때 이 동사를 사용했는데, 구약 시대에 인장을 찍는 것, 곧 인을 치는 것왕의 교서(다니6,17.18), 토지 구매 문서(예레32,10),(이사29,11), 그밖의 문서들(느헤10,1)을 법적으로 유효하게 했다.

 

신약에서도 이 동사는 비준하거나 확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결코 낯선 말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근거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곧 하느님의 자기 계시임을 염두에 두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35)

 

'내가 ~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은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이다.

 

이러한 문구의 자기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하여 쓰인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생명의 빵'으로 나타내신다. 이 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지금 유다인들은 전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먹었던 육체적인 굶주림을 만족시킬 만한 '빵과 물고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제시한다.

 

그들이 찾는 물질적인 빵은 일시적으로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는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

반면에 '생명의 빵'이라고 스스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생명의 빵'에 해당하는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ho artos tes zoes; the bread of life) 라는 표현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이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요한1,4; 10,10).

 

이제 여기서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유일한 비결이 나오는데, 그것은 예수님께 오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나를 믿는 사람'같은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생명의 빵을 먹어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려면 예수님께로 와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율법의 짐에 짓눌린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다 나에게 오라'(마태11,2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 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기 위해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모이는 것과는 다르다.

 

'나에게 오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에르코메노스 프로스 에메'(ho archomenos pros eme; he who comes to me)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오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 '에르코메노스'(erchomenos)'에르코마이'(erchomai)현재 분사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대개의 경우 동작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낸다.

또한 '오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초대하시고 부르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복음을 들은 사람들,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가진 이들은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이제 선택과 결단은 그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약속이 주어졌는데,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라는 문장의 서두에 나오는 '우 메'(ou me)는 부정(否定)을 강화하여 '결코~아니'(never), '확실히~아니'(certainly not)라는 뜻이 된다.

 

또한 '배고프지'로 번역된 '페이나세'(peinase; will go hungry)'페이나오'(peinao)의 부정(不定) 과거 가정법으로서, '우 메'(ou me) 함께 미래의 사건을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역할을 한다.

 

'페이나오'(peinao)'주리다'(be hungry)는 뜻인데, 육신적 굶주림 뿐 아니라 강한 욕망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한다.

 

당신에게로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구원의 때에 관한 예언(이사49,10)의 성취와 관련되는데, 이 예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것이다.

 

한편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도 동사가 미래 시제로 쓰인 것 이외에는 문장 구조가 앞의 것과 같다.

 

즉 여기서도 '우 메'(ou me)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해서 목마르게 되는 일이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별히 '결코'로 번역된 '포포테'(popote; never; at any time)'아무 때든지', '한번도' 등을 뜻하며, 이것은 '영원히'라는 뜻 이상으로 '한순간도 빠짐없이' 라는 매우 강한 뜻을 지닌다.

 

또한 '목마르지' 해당하는 '딥세세이'(dipsesei; will be thirsty)'딥사오'(dipsao)의 미래시제이며, 이것은 육체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것은 물론, '애타게 바라다'는 뜻으로도 쓰였다(마태5,6).

 

예수님을 믿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이 참된 만족을 얻게 됨을 알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릴지라도,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한 채, 결국에는 허무와 절망, 불행과 좌절,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살아가게 된다.

 

반면에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은 설령 눈에 보이는 소유가 없을지라도, 참된 만족과 기쁨이 그안에 있게 된다.

 

 

 

영성체를 갈망하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날씨가 더운 날 한 수행자가 절의 큰 스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어느 곳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스님께서 말했습니다. “추울 때에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자신이 더위가 되십시오.”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더위도 추위도 없습니다. 쇠가 녹는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습니다. 더위에 지치지 않고 건강한 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이은 이야기입니다. 빵의 기적에 사람들은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 기적이 지닌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그 양식으로 성장하는 또 다른 생명,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 삶의 질을 높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빵으로 오천명을 먹여 살리는 육적인 생명이 있듯이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먹여서 살리는 참다운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열매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은총을 주시는 주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 주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 많은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 주님의 말씀과 손에 의해 치유를 받았던 이들은 오늘 여기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 새 생명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을 갈망하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리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육을 중심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이 빠지면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알맹이를 차지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숨, 얼이 우선 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 먹고 살수는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도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명8,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 한마디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내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주일미사참례를 하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기 일에 급급해서 주일을 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행, 휴가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궐하면서 휴가를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권을 가지느냐에 나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근본을 우선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겨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영생의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준비된 마음, 믿음으로 모셔야할 지를 알려 줍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닙니다. 웰빙식품을 먹으려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성체 한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좋은 음식을 찾는 만큼이라도 영성체를 갈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과 썩어 없어지지 않는 빵은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먼저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에 앞서 성체를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계심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성체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알고 성체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젊은이 알도 마르코치는 “어머니,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요? 성 필립보는 육체의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던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들아, 감실로부터 풍겨 나오는 천국의 향기를 어떻게 네가 느낄 수 있겠느냐?” 성체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각적인 만족은 서로 상치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5,17).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하는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세상의 것들이 달콤하게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앞세워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헛된 것에 매이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파리들이 지하실 바닥에 쏟아진 꿀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달콤한 나머지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먹다보니 발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서 도저히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죽어가면서 파리들이 말했습니다. “한 순간의 달콤함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구나!”

**파리들이 맛있는 음식물이 들어있는 항아리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스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 하는구나! 이제 곧 죽을 목숨이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오늘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하신 생명의 빵에 대한 설교를 듣습니다. 모세 법을 가르치는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이 구원을 얻는 ‘일’이 기도와 단식과 자선, 십계명 준수, 성전 예식과 깨끗한 정화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나와 있는 규정을 그대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바꾸어 “하느님의 일”, 곧 하느님 마음에 드는 유일한 길이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일이라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선물인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로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은총이고 선물이며, 동시에 주님의 계획과 거저 내어 주시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과 그에 따른 임무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면 되고, 목마른 이에게는 마실 것을 주면 해결됩니다. 그러나 군중처럼 빵을 먹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빵을 많게 하신 분을 보고 열광만 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또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물질적인 빵만을 원하는 군중에게 탁월한 계명을 전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다가오는 걱정과 불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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