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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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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03-02-12 ㅣ No.77

 

 

신약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해제

 

 

-박상래,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7 고린토서, 분도출판사, 1993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 고린토

사도 바오로가 기원후 51년경 방문하였을 때의 고린토는 율리우스 체사르에 의해 기원전 44년에 로마의 "식민 도시"(공식 명칭은 Colonia Laus Julia Corinthiensis였은데 이 명칭에도 체사르의 이름 "율리우스"가 기억되어 있음)로 재건되어 로마 제국 속주의 하나인 "아카이아"(사도 18,12.27; 19,21; 로마 15,26; 1고린 16,15; 2고린 1,1; 9,2; 11,10; 1데살 1,7-8)의 수도로서 다시 한창 번창하고 있던 도시였다. 고린토는 그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미 고전 그리스 시대부터 상업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지만 기원전 146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점령될 때 초토화되다시피 파괴되어 그 후 약100년간 폐허로 버려져 있었다. 사도 바오로가 활동할 당시의 고린토는 이렇게 근 100년 동안이나 폐허 상태로 있다가 로마인들에 의해 "로마의 식민 도시"로 재건되어 발전하던 도시였으므로 여러 가지 면에서 로마적인 요소가 많았던 그리스 도시였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지정학적 위치 : 고린토는 이스토모스(Isthmos)라는 지협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폭이 5,950 미터밖에 안되는 이스트모스 지협은 남북으로는 육로로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이어 주는 교량 역할을 하였고 양쪽에는 항구가 있어서 동쪽으로는 겐크레아라는 항구를 통하여 에게 해를 거쳐 소아시아로 향하기가 쉬웠고, 서쪽으로는 레카이온이라는 항구가 있어서 아드리아 해를 거쳐 로마 제국의 본토로 향할 수 있었다. 고린토는 바로 이 지협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고린토는 바오로 당대에 국제적인 상업 중심지로서 여러 인종, 여러 종교의 사람들이 오가며 교류하고 있었다. 고린토의 이러한 다종교적ㆍ다민족적ㆍ개방적 분위기는 한편으로는 바오로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용이하게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생 그리스도 공동체가 그 신앙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것을 어렵게도 했다. 고린토 안에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은 문헌적으로(사도 18,4; 필로, LegGai 281)뿐만 아니라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2. 고린토 전서를 쓸 당시의 바오로와 고린토의 그리스도 공동체의 관계(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

1) 바오로에 의한 고린토 그리스도 공동체의 창립 : "나는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1고린 3,6);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시는 교사들은 만 명이 될지 몰라도 아버지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실상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낳았습니다"(1고린 4,15). 고린토는 에페소와 함께 바오로의 선교활동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거점)이었다. 바오로는 인적ㆍ물적ㆍ문화적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던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인 이 도시에 이른바 그의 2차 선교여행 때 그리스도 공동체를 세우고 거기서 기원후 50년부터 51년 사이에 1차로 활동하였다. 그는 필립비와 데살로니카에서 복음을 전하며 공동체를 세웠으나 일부 사람들의 거친 반대 때문에 그곳들을 황급히 떠나야만 했다. 그 다음 아테네에 내려와 선교하던 바오로는 그의 젊은 동료인 디모테오를 박해중에 급히 떠나왔던 공동체의 사정을 알아보도록 데살로니카로 파견하고 자신은 고린토로 왔었다. 그곳에서 바오로는 디모테오로부터 데살로니카 공동체가 돈독한 믿음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 데살로니카 전서를 써 보냈다(1데살 3,1 이하).

  그 후 바오로는 거기에 머물면서 복음선포에 열중한다(1고린 2,3-5). 바오로는 그곳에서 그가 그곳에 도착하기 얼마 전에 로마에서 추방당하여(글라우디오 칙령 참조) 와 있던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신자 부부인 아퀼라와 브리스킬라의 집에 머물면서 몸소 일도 하였는데(사도 18,2-3), 실바노와 디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돌아온 후에는 전적으로 복음선포에 열중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경신자"였던 디디오 유스도의 집에서 머물렀다(사도 18,1-8 참조). 아카이아 지방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스데파나와 그의 집안 사람들(1고린 16,15)과 그리스보와 가이오였다(1고린 1,14 이하). 바오로는 18개월 동안 고린토에서 활동한 후(사도 18,11)유대인들의 고발로 말미암아 아카이아의 총독이었던 갈리오의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그 후 고린토를 떠나 체사레아(가이사리아)와 예루살렘을 거쳐 처음 선교여행을 떠났던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사도 18,11-18.22).

