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성당 게시판

살고 싶은 하느님의 나라(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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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 [human3217] 쪽지 캡슐

2001-06-16 ㅣ No.845

살고 싶은 하느님의 나라

 

1. 하느님 나라의 ’현재’의 의미

  구약의 예언자들은 천국이 다가왔다고 외치기보다는 다가온다는 미래적 의미를 강조하였   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이미’ ’지금’ ’여기’ 와 있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악령들을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 데 ’이미’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오늘날의 신학 역시 하늘나라가 미래에 올 나라 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지금’  하늘나라를 느끼고 체험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세례 받은 우리는 과연,’지금’ 천국을 살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까닭 은 무엇인가?    신자가 되었으면서도 하느님나라 안에 살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느끼지도 못하며, 감사와 기쁜 마음 없이 살아간다면, 성령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모습이라 할 수 있 을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하느님나라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하느님나라를 사는 사람은 과연 언제 기뻐할 수 있는가?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고난 중에 서도 기뻐하라고 하였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다. (Ⅰ 데살    5,16 )   자신도 감옥에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 미쳤다. 그래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삶을 불사르 며 하느님 안에서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달렸던 것이다. 즉, 그는 하느님나라 안에서 살았 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으로 살 수 있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께 미쳐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예수님께서도 미쳐서  (성령에 이끌리셔서) 광야로 가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더러는, 예수님께 미쳐서 집을 떠나 수도원 으로, 신학교로, 봉사 현장으로, 머나먼 해외의 오지(奧地)인 선교지로… 가는 사람들이 있 다. 성직자나 수도자뿐만 아니라 평신도(平信徒) 중에서도 자나깨나  예수님께 미쳐 자신의 모든 것을 쓰레기나 장애물로 여기고, 온 몸을 던져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들이 있다.  곧, 하느님나라를 살고자 하는 염원으로 충만한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느님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 으로 ’항상’ ’극진히’ 모셔야 한다. 다른 무엇이 내 마음 속에서 주인 행세를 한다면 예수 님께서는 자연히 한쪽 구석으로 ’힘없이’ 밀려나신다. (  힘 없이 무력(無力)하게 처형 당 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어떤 사람은 신자라고 말만 할 뿐 예수님을 문전박대(門前薄待)  까지 한다.  예수님을 내 중심에 모셔야 한다. 돈도, 명예도, 우월감도, 내 자신에게마저도 그들 (돈, 명예, 우월감, 자아의식 등)이 내 중심을 차지하도록  ’잠시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나의 모든 중심에 예수님을 극진히 모실 때에 비로소 다른 것들은 예수님 때문에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고 밝게 빛나게 된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최고의 선물인 성령은 비로소 힘을 되찾아 우리를 지배하고, 새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부추겨 주신다. 성령을 받아 새사람이 되려면, ’지금’ ’여기서’ 살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한다.  대오각성 (大悟覺醒) 구각 탈피(舊殼 脫皮)를 해야 하는 것이다.

 

