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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VS 이방인들이 인격 수양해서 쌓는 마음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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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철 [holongfire] 쪽지 캡슐

2006-05-28 ㅣ No.2767

 

                          성령의 열매 
                              VS
      주여,주여 하여도 모른다 하실 신자들의 성령의 열매
                              VS
      동양 사상으로 수양하던 옛 사람들이나
      서점의 좋은 책을 읽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의 양식
                             
    
                            
                        

                            1.성령의 열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헌 부대를 새 부대로 바꾸어서 새 포도주를 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나무이므로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좋은 열매만 맺습니다.
이 좋은 열매는 사랑,기쁨,평화,인내,친절,선행,진실,온유,절제의 열매들로써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서는 맺을 수가 없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나무는 가끔 사랑의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나쁜 열매가 맺히지 않고
온갖 탐욕심 중에서 가끔 절제하지 못하는 나쁜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2.주여,주여 하여도 모른다 하실 신자들의 성령의 열매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시는 하느님은 헌 옷에 새 옷조각을 하나씩,하나씩 깁지 않으시므로
좋은 나무에 성령의 열매가 하나씩,하나씩 맺히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령으로 거듭났다 하는 사람이 좋은 열매만 맺는 좋은 나무가 되었다 하면서도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가 모두 맺히지 전에는 실족하여 죄를 짓게 된다 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성령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9가지 성령의 열매가 모두 맺히지 않아서 죄를 짓게 된다면 헌 옷에 새 옷조각을 깁으신 것이므로
새 옷이 아니고 헌 옷이 찢어지고 헌 옷이 찢어지는 만큼 새 부대가 아니어서 부대가 터지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인 새 포도주를 담지도 않으십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어도 생각과 마음으로 죄 짓는 한계가 남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가 맺혀도 언젠가는 실족하게 된다 하거나
성령의 열매로도 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한다면
실존하는 성령의 열매를 가장 좋은 것으로 믿으면서 과소평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성령의 열매를 얻어도 이후에 그 열매를 얻은 사람답지 않게 죄짓게도 된다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하느님께 얻는 것이라고 믿기는 하지만
옛 동양의 수행자들이나 이방인들이 인격을 수양해서 나아지는 정도를 두고는
신앙관에 입각해 성령의 열매로 얻어진 마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기름을 부으신다는 만큼 실존하는 것이므로 성령의 열매도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영' 적인 열매들로 실존하는 것이지
공자와 같이 인격을 단련하려는 사람들이 목표로 삼아서 수양하는 단어로써의
사랑,기쁨,평화,인내,친절,선행,진실,온유,절제 정도가 아닙니다.


  옛 동양의 유교,도교,불교의 유명한 수행자들이나 퇴계 이황 같은 분들은 
'너희도 나와 같이 완전해져라' 하신 주님과는 달리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성령 없이도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가능했어서 유명한 것이고
이 처럼 이방인들은 성경이 없어도 전 보다 나은 성품이 될 수 있어서
마음의 양식이란 말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기경 님이 석가탄신일을 무시못하시고
고승들과 불자들에게 경축하러 가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여,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여도 주님이 모른다 하실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생각과 마음으로 죄짓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성경의 성령을 곡해하여 해석함으로 자신들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해두고 살지만
주님이 모른다 하시는 이유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모른다 하실 사람들이 맺었다 하는 성령의 열매로는 생각과 마음으로 죄짓게 되는 한계가 있고
옛 동서양의 수행자들이 수양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등을 넘어서지 못하는 불완전한 정도일 뿐인데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얻은 줄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맺혔다 생각하는 성령의 열매가 보통 마음의 양식이었을 뿐이라고
양심 고백을 하여야 바울로 사도가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말라하신 충고를 따르는 것이고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했던 만큼 지난 날의 신앙생활이 바울로 사도를 본받지 못한 신앙이었음을
(사르디스 교회의 충고 말씀이 필요한 신앙이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생각과 마음으로 죄짓게 되는 한계성 : 선악과 부작용으로 생긴 죄와 사망의 법 조항들
                                                                                     (뇌의 나쁜 작용들 : 유전 됨)

 

* 치료제:뇌의 나쁜 작용을 없애주시는 성령의 법 조항이 담긴 성령의 기름
   (생각과 마음으로 죄짓게 만드는 마음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게 해주시는
    성령의 법 조항들을 새 옷조각들과 열매 한개씩,두개씩 주시지 않고
    성령의 새 옷 한 벌로 성령의 모든 열매가 일시에 맺혀진 후에
    (옷 한벌 분량의 새 옷조각들인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일시에 맺혀진 후에)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함.
    즉,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후에는 생각과 마음으로 죄짓는 쓴 맛의 열매가 하나도 없이
    당도만 더 좋아짐.)

 

 

                <성령의 열매 중에서 사랑의 열매>


 사랑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고린토에 보낸 편지글의 사랑의 정의는
사람들과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좋아하며 살라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하는 마음의 조건들이
성령의 법 조항으로 모두 기록된 것입니다.
사랑의 정의 중에서 한가지라도 제외되면 (헌 옷을 새 옷조각으로 깁으면)
그 부분에 대해서 실족하게 되므로 악해지는 일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산을 옮기는 믿음으로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든다 하여도
생각과 마음으로 죄를 짓는 한계가 남아 있어서 사랑의 정의를 한가지라도 어기는 일이 생겨나면 
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들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믿음이 없어서
소용 없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불 속에 뛰어들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 없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과 마음으로 죄를 짓는 한계가 있으면
사랑의 정의를 모두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마음으로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한 것이라 하셨으므로 생각과 마음으로
죄를 짓는 한계가 남아있는한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생각과 마음으로 죄 짓지 않게 해주시는 성령의 법 조항이 담긴

(사랑의 모든 정의가 담긴) 성령의 기름을(새 포도주를) 부어주시면 생각과 마음으로 죄 짓는 일이

없을 정도로 살게 되어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9절과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쓰인 성경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9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생각과 마음으로 계속 죄를 짓게 되어서 계속 회개하고 뉘우치는 의미로 계속 물로 나는 중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숨지기 전에 힘을 북돋아 주어서 이겨내면
(우상 숭배나 다름 없는 탐심의 자동차,티비,컴퓨터,핸드폰,등등의 전제제품 사용을 금지하면)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셔서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는 것이라 기록된 성경입니다.
성경을 믿는 신자라도 도시 지향적인 세속된 광야의 생활을 멀리하고
가나안 같은 농수림의 생활을 하여야 광야에서 말라죽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광야의 사막에서 물과 구름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은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극소수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것 처럼 어느 시대의 그리스도 신자이던
현대의 도시 지향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신앙은 가나안 땅의 농수림,수공예 생활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에 머무르려는 것이므로 구원의 약속을 얻지 못한 신앙입니다. (저도 아직 마찬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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