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당동성당 게시판

지하철에서 만난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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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윤 [njjangga] 쪽지 캡슐

2000-04-03 ㅣ No.813

"그날도 나는 일에서 쌓인 피로를 안은 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얼마나 지나갔을까.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고 허름한 차림의 할머니가 광주리를 하나 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눈깔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 광주리를 객차 한가운데로 밀어 놓고는 유치원 학예회라면 하나쯤 끼어 있을 아이처럼 몸을 뒤로 빼며 주뼛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용기를 내서 ’눈깔 사탕이 하나에 백 원입니다’ 하고,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나 무표정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눈깔사탕의 가격은 커녕 광주리 안에 들어 있는 물건에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할머니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주눅이 들었는지 다시 한번 ’눈깔사탕이 하나에 백 원입니다’하고 조용히 되뇌더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 안돼 보여 나는 수중에 있는 돈으로 얼마나 사드릴 수 있을까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그날은 일당을 못받았기 때문에 내 주머니 속에는 지하철에서 내려 집까지 타고 갈 정도의 차비밖에는 없었다. ’눈깔사탕 다섯 개를 사드리고 걸어 가야 하나?’ 만약 내가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그 광주리의 사탕을 모두 사들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지하철 안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울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아름씩 사탕을 안기는 기적을 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기껏해야 사탕과 내 다리품을 바꿔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데, 내가 고민하던 사이 한 여학생이 그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광주리에서 한 손 가득 눈깔사탕을 꺼내고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겨우 백 원짜리 동전하나로 여러분의 추억을 살 수 있습니다. 눈깔사탕이 하나에 백 원이래요’ 이 여학생은 서류 봉투를 끼고 있던 중년의 아저씨에게도 권하고, 아이들을 안고 있는 아주머니에게도 권하면서 객차 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지하철 안은 그녀가 뿜어낸 활기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입안은 자신들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그날 나는 한 시간여를 기꺼이 걸어 갈 수 있었다. 단돈 오 백원으로 내 어린 시절 추억을 입에 물 수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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