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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기쁨 - 주임 신부님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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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헌 [dhsong] 쪽지 캡슐

2002-09-07 ㅣ No.2235

우리 본당에 성령 기도회를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임 신부님께서는 이 기도회의 두번째 기도모임(지난 주 목요일)에서 신앙의 기쁨이란 제목으로 특강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오래 된 난청이라 듣는데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는 더욱 귀가 멀어 잘못 알아 듣거나 귀한 말씀을 놓친 부분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줄 알면서도 감히 이렇게 적어 올리는 것은 귀한 말씀을 기도회에 함께하지 못하시는 한 분이라도 더 널리 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 때문입니다. 혹시 서툴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앞서 가시는 영적인 눈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성령 기도회는 매주 목요일 저녁 8시에 있습니다. 많이들 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기쁨

 

무슨 일이든 신이 나야 가까이 하고 싶고, 마음이 그리로 향하게 마련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기쁨이 되고 은총으로 느껴져야 하느님께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가볍게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항상 "Yes(예)"해야하며  "No(아니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이 첫째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宗敎는 빼어날 종자 가르칠 교자를 씁니다. 빼어난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으로 얻은 것은 지식이니, 그것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고 삶으로 연결되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어로는 종교를 Religion이라 하는데 이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항상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한번으로 끝나며 일방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교통하는 관계로 상대방이 있습니다.

남녀의 관계를 한번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옆집에 예쁜 처녀가 살고 있습니다. ’괜찮은데, 예쁜데!’ 하며 부러워하고 혼자 애태우지만 그걸로 그치면 아무 관계가 생길 수 없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에 드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으면 어린 동생이든 옆집 아이든 메신저를 통해 편지를 보내어 어떻게든 내 마음을 실어 보내어야 관계의 실마리가 될 것이고, 그쪽에서 답신이 오면서 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다만 짝사랑까지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으로는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도 위에서 얘기한 경우의 사랑과 대비시켜 봅시다..

"예쁘다"의 차원에서 한 걸음 나아가 계속 편지가 왔다갔다하며 서로의 교통이 이루어져야 하듯이 신앙도 교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종교인은 될지언정 신앙인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할머니 등쌀에 떠밀려  교리반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나서부터는 꾀가 생겨 슬슬 주일미사를 궐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고 갖은 수를 써서 할아버지를 성당으로 모셔 나가려 했으나 "나 하느님 잘 알아! 교리도 잘 알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는 늘 하느님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마." 이러시는 할아버지를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할머니는 마침내 할아버지를 성당으로 이끌어 낼 묘책을 생각했습니다. 농사를 짓던 할아버지는 일꾼들과 함께 들일은 나가시고 할머니는 맛있는 새참을 준비해 나갑니다. 농사일에 고된 일꾼들은 새참 때가 몹시 기다려지지요. 모처럼 시원하게 허리도 한번 쭉 펴 보거니와 시원한 막걸리도 한잔 쭉 들이킬 수 있고, 논두렁, 밭 두렁에서 도란도란 둘러앉아 나누어 먹는 새참 맛은 정말 꿀맛이 아닙니까?

참 때가 되면 멀리서 새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오시는 할머니를 기다리는 할아버지는 미리 신바람이 나기 시작합니다. 벌써 군침이 돌기 시작하는 거지요. 뿐만 아니라 일꾼들한테 할머니의 빼어난 음식 솜씨를 자랑할 걸 생각하니 어깨까지 들썩거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맛있는 음식을 가득히 이고 오신 할머니 목이 아플세라 얼른 광주리를 받아 든 순간 할아버지는 갸우뚱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음식을 담았길래 광주리가 이리 가볍담?’ 하면서 막걸 리가 가득 담겼을 주전자를 받아 든 순간 할아버지는 표정이 바뀌고 맙니다.

이게 뭡니까? 반주전자도 아닌 아예 빈 주전자가 아닙니까? 새참 광주리를 덮은 보자기를 걷어 젖히자 광주리에는 깨끗이 잘 씻어서 얌전히 포개놓은 빈 접시, 빈 주발, 빈 대접만 가득한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으르렁거립니다.

"뭐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그러나 할머니는 태연합니다.