  2) 바오로가 고린토를 떠난 후에 고린토에서는 다른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1고린 3,6). 특히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헬레니즘적 교육을 받았으며 언변이 좋았던 유대인 아폴로가 한동안 활동하였다(사도 18,24-28; 19,1; 1고린 1,12; 3,4-6.22). 그런데 공동체에 이 복음선포자들을 둘러싸고 파당 형성의 위험이 생겨났다(1고린 1,10-17).

  3) 고린토 전서를 쓰기 전에 이미 바오로는 음행하는 사람들과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경고하기 위하여 고린토 교회에 이미 편지를 쓴 일이 있다("전 편지": 1교린 5,9 참조).

  4) 4,17과 16,10을 함께 보면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 집필 당시에 디모테오를 고린토에 파견해 놓고 있는 상태이고 자신도 방문을 계획중이다.

  5) 16,12를 보면 바오로가 고린토를 떠난 뒤 고린토에서 복음선포 활동을 하던 아폴로는 에폐소에 와 있었다.

 

3. 고린토 공동체의 구성원들

고린토 공동체의 구성원에 관하여는 바오로의 편지의 수신 교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사도 18장; 1고린 16장; 로마 16장에 모두 16명의 고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소스테네(1고린 1,1); 클로에 집안 사람들(1고린 1,11); 그리스보(1고린 1,14); 가이오(1고린 1,14); 스데파나(1고린 1,16; 16,15.17);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1고린 16,17); 페베(로마 16,1); 루기오, 야손, 소시바드로(로마 16,21); 데르디오(바오로의 로마서의 대필자: 편지 끝에 직접 인사를 하고 있다. 로마 16,22); 에라스도(로마16,23);과르도(로마 16,23);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브리스카) 부부(사도 18,2.18.26; 로마 16,3; 1고린 16,19); 디디오 유스도(사도 18,7).

  위에 언급된 대부분의 이름은 로마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로마인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 적어도 셋은 비록 그 이름은 로마식이지만 유대인이다(아퀼라, 브리스카, 그리스보〔회당장〕). 이퀼라와 브리스카 부부(사도 18,2 이하; 로마 16,3; 1고린 16,19)는 글라우디오 칙령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고린토와 에페소에 와 있으면서도 자기 집에 선교사를 모셔 들였으며, 그들의 집은 가정교회 역할을 하였다. 한편, 로마식 이름을 가진 포르두나도, 과르도, 가이오, 디디오 유스도는 로마인이었는데, 바오로는 고린토에 있던 가이오(1고린 1,14와 로마 16,23 두 곳)의 집에서 로마서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사도 18,7에 의하면 바오로는 회당에서 격한 반대를 받은 다음부터 디디오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스데파나, 아카이고와 에라스도는 그리스인이었다. 스데파나의 집(안)에 관하여 고린토 전서에 두 번씩이나(1,16; 16,15) 언급되고 있는데 그녀의 집이 일종의 가정교회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고, 에라스도는 시 관리(로마 16,23)였다. 그런데 1고린 1,26에 의하면 그들(고린토의 그리스도 신자들)중에는 사회ㆍ경제적으로 상류층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사실, 1고린 7,20-24를 보면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노예들이었다. 1고린 1,16에 언급되고 있는 "스데파나 집안"이라는 말에서 "집"은 스데파나의 가족들만이 아니라 그 집에 있던 모든 사람(노예들까지도 포함하여)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페베(로마 16,1)는 그리스식 여성 이름이다. 페베는 직접 고린토 시 출신의 사람은 아니지만 바로 인접한 겐크레아 항구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로부터 매우 신망을 받던 여성이었던 것 같다. 로마 16,1-2에서 바오로는 그녀를 명시적으로 "추천"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사도 자신도 많은 신세를 졌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녀는 아마 로마서를 로마 교우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 같다.

  비록 공동체 안에 유대인들이 좀 있기는 있었지만 1고린 12,2〔"여러분이(아직) 이방인으로 있었을 때,…"〕를 보면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이었다. 8장과 10장에서 문제되고 있는 신전 축제에 참가하는 일은 전적으로 이방인적인 현상이다. 고린토 공동체의 많은 신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된 후에도 이방인 시절의 관습에 따라 행동하였던 것 같다.

