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연중 제5주일]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11)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2-10 ㅣ No.146

 

 

[연중 제5주일]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11)

 

제1독서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시자,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아뢴다 (이사 6,1-2ㄱ.3-8)
1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2 그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 있었다.
3 그리고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4 그 외치는 소리에 문지방 바닥이 뒤흔들리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찼다.
5 나는 말하였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7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8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내가 아뢰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제2독서바오로 사도는, 그가 이미 전한 복음을 상기시킨다 (1코린 15,1-11)
1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2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3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4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5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6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7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1 그리하여 나나 그들이나, 우리 모두 이렇게 선포하고 있으며  여러분도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고 이르신다. (루카 5,1-11)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연중 제5주일 제1독서 (이사6,1-2ㄱ.3-8)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1~2)


앞선 이사야서 1장 2절~5장 30절은 주님을 배반한 남부 유다를 향하여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란 사실과 더불어 주님의 날에 있을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가 주님의 오심과 성전 숯불의 환시를 통하여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구약의 거의 모든 예언서에는 그 예언서를 쓴 예언자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술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예언서의 초두에 이런 사실이 소개되는데 (예레1,1~19; 에1,1~3.15), 이에 반해 이사야 예언서에는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이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이며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시급한 사안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로 미뤄졌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이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입은 하느님의 종이며, 그의 메시지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독자들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로도 볼 수 있다.


먼저 이사야서 6장 1~3절은 이사야에게 예언자로서 소명을 주신 주님의 장엄한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가 성전 위에 높이 들리고 사람들이 에워싼 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시점을 밝히는 본문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이 일은 남부 유다의 제10대 임금이었던 우찌야가 죽던 해 발생하였다. 그 해는 B.C.739년으로 추정된다.

우찌야 즉 '우찌야후'(uzziyahu) '능력'(1역대16,11),'힘'(탈출15,2)이란 의미의 명사 '오즈'(oz) '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 '주님의 능력'이란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그는 '아자르야'(2열왕15,1)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돕다'(여호1,14)란 뜻의 동사 '아자르'(azar) '야훼'의 축약형 '야흐'(yah)가 결합된 형태로서 '주님께서 도우셨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부친 아마츠야에 이어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남부 유다의 왕위에 올라 죽는 날까지 무려 52년 동안 남부 유다 왕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통치 후기에 문둥병이 들어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삶을 살다가 병으로 죽게 된다.


그의 통치 전반과 중반 주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필리스티아와 암몬 등을 정복하고, 필리스티아 땅에 성(城)을 건축하고 암몬 왕으로부터 조공을 받고, 나아가 이집트의 변방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는 등 그 왕국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그가 강성해지면서 교만에 빠지게 되어 사제 외에는 들어가지 못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려 하였다.


그것이 죄라고 말리는 아자르야 사제의 손을 뿌리치면서까지 분향하기를 고집하는 순간, 주님께서 그를 치셔서 그 이마에 문둥병(나병)이 생기게 하셨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는 왕궁이 아닌 별궁으로 내려 앉고, 나아가 성전 출입을 제한당하였다.

그런 비참한 말년을 쓸쓸히 보내다가 그의 나이 67세에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2열왕15,1~7; 2역대26,1~23).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받은 소명은 그가 예언자 직분을 시작하면서 받은 소명이 아니라 예언자 직분을 수행하던 중간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소명임이 분명하다.

즉 본장에 나오는 소명과 별개로 이사야는 과거에 하느님으로부터 예언자로 소명을 받은 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굳이 이를 따로 소개하지 않는 것은 본장의 내용만으로도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예언자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은 1인칭 단수를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 주님의 환시를 보았다는 증거를 많이 한다.

아합과 여호사팟 임금 당시의 예언자 미카야가 그랬고(1열왕22,17.19-23), 즈카르야 예언자(즈카1,8), 에제키엘 예언자, 예레미야 예언자 등이 그러했다.

이와 같은 1인칭 단수의 사용 그들 각자가 보았다고 하는  환시의 신빙성의 무게 더해준다. 제3자의 경험이 아닌, 자기 자신의 경험을 직접 기술한 것이기 떄문이다.

 

한편, 본문에서 '나는 보았는데' 해당하는 '와에르에'(waereh)는 계속적 용법으로 사용된 '와우'(wau)에 동사 '라아'(rah)의 미완료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이것은 우찌야 임금이 죽은 직후에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사실 및 그 때에 일회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사야서 1장 1절에는 이사야가 환시를 보았다는 것이 '하자'(haza) 동사를 통해 표현된 반면에, 후자 실제적으로 실체를 매우 확실하고 분명하게 바라봄으로써 실제적으로 이를 체험하여 아는 것과 관련된 표현인 것이다.

