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6주일(나해) 마르 9,38-43.45.47-48; ’18/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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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8-09-29 ㅣ No.3662

연중 제26주일(나해) 마르 9,38-43.45.47-48; ’18/09/30

교황의 사도직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2,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은 제4복음화의 사회적 차원2와 제5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입니다.

 

교황은 이 4장 후반부의 공동선과 사회 평화라는 제하에서, 기쁨과 사랑에 이어 평화의 열매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갈라 5,22 참조)에 대해 말합니다.

 

사회 평화는 사회의 일부가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여 얻은 화친이나 단순한 폭력의 부재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평화가 가난한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구슬리는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려는 구실로 쓰인다면 이는 거짓 평화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욱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의 국민은 지배 권력에 휘둘리는 군중으로서가 아니라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닌 국민으로서 활동하여 그들 삶의 사회적 차원을 드높입니다. 책임감 있는 시민 의식은 하나의 덕이고, 정치 생활에 대한 참여는 도덕적 의무입니다.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로 이러한 국민을 이룩하는 데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얻으려는 충만함과 벽과 같은 한계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하는데, 쉽고 빠르게 해결하려는 마음보다 성령을 기다리듯이 공간을 장악하기 보다 시간의 과정에 관심을 기울입시다.

 

갈등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갈등의 포로가 되어 방향을 잃기보다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새로운 전진의 연결 고리로 만들어 친교를 증진시켜 일치에 이르게 합시다.

 

천사 같은 순수주의, 상대주의의 독재,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반역사적 근본주의,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 등의 생각을 거부하고 실재에 집중합시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고,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더 큽니다. 우리의 모델은 모든 중심에서 똑같고 차이가 없는 구체(球體)가 아니라 고유성을 간직한 모든 부분의 집합인 다면체(多面體)입니다. 복음은 모든 이의 모든 순간까지 전체성이라는 고유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황은 평화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대화라는 제하에서, 국가와 문화와 학문을 포함한 사회와, 가톨릭 교회 이외의 다른 신앙인들과 나누는 대화에 대해 말합니다.

 

교회는 평화의 복음’(에페 6,15)을 선포하고, 이 보편선을 수호하는 모든 국가 권위와 국제 권위와 협력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국가와 또 사회와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개별 분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다양한 분야들과 함께 각 개인의 존엄성과 공동선에 대한 최선의 응답을 하는 계획들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성을 추구하고 신뢰하며,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은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인류 가족의 일치에 이바지합니다. 한 신앙의 뿌리인 유다교인들과 이슬람 형제들과의 대화와 진리와 사랑의 열린 자세로 양심에 충실한 비그리스도교 신자들과의 대화 그리고 진선미를 진심으로 추구하는 선한 이들과 대화하고 격려하고자 합니다.

 

 

교황은 제5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는 두려움 없이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열어젖히는 복음 선포자라고 선언합니다. 영으로 충만한 복음화란 성령께서 이끄시는 복음화입니다.

 

교황은 새로운 선교 열정의 동인이라는 제하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는 기도하며 일하는 복음선포자라고 말합니다. 투신과 활동에 그리스도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적인 공간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체 조배를 하고 기도 안에서 말씀과 만나고 주님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지 않으면, 우리의 활동은 쉽게 무의미해지고, 우리는 노고에 지치고 열정도 사그라지고 맙니다.

 

사랑의 요구와 부합하지 않는 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제시하려는 유혹, 강생의 함축된 의미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기도에 쏟는 시간이 선교 생활을 하지 않는 핑계거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복음화의 첫 번째 동인은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 그분께 구원받은 우리의 경험입니다.

 

선교사는 성령의 활동으로 개인과 민족들이 무의식적이나마 이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법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선교사의 열성은 자기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옵니다.

 

이 확신은 그리스도의 우정과 그분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개인적 체험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개인적 체험을 통한 확신이 없으면 열정적인 복음화를 꾸준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여야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기가 더 쉽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을 추구하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 자신의 적합성이나 이해관계나, 작은 한계나 소망을 떠나, 이해와 동기를 뛰어넘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복음을 전합니다.

 

선교는 바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며 또한 그분의 백성을 향한 열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우리를 당신 백성 한가운데로 이끌어주시어, 우리도 사회 속에 깊이 들어가 함께 삶을 나누고, 그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물심양면으로 필요한 것을 돕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함께 손잡고 새 세상을 건설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따금 우리는 주님의 상처들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유혹을 느끼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의 한 가운데에 들어가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희망의 이유를 제시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는 영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새로운 기쁨을 배웁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사도 20,35)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희망의 깊은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스며든 새 생명의 힘입니다.

 

어려움도 있습니다. 실패와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한 고통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적인 확실성, 곧 하느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활동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신비 감각이 필요합니다.

 

선교는 거래나 투자도 아니고 인도주의적 활동도 아니며, 광고에 따라 모인 관객의 수를 세는 공연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곳에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깁시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26) 또 우리가 복음화 임무를 맡고 다른 이들의 선익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전구기도를 바칩니다.

 

교황은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란 제하에서, 마리아께서는 성령과 함께 언제나 백성 한가운데에 계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시며 성령께서 오시도록 간청하셨고(사도 1,14 참조), 그리하여 성령 강림 날 선교의 폭발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복음화하는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복음화의 별입니다.

 

살아있는 복음의 어머니, 작은 이들을 위한 기쁨의 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로마 성 베드로 좌에서 201311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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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꽃꽂이

http://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71699&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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