 

4. 고린토 전서의 집필 동기

집필 동기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고린토 교우들이 보낸 서신 질의이고 다른 하나는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구두로 전해들은 공동체에 관한 염려스러운 소식들이다.

1) 서신 질의: 고린토 공동체의 신도들이 몇 가지 특정 문제들을 놓고 바오로에게 서신 질의를 해 왔다〔"여러분이 적어 (보낸) 것들에 관하여…" 7,1; 그리고 "…에 관하여": 7,25; 8,1; 12,1; 16,1.12〕.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에서 이 서신 질의에 서신으로 답장을 하고 있다.

2) 구두로 전해 들은 소식: 바오로는 "클로에"의 사람들로부터 구두로 "파벌 형성"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여러분에 관하여 클로에의 사람들이 내게 전한 바에 의하면…": 1,11). 그리고 고린토 공동체에 서신 질의서를 갖고 왔다고 여겨지는 포르두나도, 스데파나, 아카이고(16,17)도 바오로에게 고린토 공동체에 관하여 여러 소식을 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바오로가 고린토를 떠난 다음에 고린토 공동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던 아폴로는 16,12에 의하면 고린토를 떠나 바오로에게 와있었는데 그로부터도 바오로는 고린토 공동체에 관한 소식을 많이 전해들었을 것이다. 바오로 당대에 고린토와 에페소 사이에는 선편을 통하여 인적ㆍ물적 교류가 매우 활발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큰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던 고린토 공동체에 관하여 이 사람들 외에도 오가는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예컨대 5,1: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11,18이하: "여러분이 교회에 함께 모일 때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들이 있다는 말을 내가 듣는데…"

 

5. 문학적 단일성

이방인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대도시의 신생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을 그토록 생생하게 다루는 이 고린토 전서가 바오로의 친저라는 점(즉, 친저성)에 관하여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점은 현재의 경전 속에 고정되어 있는 고린토 전서가 처음부터 하나의 편지였느냐 아니면 몇 번에 걸쳐 바오로 사도가 고린토에 보냈던 편지들이 합쳐져 있는 것이냐(즉, 단일성 문제)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토 후서에서처럼 그렇게 심하게 논란이 되지는 않는다. 고린토 전서에는 몇 가지 편지가 합쳐져 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예컨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고린토 전서의 단일성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게 한다고 한다.

  1) 8장과 10,23-11,1에서 바오로는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는 서신 질의에 응답을 하면서 이웃의 약한 양심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그런 고기를 먹을 자유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10,1-22를 보면 이런 제한적 자유마저도 용납을 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2) 9장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문제삼는 사람들에 대하여 변호하는 인상을 주는데 이런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론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를 다루는 8장과 10장의 문맥과 관련이 없어 보인다.

  3) 1고린 13장의 사랑의 찬미가는 "영적인 것들"(영적인 선물들과 영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다루는 12장과 14장에 12,31b와 14,1을 통하여 연결되고 있긴 하나, 매우 느슨하고 12장과 14장 사이에 나중에 첨가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4) 4,19에서 바오로는 "나는 곧 여러분에게 갈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16,5-8에서 곧 가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까지 에페소에 더 머물겠으며 마케도니아를 두루 거친 다음에 가겠다고 하는데, 이러한 여행 계획에 관한 큰 차이가 보이는 이유는 4,19를 쓸 때의 편지와 16,5-8을 쓸 때의 편지가 현재의 고린토 전서에 합쳐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 제시된 몇 가지 본문상의 문제점을 근거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재구성" 또는 "분리" 가설이 제안되었다(이에 관하여 더 상세한 점은, C. K. Barrett의 고린토 전서 주석서와 H. Conzelmann의 고린토 전서 주석서의 입문 부분을 참조). 그러나 필자는 위에서 문제로 제기된 단락들도 현재의 고린토 전서 문맥 안에서 모순되지 않으며 나름대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주해를 해 나가면서 설명할 것이다.