 2. 참 믿음 안에 있을 때에 ’이미’ 하느님나라를 사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를 사는 것이다.  따라서 힘들고 어려운 역경이 닥쳐와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죽음 의 세계를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마치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더 나아가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처럼 그분과의 일치 를 위해서 모든 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성체를 통해서,  세상만물을 통해서, 좋은 느낌을 통해서, 때로는 고통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찾아내어   일치와 감사의 삶을 살아갈 때 새삶 을 살 수 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새로 태어났으면서도 사람들은 왜 변하지 않을까?  또 변하지 못하고 하느님나라를 살지 못할까?  그것은 완전히 회개하지 못하고 세례 이전과 세례 이후의 세계를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로 다시 태어나면서부터 ’육신과 세속 마귀로부터’ 초연해진 사람이 되었다 .  세례 이전과 이후의 세계에 양다리를 걸친 채 오락가락하다 보면 믿음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그들 ’삼구(三仇)’에게 속박 당하기 십상인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술 주정을 일삼는 사람은  술 주정을 끊는 것이요, 도박에 미친 자는 도박을 끊는 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 남을 증오하는 사람은 미움의 잡초를 뽑아 버리는 것이요,남을 속이고 사기 행각(詐欺行脚)을 벌이는 사람은 그런 행실을 버리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회개하는 것이다.  이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버리고 이타적(利他的)이며 공익(公益)을 소중히 여기는 열린 마음으로 사는 것 이 곧 회개의 삶인 것이다.  세례를 받고 참 믿음 안에서 ’그분의 가르침대로’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미’ 영생의 세계, 구원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3. 사랑 안에 있는 자는 하느님나라를 사는 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 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Ⅰ 요한 3,14 )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보면  이런 기록 이 있다. "내포 지방 홍주에서 황광일은 백정 집안에서 천민으로 태어났다.  당시의 백정은 천민 중의 천민으로서 동네에서도 멀리 따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그렇게 천대받으며 아무 와도 일상생활의 교제를 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  황광일도 어린 시절 가정에서조차 멸시받 고  사회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으면서 자랐다. 당시 천주교회는 인간평등(人間平等)을 주장 하면서, 모든 인간이 천주님의 자녀들이기에 차별 없이 귀하며 하느님 앞에서는 동등하다고 역설(力說)하면서 사랑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당시 계급사회(階級社會)에 큰 충격으로 받아 들여졌다.

 

  황광일도 영세하여 ’알렉시스’라는 본명으로 신자가 되었는데, 신자들은 그를  형제로 대 우하였다.  그가 양반집에 가면 집 안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대우가 아 닐 수 없었다. 어찌 감히 천한 백정의 자신이  양반집의 대청 마루에 올라 설 수 있단 말인 가!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내게는 천국이 두 개 있소. 하나는 죽어서 갈 천국이요, 또 하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천국이요."    황광일은 신자들이 자기에게 베푸는 크나큰 사 랑 속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사랑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있다. 천국을 맛보고 싶은 사람은 사랑해야 하며, 남들 도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사랑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랑을 베풀고,  사랑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 제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을 앞세웠던 초기 순교선열들의 열린 마음 큰 믿음 이 감탄스럽다.

 

  하느님나라를 느끼고 체험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모든 만물 위에 인간 을 가장 사랑해야 하고  빈부귀천 차별 없는 정신으로 사랑해야 한다.  농아인(귀먹은 이), 시력 상실자(소경), 가난뱅이, 지체 장애인, 옥에 갇힌 자, 짓밟힌 자들을   더욱 사랑하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잘 생기고 건강하며,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 명예가 있는 사 람은 사랑과 존경을 받기 쉽지만, 위에서 말한 못난 사람들은  소외되어  그 누구도 거들떠 보기조차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생애를 보더라도 본래 천민출신이 아니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 백수건달들을 막역하게 대해 주셨다. 절망에 찌든 마음에 빛을 주시고 오그라진 손을 다정히 잡아 활짝 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급변하는 오늘날 자유시장 경제의 논리 속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가중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갓 태어난 아기조차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주식을 수 십억 원씩 소유하게 된 재벌가족도 많다고 한다.  일부 사람들에게 부(富)가 치중되어 있어 수많은 이들이 굶주리는 사회는  속성상(屬性上)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사탄의 나라인 것이 다.  하느님의 나라는 부가 골고루 나뉘어져,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나라, 더 나아가서 모 두가 복지 혜택을 받아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인 것이다. ( 출애 16장, 사도4,33∼34 )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고 찾아 누리기 위해서 잊지 말고 새겨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이다.  두드려라 열 릴 것이다.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 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 말씀에 따라 우리는 성서 안에서, 믿음 안에서, 기 도 안에서, 그리고 너와 나·우리들의 사랑 안에서 그 분의 입김과 섭리를 느껴보도록 노력 해야 한다.  끝. (* 이 글은 최기산(?) 신부님의 책을 읽고 써 놓았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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