"왜 그러셔요? 나는 내 온 정성을 다해 참을 준비했고 내 온 마음을 이 광주리와 주전자에 가득 담아 왔는데 왜 그리 화가 나셔요? 당신이 성당에 나가지 않아도 마음은 항상 하느님께로 향하듯이 나는 온 마음으로, 온 정성으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진수성찬을 준비했고, 당신과 일꾼들을 위해 맛있는 술을 준비했답니다. 물론 다 마음 속으로 말입니다. 왜요? 당신은 내 이 정성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요?"

"......."

아뿔사! 할아버지는 그제야 당신을 성당으로 모셔 나가고자하는 할머니의 깊은 생각을 깨닫고는 그 후로는 핑계대지 않고, 꾀부리지 않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머리에만, 지식에만 머무는 신앙을 성장하지도, 열매맺지도 못함을 말해주는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완전히 채워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지를 못하고, 자기 역량의 자리를 남겨놓습니다. 내가 할 여지를 남겨 둔다는 것입니다. ’저 여자가 나를 행복하게 해 줄까?’ 온전한 믿음 없이 의심하며 결혼하면 의처증이 생깁니다. "공중의 새는 농사짓지 않아도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길가의 백합은 길쌈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아름답게 옷을 입혀주시지 않습니까?

 

미아리의 성가병원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십 수년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100병상의 작은 병원으로는 채산성이 맞지않아 병원을 옮겨짓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려면 기존 병원을 팔아서 보다 넓은 공간을 마련해야 할 터인데 어쩐 일인지 그 병원을 팔려는 계약이 자꾸 어긋나 성사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몇 번에 걸쳐 자꾸 계약이 불발이 되자 그 병원을 운영하던 수도회인 성가수녀회에서는 계획을 바꾸어 아예 채산을 생각하지 않는 무료봉사 병원으로 바꾸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주는 교회, 어려운 사람, 병든 사람을 위해 주는 교회 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무료 병원을 해보자!"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의사나 간호사, 또한 필수적인 기술요원도 초빙해야 하고 약값이나 식품 등 제대로 준비하자면 최소한 월 7~8억 원의 엄청난 경비가 드는 일이었으니까요. 실질 문제에 들어가면 異論이 분분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성가수녀원 長上 회의에서는 어려운 논의 끝에  투표에 붙여 본 결과 무료병원으로 운영하자는 의안이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답니다.

長上들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 엄청난 경비를 조달한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도처에서 지원이 쇄도한 것입니다.

의사들은 무료로 시간제 봉사를 자원해 왔습니다. 간호사, 빨래, 식당에서 봉사하겠다는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식품을 무료 제공하겠다는 후원자가 나타나고 약품을 후원하겠다는 분도 나타났습니다. 15년 가량 되지만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적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떨어질 만 하면 누가 갖다주고, 부족할 만하면 누군가가 또 채워줍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 다 맡겨두고 기도만 하고 있어서 되는 일은 아니겠지요.

홍수가 나서 제방이 범람하는 데도 하느님이 지켜 주신다면서 피신을 거부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가족이 애원하며 권해도 거부하고 이웃이 권해도 거부합니다. 드디어는 물이 차 올라오자 구조대원이 와서 강권하지만 끝내 그는 거부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므로 하느님이 구원해 주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그는 과연 천국에를 가기는 갔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그는 항의했습니다.

"하느님, 믿음만 가지면 모든 것 다 해준다 하시고는 이게 뭡니까?"

 

하느님의 대답입니다.

"내가 널 구하려고 몇 번이나 갔는지 아느냐? 네 아내의 모습으로, 네 이웃의 모습으로, 끝내는 구조대원의 모습으로 너를 구하러 갔었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데 너는 끝내 내 도움을 거절했다. 지금 와서 무슨 핑계냐?"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초능력적인 기적만 바라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자연의 섭리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땀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땀과 하느님의 의지가 합쳐질 때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자연을 통해서 다가오십니다. 이웃을 통해서 다가오시고, 의사를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우리는 시련 중에서 오히려 굳건한 믿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채워달라고 기도합니다만 채워지지 않았을 때가 문제입니다.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더욱 매달리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의지할 배경(빽)을 찾습니다. 어떤 빽을 찾을 것인가?

하느님을 신앙하는 우리는 마땅히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늦은 밤에 큰산을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산입니다.