 

6. 고린토 전서의 구성

고린토 전서의 구성은 위에서 본 집필 동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서신 질의에 대한 응답과 구두 소식에 대한 반응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서신 질의들에 대한 응답들: 고린토 전서에는 그리스어 원문에서 "페리 데…"("…에 관하여")라는 말이 6번 나오면서(7,1.25; 8,1; 12,1; 16,1.12), 매번 새 단락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 어구의 첫번째  사용처인 7,1에서 바오로는 "여러분이 적어 (보낸) 것들에 관하여"라고 서두를 꺼내고 있는데 이 말은 바오로가 고린토 교우들의 서신 질의에 응답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고린토 전서에서 바오로가 "…에 관하여"라고 서두를 꺼내고 있는 단원(단락)들은 7,1 이하의 단락처럼 서신 질의에 대한 응답이라고 보고 있다. 고린토 공동체의 서신 질의에 대한 응답의 단원(단락)들은 다음과 같다: ① 7장 전체: 결혼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② 8,1-11,1: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하여. ③ 12-14장: 영적인 것들(영적인 은사들과 영적인 사람들)에 관하여. ④ 16,1-4: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한 모금에 관하여. ⑤ 16,12: 아폴로에 관한 소식.

 

2) 구두(口頭) 소식과 그에 대한 반등들: ① 클로에의 사람들로부터 들은(1,11) "공동체의 분열의 위험"에 대한 반응(1,10-4,21). ② 음행에 관한 파다한 소식(5,1)에 대한 반응(5장; 6,12-20). ③ 이방인 법정에서의 소송(6,1-11). ④ 공동체 전례 모임 때의 불미스러운 일(11,18)에 관한 소식의 반응(적어도 11,17-34). ⑤ 공동체 전례 때의 여성들의 처신 문제(11,2-16). ⑥ "죽은 이들의 부활"을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반응(15장).

 

3) 전체적 개요

(1) 1,10-4,21      공동체의 분열의 위험에 관하여

   1,10-17        공동체 내의 파당 형성과 일치의 호소

   1,18-2,16       하느님의 지혜와 힘인 "십자가의 말씀"

   1,18-25        하느님의 지혜와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

   1,26-31        하느님의 지혜와 부르심을 받을 때의 고린토 신자들의 처지

   2,1-5          하느님의 지혜와 바오로의 설교

   2,6-16         "하느님의 영"을 통한 "하느님의 지혜"의 깨달음

   3,1-23         복음선포자들의 신원

   3,1-4          파당 형성에 나타난 고린토 신자들의 미성숙

   3,5-9          하느님의 "일꾼들"인 복음 선포자들

   3,10-17        복음선포자들의 책임과 하느님의 성전인 공동체

   3,18-23        거짓 지혜와 자기 자랑에 대한 경고

   4,1-21         바오로와 고린토 공동체

   4,14-21        고린토 공동체의 아버지로서의 바오로

(2) 5,1-6,20       음행과 이방인 법정에서의 소송에 관하여

   5,1-13         음행에 대한 경고

   6,1-11         이방인 법정에서의 소송

   6,12-20        그리스도 신앙인의 자유와 음행

(3) 7,1-40         결혼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7,1-7           결혼 또는 독신에 관한 기본적인 태도 표명

   7,8-9           독신자와 과부들에게

   7,10-11         그리스도 신앙인 사이의 이혼 또는 재혼에 관하여

   7,12-16         비그리스도 신앙인과 결혼한 그리스도 신앙인의 이혼에 관하여

   7,17-24,29-32a  기본 원칙: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에 머무르십시오"와 그리스도인의 종말론                    적 자유

   7,25-28         동정자들이 결혼하는 것에 관하여

   7,32b-35        독신생활의 장점에 관하여

   7,36-38         약혼자들을 위한 조언

   7,39-40         재혼에 관하여

(4) 8,1-11,1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하여

    8,1-13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 문제와 지식과 사랑

    8,1-3          판단 기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8,4-6          지식의 관점

    8,7-13         사랑의 관점

    9,1-27         바오로의 모범(사도적 권리와 자유)

    9,1-12         사도로서의 권리

    9,13-23        복음선포를 위한 권리 포기

    9,24-27        권면: 영원한 목표를 향한 꾸준한 노력

    10,1-22        이방인 신전 제사 식사와 우상숭배의 위험

    10,1-13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고적인 예

    10,14-22       "주님의 성찬"과 "이방인 제사 식사"의 양립 불가성

    10,23-11,1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결어

(5) 11,2-14,40       공동체 전례 거행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하여

    11,2-16         공동체 전례중에 여인들이 머리를 가리는 문제

    11,17-34        "주님의 성찬 예식"의 거행과 관련된 문제

    11,17-22        잘못된 "주님의 성찬 예식"의 거행

    11,23-26        "주님의 성찬" 전승에 대한 상기

    11,27-34         결어적 권면

    12,1-14,40       영적인 것들(영적인 은사들과 영적인 사람들)에 관하여

    12,1-31          영적인 것들의 다양성과 단일성-은사들과 교회

    12,1-3           서언(기준: "예수는 주님이시다")

