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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2일 복녀 플로리다 체볼리 동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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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11-11-07 ㅣ No.2059


축일:6월12일
복녀 플로리다 체볼리 동정녀
Beata Florida Cevoli Religiosa, Clarisse Cappuccine
11 novembre 1685 - 12 giugno 1767
Venne beatificata il 16 maggio 1993 da papa Giovanni Paolo II. La sua festa liturgica si celebra il 12 giugno.
 

 

평등주의자인 여백작의 일상적인 카푸친 성덕, 복녀 플로리다 체볼리    

그 수련장에 그 수련자?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비록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게 된 것이었더라도, 치타 디 카스텔로(Città di Castello)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의 새 아빠티사(원장수녀)인 그녀는 하늘로 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계단을 건설해야 했다. 실로 카푸친들은 어느 두 사람도 서로 똑같지는 않다. 그렇기에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카푸친은 누구든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우리 모두가 아버지의 집을 이루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그 길이시다. 1727년 7월 9일, 유명한 카푸친 신비가인 베로니카 쥴리아니 성녀가 선종했을 때에, 치타 디 카스텔로 카푸친 글라라회 자매들은 성녀의 제자였던 플로리다 체볼리 자매를 후계자로 선출했다. 베로니카 어머니의 사업을 지속시키기에 그 누구도 그녀만큼 더 나은 자리에 서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루크레티아 헬레나 체볼리(플로리다 자매의 속세이름)가 카푸친 글라라회에 입회하게 되었던 것도 베로니카 자매가 누리고 있었던 거룩함에 대한 명성 때문이었다. 처음에 베로니카 자매는 젊은 체볼리 여백작을 수련자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지만, 곧 그 젊은 여자의 성소에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1716년, 베로니카 자매가 아빠티사로 선출되었을 때에 플로리다 체볼리 자매는 그녀의 대리가 되었고, 그 후로 11여 년 동안 두 사람은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손발이 척척 맞게 일해 나갔다. 새 아빠티사도 베로니카 성녀와 마찬가지로 젊은 자매들을 양성시키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플로리다 자매는 성녀 베로니카의 비서였는데, 이 상황에 있어서 ‘비서(secretary)’라는 말은 ‘(비밀도 통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요 믿을만한 협조자’라는 본래 어원의 참뜻을 유지하고 있다. 아빠티싸로서 플로리다 자매는 베로니카 자매의 영적인 유산을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또 그녀는 베로니카 자매의 시복시성 조사위원회 앞으로 기다란 증언문서들을 보내거나, 또 가경자가 된 그 하느님의 종의 전기들과 상본들을 인쇄하면서 그녀의 시복시성을 위해 끊임없이 일했다. 심지어 메르카텔로(Mercatello)에 위치한 베로나카 자매의 본가 자리에 수도원을 세우게끔 하기까지 했다. 플로리다 자매는 자신의 옛 수련장을 사랑하고 깊이 존경했지만, 그녀에게 베로니카 어머니는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의 모범이지, 그대로 모방되려고만 하는 패턴이 아니었다. 흉내는 결코 프롤리다 자매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오상을 받은 그 유명한 수녀와 동격화 시킬지도 모르는 모든 기이한 현상으로부터 애써 거리를 두곤 했다. 플로리다 자매의 영성은 베로니카 성녀의 영성보다 훨씬 더 일상적인 영성이었고, 그녀의 삶은 보기 드물게 잘 살아온, 거룩하면서도 흔한 삶이었다. 그리고, 1993년, 폴로리다 자매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을 때에 그녀의 고유한 영웅적인 성덕은 교회의 인정을 받았다.


 

