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28주일]영원한 생명 (마르 10,17-30)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10-14 ㅣ No.129

 

 [연중 제28주일]영원한 생명 (마르 10,17-30)

 

지혜서의 저자는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진흙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지혜 7,7-11)
7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8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9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0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11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다고 한다. (히브 4,12-13)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하신다. (마르 10,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연중 제28주일 제2독서 (히브4,12-13)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2)

 

12절과 13절은 앞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구절이다. 저자는 1-11절에서 성도에게 남아있는 참 안식의 약속과 순종함으로써 안식처에 들어갈 것을 권면했는데, 이어지는 12절, 13절에서 바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흔히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느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문맥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된 오해이다. 여기서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꿰찔러 가르는 하느님의 말씀의 운동력과 통찰력은 결국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영적이며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서 저자는 이러한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여, 하느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는 그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불꽃같은 말씀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본서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살아 있고' 라고 번역된 '존'(zon)이라는 단어를 문두에 둠으로써 특별히 강조한다. '존''자오'(zao)의 현재 분사로서,지금 현재 살아 꿈틀대고 있는 듯한 영상 준다.

'자오'(zao)란 단어는 '생수'(요한4,10.11 ;7,38), '살아있는 말씀'(사도7,38), '살아있는 길'(히브10,20),'생생한 희망'(1베드1,3) 등과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졌거나, 또는 그것을 가져오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본서 저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든 말씀은 항상 살아있다는 표현을 사용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주어진 이상, 아무도 그것을 무시할 수가 없음을 주장한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말'에 대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생각과도 관련이 있다. 그들은 한 번 말을 하고 나면,말은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다. 말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그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여러 가지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인간의 말이 이와 같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예언자 이사야는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55,11)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본절이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의 근원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언제든지 그 말씀이 유효하게 작용한다.

하늘에서 내린 비는 반드시 땅을 적시게 되어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분의 뜻을 이루며, 분이 내린 사명은 의도하셨던 대로 완수되고 성취되게 되어 있다.

 

예컨대, 하느님은 어두움이 휘감고 있던 태초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고, 그 살아있는 말씀은 어두운 우주에 빛이 생겨나게 하였다.(창세1,1-3)

또한,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죽어 관속에 들어있던 나인성의 청년을 향해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는 말씀을 하셨고, 그 생명의 말씀은  그 죽은 청년에게 생명을 주어 일어나게 하였다.(루카7,11-18)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헛됨이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이라도, 그가 죽은 뒤에 그의 말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힘을 발휘할 때에만 그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하여 능력이 있고 유효하다. 그분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절대적 구속력을 가지며 피할 수 없는 의무를 부여한다. 

따라서 인류에게 성경이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이지만, 이를 업신여김은 죄가 되는 것이다.

 

'힘이 있으며' 로 번역된 '에네르게스'(energes)'활동적인', '힘있는', '효력있는' 등을 뜻하는 단어인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형성된 형용사 '에네르고스'(energos)와 동일 계열에 속한다. 오늘날 영어에서 '힘', '활동력'을 의미하는 '에너지'(energy)도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본서 저자는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철학적미여 물리학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활동적이고 힘이 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처럼 효과적이며 강력한 것은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단순한 언구 혹은  독서에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든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것이 운동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다소 다른 점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진 감동의 능력보다는 심판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를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놀라운 구원과 축복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저주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의 운동력은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제시되고 있다.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사제들은 희생 제물을 절단하기 위해서 좌우에 날선 검을 사용했다. 본서 저자는 유다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익숙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이 사용하는 쌍날칼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잘 베어지는 예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로 번역된 '토모테로스 휘페르'(tomoteros hyper)'~이상으로 더 잘 베어지는 ' 이란 뜻이다.

 

전치사 '휘페르'(hyper)는 본절처럼 목적격을 지배할 때에, '넘어서', '이상의' 란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토모테로스'(tomoteros)'날카로운', '잘 베어지는' 이란 뜻을 지닌  형용사 '토모스'(tomos)의 비교급이며, '더 잘 베어지는', '더 예리한' 이라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칼은 살을 벨 수는 있어도 마음과 심령을 베지 못한다. 육적 생명을 없앨 수는 있어도 영적 생명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의 칼은 육적 생명은 물론 영적 생명까지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본서 저자는 비교급 형용사를 사용하여 이런 사실을 지적하며, 불순종의 결과에 대한 독자들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꿰찔러' 라는 의미로 번역된 '디이크누메노스'(diiknumenos)는 '관통하다'를 뜻하는 동사 '디이크네오마이'(diikneomai)현재 분사이며, 현재 분사로 사용된 것은

그 관통함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또한 '가르고' 에 해당하는 '메리스무'(merismu)의 원형 '메리스모스'(merismos)

'분리'(separation)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나누기까지 계속해서 꿰뚫고 들어간다.

 

한편, 본절은 테살로니카 전서 5장 23절과 더불어 인간생명의 삼중구조(삼분설)의 근거로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다. 인간의 구조를 영과 혼, 몸으로 나누는 삼분설고대 희랍 및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독일, 영국 학자들이 심취한 학설이었다.