바짝 긴장해서 산을 넘어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호랑이가 나왔습니다. 화등잔 같은 것이 이글거리는 걸 보니 틀림없는 호랑이 눈입니다.  

"살아야지" 이를 앙다물어 보지만 자신을 살려 줄 무기라고는 단 한 대 남은 화살뿐입니다. 청년은 화살 통에서 단 한 대 남은 살을 꺼내어 활에 먹이고는 필생의 힘을 다하여 시위를 당겼고, 호랑이의 두 눈 사이를 정확히 겨냥하여 살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기진한 나머지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습니다.  

깨어보니 아침이었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저승인가 이승인가? 살을 꼬집어보았지만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호랑이는? 하며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호랑이는 간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쪽을 보니 큰 바위가 호랑이 형상을 하고 버티고 있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호랑이 상의 바위에는 놀랍게도 자기가 쏜 화살이 바위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화살 하나에 필생의 의지와 집중으로 쏘았기에 바위까지도 뚫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교무금 헌금 이야기하면 싫어합니다.

나는 주임신부가 되어 3년이 될 때까지는 교무금 책정 때가 되면 신자들을 면담하고 채근도 해 보았지만 더는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개신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드리는 만큼 채워 주신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십일조를 하면서도, 헌금을 많이 내면서도 기쁘게 합니다.

 

사도 바울로는 온갖 지병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바늘로 쑤시는 아픔으로 고생을 하고 더러는 하느님께 거두어 달라고 청원도 하지만 은총으로 주셨음을 알기에 그는 이겨냅니다. 우리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까? 좋은 것만 받으려는 자세가 아니라 힘든 것도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감사할 때 자연스레 기쁨이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잘하면 내 덕이요 못하면 하느님 탓은 아닙니까?

행복의 비결은 감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행복합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나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했다합니다. 권력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오히려 행복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도 어쩌면 그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을 둘이나 감옥에 넣어두고 있는 대통령이 과연 행복할까요?

 

기쁠 때 신날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감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셋방에서 열 평 짜리 집을 장만해 나갈 때의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기쁨, 최고의 행복 아니겠습니까?

삶이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면서 반대로 우리는 점차 감사의 의식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너무 편안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고 합니다.

로마에는 3000명이 한꺼번에 목욕할 수 있는 대형 목욕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시민의 편의를 위해서 그 큰 목욕탕을 세웠지만 로마시민은 그 편안함에 빠져 위기에 대응하지를 못하여 결국 로마는 그 목욕탕 때문에 망했다고 합니다.

시련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건강한 성장을 위한 자극제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어느 생선장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포구에서 활어를 수집해서 대도시에 갖다 파는 것이 직업이었습니다만 어떻게 하면 그 활어를 산지에서처럼 싱싱하게 유지하여 소비자에게

팔 수 있을까 늘 고심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고기 몇 마리를 그 활어 무리 속에 넣어두니까 모두가 서로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긴장해서 돌아다닌 결과 시들시들하거나 죽거나 하지 않고 모두가 싱싱하게 유지되더랍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적당한 긴장과 운동으로 생활의 건강한 자극제를 유지해야겠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신앙에는 수도자적인 삶도 있지만 사회적인 삶도 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 있는 것입니다.

주부가 수녀처럼 살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가정을 이끌어가야 할 가장이 성당에만 늘 머물러 있어야 되겠습니까?

모름지기 신앙인은 자기의 본분을 충실히 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뚜막에도 하느님은 계시고, 방안에도 하느님은 계십니다.

우리의 일터, 공장에도 하느님은 계십니다.

밥을 푸면서도 주걱으로 십자성호를 긋는 주부의 아름다운 신앙을 봅니다.

아이는 내팽개치고, 살림은 난장판으로 남겨놓고  봉사활동 나서는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직장에서는 꾀만 부리고 어려운 일은 동료에게 다 미루면서 선교활동 나서는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되짚어보고, 삶 속에서 기쁨 되어지고, 삶이 성령과 함께 하는, 그런 신앙되어지기 바랍니다.

우리 본당의 성령기도회도 성령이 살아 역사하시는 기도회가 되고, 우리는 하느님과 항상 교통하는, 신앙 안에서 기쁘고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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