즉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본장에서 경험한 주 하느님의 천상의 모습과 그에 바탕을 둔 그 자신의 죄의 용서에 관한 환시 그에게 있어 현실적인 일처럼 분명히 나타났음을 강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이사야 예언자가 본 환시는 어좌에 앉아 계시는 주 하느님이었다. 이같은 장면은 아합 임금 당시 예언자로 활약한 미카야의 증언에도 나오며 (1열왕22,17.19~23), 욥기에서도 유사한 묘사가 나온다(욥기1,6~12).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물리적인 육체가 없으신 순수한 영이시기에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에게 계시를 주시며, 이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하여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시각적 형상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한편, 본문에서 주어로 제시되는 '주님'에 해당하는 '아도나이'(adonai)는 주 하느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인간 세상 뿐 아니라 온 우주를 권능으로 주관하시는 주님의 면모를 강조할 때 사용되는 호칭이 바로 '아도나이'인 것이다.

그는 높이 솟아오른 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그 어떠한 세력도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이 세상을 통치하심을 나타낸다.


특히 '앉아 계시는' 해당하는 '요셰브'(yosheb) 오래 동안 머물러 있거나 거주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 '야샤브'(yashab)의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주님의 왕적 통치가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통치는 인생사의 영고성쇠와 관계없이 계속되어 왔고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영원한 임금되심과 항구적인 통치의 면모는 과거에 위대한 임금으로 통치하다가 범죄로 징계를 당해 비참한 신세에 떨어지고, 결국 죽어 무덤에 돌아간 인간 임금 우찌야의 면모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분의 옷자락' 해당하는 '슐라이우'(shulayu)의 원형 '슐'(shul)은 길게 늘어뜨린 옷자락을 의미하는데,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좌우 손목 부분의 옷자락을 비롯하여 발을 덮어 가리는 옷자락까지 모든 부문의 자락이 길게 늘어뜨러져 성전을 가득 덮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주 하느님의 위엄과 권능이 온 세상을 덮고 있음 의미한다. 이러한 주님의 권능 앞에 모든 피조물은 굴복하고 꿇어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성전' 해당하는 '하헤칼'(hahekal)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지금 이사야가 보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시이며 천상의 상황이기 떄문에 이 문맥에서는 천상에 있는 주님의 궁전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성전과 관련지어 이사야가 성전에 있었으며, 성전에 가득한 주님의 옷자락은 분향 제단으로부터 올라간 연기가 성소 안을 가득 채운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설한다.

그러나 그가 현재 성전에 있든 그렇지 않든, 그가 환시 중에 목도한 것은 성전 그 자체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영광 중에 거하시는 천상의 거소로 보는 것이 문맥상 보다 적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분 위로는 사랍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 (2)


이사야서 6장 2절과 3절은 하늘의 사자들이 주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사랍들'에 해당하는 '세라핌'(seraphim) '불타다'(예레51,3)란 뜻의 동사 '사라프'(saraph)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 '불탐'이란 의미를 지닌 '사라프'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세라핌' 문자적으로 '불타는 것들'이란 뜻을 지닌다.

천사들에 대하여 이러한 명칭이 주어진 것은 부정한 것을 불로 태워 없애는 것처럼 그들이 거룩하고 순결한 존재이며, 또한 불꽃처럼 화려하고 접근할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사랑을 상징한다.

 

 

 

 

연중 제5주일 제2독서 (1코린15,1-11)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2)

 

사도 바오로는 1-11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적 확실성을 다룬다.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며, 신도들의 부활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1절에서 '내가 이미 전한 복음' 이, 3-4절에서 '돌아가심(죽으심), 묻히심(장사지낸 바 되심), 부활하심(되살아나심)' 으로 요약되어 나타나고, 이어지는 5-8절에서는 그 가운데 특히 부활에 대한 무수한 증인이 있음을 말함으로써, 본 단락에서 다룰 복음의 핵심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글 성경에는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2) 라는 어구가 문장의 말미에 나타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이에 해당하는 '디 후 카이 소제스테'(di hu kai sozeste)가 문장의 서두에 등장한다. 이것은 본절이 '내가 전한 이 복음 말씀' (2) 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본절에서 '디 후'(di hu ; by this gospel)는, 같은 절의 '티니 로고 유엥켈리사멘 휘민'(tini logo euenggelisamen hymin ; the word I preched to you;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 말씀)과 관련된 것으로, 바로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전한 복음이며,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특히 여기서 '여러분은 구원을 받습니다' 로 번역된 '소제스테'(sozeste)는 '구원하다' 라는 뜻을 지닌 '소조'(sozo)의 현재형으로, 구원이 지금 현재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코린토 신도들이 지금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1코린1,18 ; 로마1,16) 구원의 완성은 비록 미래에 온전히 이루어질지라도,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 나시어"(3-4)