    12,4-11          하나의 "영"과 다양한 "영의 선물들"

    12,12-27         하나의 "몸"과 다양한 "몸의 지체들"―다양성의 필요와 통일성(유기적 연결관계)의 필요

    12,28-31a        교회의 다양한 직무들과 은사들―다양성의 필요와 통일성의 필요

    12,31b           결어 및 13장으로의 연결문

    13,1-13          "더욱 뛰어난 길"인 사랑

    13,1-3            사랑의 필요성―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은사들

    13,4-7            사랑의 특성(참된 사랑의 길)

    13,8-13           사랑의 불멸성

    14,1-40           "예언의 은사"와 "이상한 언어의 은사"에 관하여

    14,1-25           더 우월한 "예언의 은사"

    14,26-40          "공동체 전례"의 질서를 위한 지침들

(6) 15,1-58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15,1-11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

    15,12-58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

(7) 16,1-24           편지의 말미: 몇 가지 알림과 끝권면 및 끝인사

    16,1-4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한 모금에 관하여

    16,5-11            여행 계획과 디모테오에 관한 부탁

    16,12              아폴로에 관한 소식

    16,13-24           끝권면과 끝인사

 

7. 고린토 전서의 집필 장소와 시기

집필 장소는 확실히 에페소이다(16,8.19).

문제는 집필 시기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는 이른바 그의 3차 선교여행 때에 에페소에서 약 3년간 체류하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사도 19,1.8.10.22; 20,1.31). 바오로 사도가 2차 선교여행 때 고린토를 떠나 체사레아(가이사리아)와 예루살렘을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던것(사도 18,18-22)이 51년 중반이라고 볼 수 있다면(참조: 사도 18,12-17과 델피에서 발견된 "갈리오 총독"에 관한 비문 비교), 그가 3차 여행을 시작한 것은 52년 이전으로 보긴 어렵다. 그리고 3차 여행 때 바오로는 에페소에 이르기 전에 먼저 갈라디아와 프리기아 지방에서 활동을 하였다(사도 18,23). 이렇게 볼 때 바오로의 에페소 체류 기간은 52년 중반부터 55년 후반까지가 된다. 그러면, 이 에페소 체류 기간중의 어느 시기에 고린토 전서가 집필되었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바오로가 16,19에서 "아시아의 교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라며 아시아(로마 행정 구역으로서의 '아시아' 속주, 그 수도는 에페소였음)의 "교회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함으로써, 편지를 쓸 당시에는 이미 에페소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선교활동을 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것과 그가 고린토 전서를 쓰기 전에 이른바 고린토 "전 편지"(1고린 5,9참조)를 썼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린토 전서의 집필 시기를 바오로의 에페소 지역 선교활동 기간의 초기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에페소를 떠나기 얼마 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이유는 고린토 전서를 쓴 후에도 고린토 교회와 에페소에 있던 바오로 사이에는 여러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바오로 사도의 고린토 "중간 방문"[2고린 12,14;13,1]: "눈물의 편지 발송"[2고린 2,3이하; 참조: 2고린 7,8 이하와 12장]과 그 결과의 초조한 기다림 등등). 그리고 "오순절까지는 에페소에 머물러 있겠습니다"(1고린 16,8)라는 말을 보면 집필하던 계절은 봄(5,6 이하를 참고하면 빠스카 축제 무렵)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린토 전서의 집필 시기는 55년 봄이나 54년 봄이라고 볼 수 있다(고린토 전서 이후 고린토 공동체와 바오로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관하여는 참조: 정양모 주해, 『고린토 후서』[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7b], 분도출판사 1991, 14∼23쪽).

