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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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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준 [ksj2415] 쪽지 캡슐

2009-07-25 ㅣ No.183

 
 
아름다운 알프스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물 속에서 예쁜 돌멩이를 줍고 있던 그 소년은 "여기 물 속에 있던 돌멩이의 속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속이 말라 있을까? 아니면 젖어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년은 궁금증을 확인하기로 하고서는, 물 속에 있는 돌멩이 중 주먹만한 돌멩이를 건져내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에 던져 반을 쪼개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어땠을까요? 그 돌멩이는 완전히 말라있었던
겁니다.  근데,  이 돌맹이가 물속에 있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10년, 20년 아니면 100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돌멩이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지만 그 물을 한 방울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랑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면 그 사랑을 한 방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겠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푹 잠겨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분명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종종 깨닫지 못할 때가 더러 많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는 연극 배우처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위선자로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율법과 규율을 내세워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들의 생각과 실천이 전적으로 옳고, 또한 그렇게 모든 유대인들이 따라야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지탄과 책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수천 가지나 되는 규칙이나 규례를 준수하는 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모르는,
그래서 마치 눈먼 사람이 길을 안내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나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온갖 율법의 조문들과 규칙들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제자로 만드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제도화해서 만들어 놓은,
특히 상급자가 자기 편의대로 부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강요하고 괴롭히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기준과 잣대를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서로의 인격존중과 자유와 선행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어떠한 미사여구의 규칙이나 관례도 하느님 앞에는 의미가 없는 것임을 생각하고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질 것입니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나 자신만 규칙과 규정에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귀한 존재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임종욱 바오로 신부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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