 

여기서 '먼저'라고 번역된 '엔 프로토이스'(en protois)는 시간적인 면이나 내용적인 면에서의 우선성을 뜻하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바오로의 선교 여정에서 시간적인 순서로 코린토 교회가 바오로의 복음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내용적으로 가장 우선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 전한 복음의 내용 중 가장 우선하는 것은, 3-4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셨다' 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바오로는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주체를 '예수'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을까?  그것은 역사적인 예수와 구원자 그리스도가 동일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선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 출신의 일개 목수의 아들로서 역사적으로 실재한 한 개인의 이름이다.

 

그러나 복음서와 바오로는 초지일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란점을 강조한다. 말하자면 역사상 예수라는 이름으로 실재하였던 바로 그분이 다름아닌 메시아 그리스도, 곧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사도들의 선포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사도2,36)는 선포가 아닌가!

복음 선포의 핵심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데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가 믿음의 그리스도요, 생명의 주님이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때문에 돌아가시고"

 

바오로는 예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신 대속적 죽음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죽음이 예수님 자신의 결정이나 돌발적 사고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님을 '성경 말씀대로' 표현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서 '성경'에 해당하는 '그라파스'(graphas)는 복수형으로 '성경을'로 번역될 수 있다. 즉 예수의 죽으심은 구약 성경 곳곳에서 예언된 사건이었다. 실제로 구원사의 핵심인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은 구약 성경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세22장 ;탈출12장 ;시편22장 ;이사야53장 ;다니엘9,26 등등)

 

또한 여기서 '죽으시고' 로 번역된 '아페다넨'(apethanen ; died)역시 '죽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트네스코'(apothnesk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일회적인 역사적인 사건이었음을 가리킨다.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4)

 

바오로는 3절과 4절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을 밝히고 있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다시 살아나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핵심 단어인 '묻히셨으며' 와 '되살아나시어' 란 두동사는 모두 3인칭 단수 수동태로 쓰였으나, 그 시제가 다르다.

 

먼저 '묻히셨으며' 에 해당하는 '에타페'(etaphe ; he was buried)는 부정(不定 ;indefinite)과거형이다. 여기서 이 시제는 육화(肉化 ; Incarnation ;강생)하심으로 시작된 자기 비하(卑下)의 단계가 드디어 묻히심의 단계까지 이르렀음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최고조의 부정 과거 (Culminative Indefinite Past)이다.

 

반면에 '되살아나시어' 에 해당하는 '에게게르타이'(egegertai)는 완료형이다. 예수의 부활이 과거 사실(he rose again ; he was raised)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와 다르게 완료형을 사용한 것은, 예수의 부활이 단순히 지나간 역사적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효력이 계속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살아계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 쓰였다. 우선, 예수의 부활을 말하는 후자는 하느님께서 예수를 친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전자는 예수께서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등에 의해 장사되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마태27,57-61)

그러나 이것 역시 사도 바오로는, 구속 계획을 세우신 성부 하느님께 순종하며 장사지내는 자리에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수동태를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단락에서 바오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 단지 죽으시고 묻히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챤(신도)간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인고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한 신도 역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장차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흗날에'(te hemera te trite ; 테 헤메라 테 트리테 ; on the third day)라고 바오로가 굳이 표현한 이유가 뭘까? 바오로가 죽음에서 부활까지 걸린 기간을 명기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 가운데 실재로 일어난 틀림없는 사실이란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동시에, 안식일 전날 금요일에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사흘이 지난,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 즉 주일(主日 ; The Lord Day)에 부활하심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초대 교회 당시, 주일에 드리는 공식 예배와 성찬의 정당성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부활 사건은 그의 죽음심과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대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시편 16장 10절이나 이사야 54장 7절의 말씀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그의 죽으심의 사건과 동일하게, 코린토 교인들로 하여금 신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란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 다음 15장 5절부터 8절까지, 바오로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역사적 확실성을 논증하는 가운데,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수많은 증인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케파 베드로와 열 두 사도, 그 다음에는 오백명이 넘는 형제들, 그 다음에는 야고보,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났다고 전한다.