 

8. 고린토 전서의 신학적 중요성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에서 좁은 팔레스티나의 유대적 환경이 아닌. "고린토"라는 그리스의 상업 대도시에서 갓 형성된 한 작은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구체적인 여러 문제들을 대면하고 있다: 파벌 형성으로 인한 공동체의 분열의 위험, 고린토 시에 만연한 음행의 영향, 신자들끼리 다투어 이방인 법정에까지 소송을 제기하는 일, 결혼과 관련된 여러 가지 구체적 문제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 영의 은사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무질서, 근본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거행하는 전례 거행 문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의 거부 등등. 바오로는 이러한 구체적인 여러 문제들을 대면하면서 아직 신앙의 뿌리가 허약하였던 고린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문제점들을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재조명해 주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교회란 과연 무엇이고, 어떠해야 하는지" "방향 제시"를 해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고린토 전서에 나타난 바오로의 신학(교회론, 그리스도론, 종말론, 윤리신학, 사목신학 등등)은 사변적인 "상아탑의 신학"이 아니라, "복음선포자"요 "사목자"로서 사도 바오로가 신앙 공동체에 봉사하면서 우러나온 "장터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고린토 전서의 신학이 깊은 신학 원칙을 결여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고린토 전서는 위에서 보았던 구체적이고 현장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다른 바오로의 서간들이 전하지 않고 있는 귀중한 신학 원칙들을 지니고 있다. 고린토 전서가 지니고 있는 신학적 중요성을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교회사적 중요성

교회사적으로 볼 때 고린토 전서는 기원후 51년부터 54년(또는 55년) 봄 사이에 있었던 고린토의 그리스도 신앙인들과 그 공동체를 창설한 사도 바오로의 관계를 전제하면서, 그 공동체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그 긍정적 및 부정적 모습을 비교적 생생하게 엿보게 해주고, 사도 바오로가 그린 문제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 주는 초창기 교회에 관한 귀중한 산 증언이다. 특히 고린토 전서에 전해지는 "주님의 성찬(성체성사) 전승"(11,23-26)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신앙고백문의 전승(15,3c-5)은 다른 바오로의 서간들에는 없는데, 이 전승들은 바오로 자신이 명확하게 "내가 전해 받았던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바오로 이전으로 소급하는 전승으로, 두 가지 다("주님의 성찬"〔성체성사〕과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그리스도 신앙의 기초에 해당되는 중요한 것들이다. 전승사적 성서 연구에서 흔히 나타나듯이 성서 주석학자들이 주장하는 "전승들"은 가설일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두 전승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2) 교회론을 위한 중요성

다른 바오로 서간과 비교해서 고린토 전서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그 "교회론"에 있다. 교회론과 관련하여 바오로는 고린토 전서에서 두 가지 교회상을 보여 준다. 그 하나는 "하느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상이요(3,16-17),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10,16-17; 11,19; 12,2-26)이다.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이미지로서 바오로는 "교회의 '공동체'로서의 성성(聖性)"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이방인 신전과 그를 둘러싼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참조 5,1; 6,7; 10,32; 14,23),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하느님께 성별된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파괴하는(분열시키거나 / 악습에 물들게 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멸망당할 것이라는 점(3,17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하여 교회 안에 역동적으로 현존하고 있다는 점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바오로는 다음 두 가지를 강조한다.

(1) 일치(통일성)의 필요성: 몸의 각 지체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분리되면 죽게 되는 "몸"의 이미지를 통하여 교회의 각 지체들의 일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일치의 기초는 "한 영 안에서 받은 세례"이다(12,13).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가 같은 영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2) 다양성의 필요성: 서로 각기 다른 지체들이 다양하게 자기 고유의 역할을 해야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될 수 있다 "몸"이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바오로는 교회의 일치는 다양성을 배제하는 "획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다양성을 "같은 영의 다양한 표현"으로서 인정하는데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12,15-20).

3) 윤리신학을 위한 중요성

위에서 이미 보았듯이 고린토 전서에서는 복음을 현실생활에 적용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바오로의 문제 제기와 해결 방식, 그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원칙과 구체적인 지침과 권고 등은 윤리신학에 있어서 언제나 귀중한 기초 자료들이다.

4) 종말론을 위한 중요성

바오로의 신학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종말론적 사고의 틀을 이해해야 하는데, 7,29-31; 15장은 바오로의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5)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을 위한 중요성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을 위하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더 중요하지만, 바오로가 그리스도 신앙에서 차지하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른바 "십자가의 신학")의 중요성을 뚜렷이 부각시킨 곳은 바로 이 고린토 전서이다.

6) 사목신학을 위한 중요성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듯이, 고린토 전서는 바오로 사도가 과연 "사목자"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서간이다. 이 서간에는 이방인이 대다수인 그리스의 한 상업 대도시에서 갓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찾아가도록 바오로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동시에 이 서간은 복음선포자들의 신원(3장; 4,1); 복음선포의 내용(15,1-11; 1,18-25); 복음선포의 자세(9,19-23)에 관하여 바오로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도 깊이 있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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