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동성당 게시판

박은종신부님의 죽음-정의구현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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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bejoyful] 쪽지 캡슐

2000-02-12 ㅣ No.1193

이 글은 정의구현 사제단이 발간하는 "빛두레"라는 회보에 실린 박은종 신부님에 관한 것을 옮긴 것입니다. 2월 13일자 "어느 젊은 사제의 죽음"...

 

새천년 2월 7일 오전 10시에 서울 강남 성모 병원 마리아 홀에서는 적막과 같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어느 젊은 사제의 장례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그 장례식에는 500여명의 조문객과 그와 함께 서품을 받았던 동창사제들과 그와 정을 나누었던 선후배 사제 등 150여명의 사제들이 함께 하였다. 분명 그의 사제 장례미사는 명동대성당에서 교구 성직자 장으로 치러야 하건만 그의 죽음의 과정과 원인이 불투명하여 공개적으로 장례식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교구청 고위 성직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비공개적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서울교구 성직자 묘역에 안장 시키는 것으로 장례식을 마쳤다.

 

이 젊은 사제의 죽음의 양상은 한국교회 사상 초유의 일이었고, 왜 이런 죽음이 고인에게 왔느냐 하는 문제는 개인적인 생존의식으로 탓하기에 앞서 사제 공동체, 교회 공동체에게도 책임과 반성의 내용이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 해야 한다고 본다.

 

지난 2월 3일 그의 주민등록지가 있는 강원도 상동읍 사무소를 통하여 황지성당 본당 사제에게 그의 죽음과 신원확인을 하는 연락을 받았을 때에 당혹감과 괴리감! 그가 아니기를 착오이기를 바랐지만 분명 그의 시신은 지문확인을 통하여 서울교구의 젊은 사제로 상동 공소에서 6개월간 휴양하면서 사목자로 있었던 젊은 사제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지리산 등산 코스의 어느 산중에서 등산객에 의해 발견되어 경찰에 신고와 함께 그 지역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그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증명서는 전혀 없었기에 지문을 통하여 그의 신원이 확인된 것이다.

 

그의 시신에서 증명서가 발견되지 못한 이면에는 그 자신의 신원이 알려지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고 사제로서 죽음이 교회 공동체에 그릇된 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도 속에서 신변 정리를 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가 있었다.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엄동설한의 폭한 중에 홀로 산생의 길을 간 것을 보면 어떤 고뇌의 질곡 속에서 방황하다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죽음의 길을 간 것이 아난가! 하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 이후 부분은 몇 차례 나눠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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