 

여기서 7절 '모든 사도'란 표현은, 열 두 사도에 나오는 장 야고보(대 야고보; 축일은 7월 25일)와 소 야고보(차 야고보 ;축일은 5월 3일)와 같은 사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을 목격하고 복음 선포자가 된 사람들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바오로를 돕던 협력자들까지도 때로는 사도들로 언급되어, 초대 교회 당시 사도라는 용어가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맨 마지막으로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8)

 

'맨 마지막으로'(last of all)라는 표현은 '가장 하찮은 존재'라는 겸손의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도들에 비하면 매우 보잘것 없다는 의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칠삭둥이 같은 나'(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로 번역된 '엑트로마타'(ektromati)'~로부터 밖으로' 란 뜻이 있는 전치사 '에크'(ek)와 '상하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는 동사 '티트로스코'(titrosk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산되어 태어난 '사산아'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조산아'를 의미한다고 본다.

 

이것은 바오로의 외모가 보잘것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이거나, 만삭되지 못하여 갑자기 태어난 아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바오로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이것이 갑작스런 회심을 가리킨다면, 이는 그가 사도가 되기 전, 조직적으로 교회를 핍박했던 죄인이었음을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칠삭둥이 같은 나'라는 뜻의 '엑트로마티' 앞에 정관사 '토'(to)가 붙은 것에 대하여 여러 설이 있다.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엑트로마티'는 주로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민수12,12 ;욥기3,16)

따라서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본문은 바오로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여, 예수의 지상 선교의 시기인 공생활 동안 줄곧 함께 한 열두 사도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후에 사도가 된 사실을 피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의 열 두 사도가 만삭이 되어서 난 아이와 같다고 한다면, 자신은 달 수를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오로가 정관사 '토'를 붙여서 자신을 '그 칠삭둥이 같은 나'라고  한 말 뒤에는, 그가 사도들 가운데 제일 뒤에 처져서 출발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사도들 중에 유독 그만의 특별히 구별되는 방법으로 부름받음 것을 드러낸다.

 

 

 연중 제5주일 복음 (루카5,1-11)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스승님'에 해당하는 '에피스타타'(epistata; master)는 신약 성경에서 루카 복음사가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이다(루카8,24.45; 9,33.49; 17,13).

 

루카 복음사가는 일반적으로 '선생'(teacher)에 대한 묘사로서 사용되는 '디다스칼로스'(didaskalos)나 율법 교사에 대한 존칭어인 '랍비'(rabbi)라는 단어보다는 '에피스타타'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에피스타타'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17장 13절의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제자들의 입으로 고백된 경우처럼, 이 용어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개인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권위를 느껴서 예수님을 '에피스타타'로 불렀다.

그러나 이 호칭은 기적의 체험 후에는 신앙 고백적 호칭인 '퀴리에'(kyrie) 즉 '주님'(Lord)으로 바뀐다(루카5,8).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구절은 베드로의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로 번역된 접속사 '데'(de)는 여기서 'but' 혹은 'nevertheless'의 의미를 지닌다.

말하자면, 전문 어부로서 고기잡이와 관련된 갈릴래아 호수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전날 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해보았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또 날이 밝은 아침(오전)에 고기가 없는 깊은 데로 저어 가서 그물을 내린다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가 베드로에게 있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폭적인 순종의 의지'제가 ~내리겠습니다'로 번역된 '칼라소'(chalaso;

I will let down)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단어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서 자신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데, 마지 못해서나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말씀대로'에 해당하는 '에피~토 레마티 수'(epi ~ to remati su; at your word; because you say so)'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서 '스승님의 말씀'루카 복음 5장 4절의 명령 뿐만 아니라 루카 복음 5장 3절기록된 '가르침의 말씀'까지 다 포함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배 위에서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고 진실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했다보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데로 저어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베드로는 그 명령이 비상식적으로 들렸으나 즉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nevertheless; in spite of)의 믿음과 그 믿음은 바로 주님의 가르침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기에 능동적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믿음은 평소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의 성품과 덕성을 체험하지 않고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듣고,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세 명의 제자,

곧 시몬 베드로, 그리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세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의 가장 중요한 때에 예수님과 함께하였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뒤에 초대 교회에서도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제자들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이면서 교회 공동체의 부르심과 소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신 다음,

시몬에게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깊은 물은 언제고 위험합니다.

갑자기 풍랑이 일 수도 있고,

사고가 났을 때 멀쩡히 돌아올 수 있는 확률도 높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을 낚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복음을 선포하고자 위험을 무릅쓸 각오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아침나절에는 고기를 잡을 가능성이 없고

밤에 그물질을 해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내리라 하셨고,

그 결과 배 두 척이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복음 선포를 비롯한 하느님의 일은,

사람이 쌓아 온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에 놀라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은,

분열될 수 없는 교회의 특성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찢어져서 여러 개로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본디 하나로서 다양성 안에서 언제나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개별적인 부르심이면서 하나의 공통된 응답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