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평화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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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skyangel] 쪽지 캡슐

2005-05-19 ㅣ No.441


 

10여 년전 한 때는 한 국가(유고 연방)에 속했던 보스니와와 세르비아가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죽이고 죽는 잔인한 전쟁을 벌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보스니아인 수녀 루찌 베트르스는 세르비아 병사에게 체포되었고, 그날밤 수녀는 그 병사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수녀는 그 장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범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이 수녀가 강간범의 아이를 밴 것입니다. 그 수녀는 비록 뱃속에 든 아이가 '폭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증인'이 될 것을 믿으며 수녀원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 결심을 총장 수녀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이 잔학한 경험은 하느님에게 자발적으로 순교의 은총을 간구했었던 저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그 어려운 뜻의 일부분이라 믿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편지 끝에 루찌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맺음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사용했던 앞치마를 두르고 목각 신발을 신고 어머니와 함께 소나무 껍질에서 송진을 얻으려 나설 것입니다.또한 저는 아이에게 사랑만 가르칠 것입니다. 폭력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기는 저와 더불어 '용서'야말로 인류에게 유일하게 영광을 주는 위대한 것이라는 점을 증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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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생명의 수호자, 평화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아닙니다. 때로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송두리채 바치는 것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 덕분에 전쟁의 잔혹함 속에서도 생명과 평화의 싹은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 싹이 자라나서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스니아인 수녀 루찌처럼 순교에 견줄 수 있는 이런 극적인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도 생명과 평화를 위해 노력할 기회는 많습니다. 뾰죽한 말에 같은 뾰죽함으로, 모욕에 같은 모욕이 아닌 온순함으로 대응하려고 한다면, 거친 행동에 똑같은 거칠음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대한다면, 그것 역시 평화를 심는 길이겠지요. 세상의 논리로 보면 바보되는 길이지만, 하느님의 논리로 보면 그분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8)

생명과 평화의 문화 건설이 시급합니다. 하지만 그 문화의 건설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자리잡지 않는다면, 아무리 외적인 조건이 좋다고 해도 결국 죽음과 폭력의 씨를 뿌릴 것입니다. 우리 각자 한 마디 말 속에, 작은 행동 하나 하나에 생명과 평화를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우리 힘으로는 어렵지만, 성령께 도우심을 청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새롭게 해 주소서!"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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