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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하느님 나라 (루카 9,5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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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06-30 ㅣ No.167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하느님 나라 (루카 9,51-62)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우라고 하신다. (열상 19,16ㄴ.19-21)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9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바오로 사도는,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말라고 한다. (갈라 5,1.13-18)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다. (루카 9,51-62)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연중 제13주일 제1독서 (1열왕19,16ㄴ.19-21)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19)

 

아합의 처 이제벨을 피하여 무기력하게 숨어 있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세 가지 사명을 부여해 주신다(1열왕19,9-18 ;19,15-16). 그리고 오늘 독서 열왕기 상권 19장 19-21절에서는 엘리야가 세 가지 사명 가운데 엘리사를 제자로 부르는 일을 수행한 사실을 보도한다.

 

엘리야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즉시 호렙산을 떠나 엘리사를 만나러 갔다. 열왕기 상권 17장 19절에 나오는 "엘리야는 ~ 떠나" 에 해당하는 '와이예레크'(waiellek)'만났다'에 해당하는 '와이므차'(waimtsa)에 모두 행동이 즉시 이어짐을 보여주는 '와우'(wau) 계속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새로이 사명을 부여받은 후, 다시 이전과 같이 하느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열두 쌍의 소를 겨리를 지워 밭을 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겨릿소를'에 해당하는 '체마딤'(tsemadim ;yoke of oxen)기본적으로 '두 개를 하나로 묶은 한 쌍'(이사21,7)을 의미하는 '체메르'(tsemer)의 복수형으로, 여기서는 한 멍에를 나란히 멘 한 쌍의 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열 두 겨릿소'는 곧 24마리의 소를 말한다.

그런데 당시 24마리의 소를 이끌고 밭을 갈았다는 것은 엘리사가 상당한 부잣집 자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에게'로 번역된 '엘라이우'(ellaiu)'~에게', '~곁에'라는 뜻의 전치사 '엘'(el)3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개신교 성경은 '그의 위에'로 번역하여 마치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엘리사의 몸이나 머리 위로 던진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겉옷'이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진 것이었다.

 

따라서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행위는 자신의 뒤를 이어 예언자 직무를 대신하고 계승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사도 엘리야의 행동에 담겨진 그런 의미를 제대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엘리사 역시 그러한 엘리야의 행동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1열왕19,20.21절).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복음 (루카9,51-62)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4)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걸어야 할 인생의 여정의 알고 계셨고, 그 계획을 따를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계속해서 당신을 시험하고 비난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루카5,21.30; 6,2.7.11)에 의해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으신다는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계획을 따를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루카 복음9장 51절'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그 얼굴을 고정시켰다'가 된다.

'그는 ~그 얼굴을'에 해당하는 '아우토스 토 프로소폰'(autos to prosopon; he - his face)은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쪽을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또한 '마음을 굳히셨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스테리센'(esterisen;  resolutely set; stedfastly set)의 원형 '스테리조'(sterizo)어떤 사물을 흔들리지 않도록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며, 비유적으로는 마음을 변치 않도록 확고히 하는 것을 가리킨다(루카22,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남겨진 길을 위해, 비록 그 길이 당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좌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지 않았다. 오로지 당신이 가야 할 길에 꽂혀 있는 표지를 향해 얼굴을 고정시켜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당신의 걸음을 어느 누구도, 어떤 세력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것은 십자가 이후에 당신에게 이루어질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히브12,2).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이제 유다 지방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신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요르단강 동편으로 상당히 우회해야 하므로 적어도 며칠을 더 걸어야 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한 마을에 숙박하기 위해 제자들 중 몇을 심부름꾼으로 보내셨다.

 

사마리아인들은 B.C.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북부 이스라엘과 아시리아 사이에 생긴 혼혈족인데, 그들의 기원은 열왕기 하권 17장 24~41절에 나온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느헤미야와 즈루빠벨이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도 동참하고 싶어했지만, 종교적 순수성을 내세운 유대인들은 그들의 도움을 냉정하게 거절하여 그때부터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경원시하게 되었다.

 

유대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마리아인들은 독자적으로 주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가리짐산 위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했다(요한4,20).

그러나 그 성전마저도 마카베오 시대때 요한 힐카누스(J. Hyrcanus)가 파괴함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반목은 더해 갔다.

 

루카 복음 9장 53절'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나온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그 일행을 갈릴래아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종교 순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던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 피해 의식이 큰 사람들이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들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갈릴래아의 유대인들을 싫어했으며 통과시키지도 않았다.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그들은 심지어 자기 지역을 통과하기를 원하는 여행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은 주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옛날 능력의 예언자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1열왕18장)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서 원수들을 멸망시킬 것을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신 것(마르3,17)도  이러한 충동적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불과 얼마 전에 타볼산에서 엘리야를 본 적이 있는(루카9,28~36) 야고보와 요한은 과거 아합 시대에 바알 예언자들과 카르멜 산에서 싸우던 엘리야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말속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고자 하는 그들의 충성심이 담겨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원수를 심판하는, 그것도 불로 무자비하게 태워버리는 것만이 그들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속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마태5,43.44),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명백히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12,47).

주님께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결여된 지나친 충성은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행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과거의 애착을 버리고 먼저 자비와 용서를 행함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십니다.”(9,51) 예수님의 인간 구원을 향한 순례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시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시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이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들르려 했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냉대합니다. 죽음을 통한 생명의 길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9,54).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9,55). 

예수님은 역사적, 종교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하거나 비난하시지 않고 온정을 베푸셨습니다. 오히려 적대 감정을 지니고 그들을 없애버리려 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치유와 해방을 위해 죽기까지 자신 전부를 바치신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9,58)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현세 재물이나 권력,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상기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공동체의 삶을 보면 ‘장’(長) 자리에 연연하고 직무를 마치고도 ‘장’이란 호칭을 듣기 좋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장'이 가장 많은 곳이 교회인 듯합니다. 또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권력이나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의 힘에 기대려 합니다. 허세도 없고 진실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먼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9,59)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9,60) 하십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따르겠다(9,61)는 이에게는“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9,62)고 하십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명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할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모르는 죽음의 세계, 인간적인 인연, 자신의 과거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세속에 죽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 살아야겠지요. 우리의 부르심은 오직 세상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조건 없이 그리고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며 철저히 주님을 따르는 삶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절대적이며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 길입니다. 오늘도 나의 일, 현세의 가치를 추구하는 몸짓을 멈추어 하느님께 눈길을 돌리고, 과거의 애착을 끊어버리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사랑과 정의의 길을 먼저 추구하는 행복한 날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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