이에 대립되는 학설이 사람의 구조를 영과 육으로 보는 이분설로서,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라틴 교부들과 스콜라 시대의 정설이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인 학설이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구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의 동작을 깊이 관찰하시며, 아울러 가장 깊고 은밀한 생각까지도 예리하게 판단하여 불순종하는 자에게 어김없이 멸망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절에서 언급된 '혼' 과 '영' 은 인간에게 있어서 비가시적인 영적 요소로서 이어 나오는 가시적인 육적 요소를 나타내는 '관절'과 '골수' 란 단어에 대응시키기 위한 표현이다. 하느님께 대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은 인간의 육체만을 파괴시키는 데 그치는 이 세상의 징벌과는 달리, 영혼과 육체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심판이며, 완전한 종말론적 심판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의 속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가려냅니다' 로 번역된 '크리티코스'(kritikos)'구별하다', '판단하다', '판결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 '크리노'(krino)의 형용사형으로서  '구분할 수 있는', '판단할 수 있는' 이란 뜻이다.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속 생각과 속셈을 판단할 수 있음을 나타내어 쓰였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숨길 수 없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신다" (1역대28,9) 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생각'으로 번역된 '엔티메세온'(enthymeseon)의 원형 '엔티메시스'(enthymesis)'생각', '반성', '관념' 등을 뜻하나, 여기서는 주로 애정이나 감정의 활동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목할 것은 신약에서 이 말이 대부분의 경우, 나쁜 혹은 어리석은 생각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나온다는 사실이다.(마태9,4 ; 12,25 ; 사도17,29)

또한 사도행전 17장 29절을 제외하고는 본절처럼 인간이 스스로 간직하여 드러내지 않고자 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인식하고 드러내시는 감추어진 비밀스런 생각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런 인간의 비밀스런 생각들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또한 '속셈'(뜻)으로 번역된 '엔노이온'(ennoion)의 원형 '엔노이아'(ennoia)'생각', '지식', '통찰력' 등을 뜻하는 말로서, 앞에 나온 '엔티메시스' 와 달리 이성(理性)활동을 나타낸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개념'이라는 철학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생각' 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본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살펴지고 판별되는 대상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생각들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감정과 지성을 살펴서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감추고 은밀하게 위장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의 내면적 동기에 대해 예리하게 판단하여 정확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연중 제28주일 복음 (마르10,17-27)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부족한 것이 있다'에 해당하는 '휘스테레이'(hysterei; lack)'휘스테레오'(hystereo) 동사의 현재형이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계명을 다 지켜 왔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예수님께 자신있는 말투로 대답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계명들을 다 지켰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현재형 동사로 사용해서 지적한 것이다.

 

동사 '휘스테레오'(hystereo)는 생활 형편과 관련해서 '부족하다', '모자라다'뜻을 지니고 있다. 부자 청년은 물질적인 부족이 없었기에, 이 '부족'이라는 단어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생소한 단어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물질로는 풍요로와도 그것은 진정한 풍유로움이 아니며, 오히려 부족함이라는 사실을 그의 허점을 찔러 지적한 것이다.

 

마르코 복음 10장 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4~10계명만을 언급하셨다. 이 계명들은 모두 인간 사랑과 관련된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가야 할 수평적 사랑들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 내면적 순종에 따른 진실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부자 청년이 집착하고 있었던 물질과 관계된 표현을 사용해서, 그의 부족한 것이 내적 순종에서 비롯되는 진실된 사랑과 자기 희생임을 깨우치시는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여기서 '바늘귀'에 해당하는 '트뤼페마토스 라피도스'(trypematos raphidos; the eye of a needle)예루살렘 성(城)에서 주로 밤에 이용되던 속칭 '바늘귀문'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문은 입구가 너무 좁고 낮아서 낙타가 걸어서는 통과할 수 없으며, 짐을 지고 있을 때에는 더 그러했다.

따라서 낙타는 모든 짐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은 채 이 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워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두번째로 '낙타'에 해당하는 '카멜로스'(kamelos; a carmel)'밧줄'을 의미하는 '카밀론'(kamilon)으로 이해하는 입장인데, '밧줄'이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취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더 쉽다'에 해당하는 '유코포테론'(eukopoteron; easier)비교급인데, 이 비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솔로몬은 주님께 칭찬받는 임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하고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한 힘은 그가 받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에게, 재물보다 더 귀한 제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재물에 집착한 부자 청년은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셈법과 인간의 셈법이 다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판단은 인간의 욕심과 속임수를 드러내고 이 세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보여 줍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을 기만할 힘과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유한한 재물과 명예를 움켜쥔 인간의 시야는 너무나 좁고 어두워서 큰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지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나 지고한 빛에 조명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남을 돕고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사람의 시야를 넓혀 줍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월하는 세계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가치에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존귀함은 하느님 대전에서 비천하고 비참함으로 바뀝니다. 영혼의 눈멂을 일깨우는 천상의 빛이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을 얻은 영혼은 다른 어떠한 피조물도 그분을 대체할 수 없음을 압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왕홀과 재물은 허공에 사라져 없어지는 연기임을 깨닫게 됩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3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