'마르타'이기보다는 '마리아'였다
이 두 명의 대조적 거룩함의 방식은 그들의 동료자매들보다 더 잘 이해하는 이가 없다. 그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베로니카 자매는 기도를 아주 잘 했습니다. 플로리다 자매는 더 기백이 있었고 더 용기가 있었습니다.” 두 수녀 모두가 마리아의 관상정신과 마르타의 실천적 봉사정신을 타고났는데, 둘 중에 플로리다 자매가 훨씬 더 실무가였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손에 흙을 묻히는 것을 전혀 겁내지 않는 그녀는 요리사, 간호사, 제빵사, 그리고 예물, 화물, 우편 등이 드나드는 창구담당 수녀의 임무를 맡음으로써, 수도원 자매들에게 봉사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비천한 일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떤 자매의 말 대로 그녀는 “100개의 눈과 그만큼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귀족적인 유년기
그러나 처음에 그녀가 수도원의 문에 두드리며 입회를 청했을 때에, 그 젊은 귀족이 카푸친 글라라회 생활의 어려움과 엄격성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수도승녀가 되기 전, 플로리 체볼리 자매는 개인의 자격으로 여백작이었다. 1685년 11월 11일, 피사(Pisa)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구르티오 체볼리 백작과 그의 부인이 된 라우라 델라 세타(della Seta) 여후작 사이에 두고 있었던 14명 자녀 중 11번째였다. ‘루크레티아 헬레나’라는 세례명을 받은, 갓 태어난 그 체볼리 여백작은 걸음을 배우기가 늦은 매우 통통한 아기로 자라났다. 그녀는 이내 곧 가족들 관심의 중심이 되었지만, 어린아이로서도 그녀는 미래의 정배가 되실 예수님께 마음이 끌렸고, 그분께 대한 사랑 때문이라면 아이다운 순수한 즐거움마저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 13살 때에 그녀는 성 마르티노 수도원의 글라라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귀부인 완성학교’에 다녔다. 그곳에서 그녀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고전문학의 교육을 받아 라틴어와 이탈리아어에 정통했고 시 짓기, 수예, 서예, 그리고 당시대의 젊은 숙녀에게 걸맞은 여러 솜씨들이 탁월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는 재능이 없었고, 노래할 때 목소리에 미흡한 점이 많았다. 루크레티아 헬레나는 학교에서 학생으로서의 지능뿐만 아니라 고독과 침묵기도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교사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게다가 눈에 뛰는 엄숙한 태도로 인해 ‘작은 아빠티사’라는 별명이 그녀에게 붙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귀족 신부가 엄격한 시집살이에 적응하다
하지만 성 마르티노 수도원에서 5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친 그녀는 그곳의 글라라회 수도승녀가 되지 않고, 놀랍게도 멀리 떨어진 치타 디 카스텔로에 위치한 카푸친 글라라회에 입회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시절의 풍습에 따른, 그녀의 수도원행 여정은 어느 귀족 출신의 신부 결혼식 행렬과 아주 비슷한 위관(偉觀)이었다. 양단으로 만든 분홍색 신부복을 입은 루케리티아 헬레나는, 마지막 인사하기 위해, 말 탄 기사들의 호위와 귀족 신분의 여인들의 수행을 받으면서 마차를 타고 여러 친지들의 집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끝내 그녀는 치타 디 카스텔로 수도원 정문에 도착했고, 그녀는 큰 나무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봉쇄구역의 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녀는 수련자로 받아들여질 1703년 6월 7일까지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순간부터 루크리티아 헬레나 체볼리 여백작은 그저 플로리다 자매로만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녀의 수련기 초기 몇 개월간은 그리 쉽지 않았다. 동료 카푸친 글라라회 회원들이 수도자이기는커녕 마치 악령들과 더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플로리다 자매는 성녀 베로니카의 도움과 전문적 지도 덕택으로 수련기의 어려움을 순조롭게 적응해 나갔고,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몇몇의 고행들까지 보태기도 했다. 그녀는 관상기도에 대한 강한 열정을 드러냈고, 공동체의 생활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1710년 6월 10일, 그녀는 종신서약을 했고, 그 시절의 관례에 따라 2년 더 양성을 받기 위해 수련소에 남았다. 그러나 그녀는 서약한 수녀가 흔히 입는 검은 베일이 아닌 수련자의 흰 베일을 입은 채로 그 2년간의 양성 과정을 밟았다.


자매들 중의 자매 그리고 열성적인 가난옹호자
서약한 순간부터 공동체가 그녀에게 맡겼던 무거운 책임의 그 의무들은 그녀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성숙하고 믿음직하며, 능숙한 수도자이면서 지도력을 타고난 노력가였다는 사실을 잘 반영해준다. 그러므로 자매들이 베로니카를 아빠티사로 선출했을 때에 그녀를 대리로 뽑은 사실과 또 1727년 베로니카 성녀의 선종 이후, 플로리다 자신이 아빠티사로 선출된 일은 그리 놀라운 일들이 아니다. 플로리다 자매는 아빠티사로서 자매들에게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에 대한 참된 신심을 고취시켰고, 성녀 글라라의 회칙의 진정한 준수를 강화하기 위해 항상 노력했다. 특히 가난과 관련되는 모든 일에 있어서는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매들의 독방에 있는 수정 성수대를 토기 그릇으로 바꾸었고, 수녀원 가대석 벽에 걸린 ‘십자가 길’ 유화를 내리고, 대신에 단순한 14처 흑백 판화를 걸었다. 또 제의실 안에 보관된 전례용 제의에 장식된 금장식과 양단마저도 때내어 버렸다. 해가 지나감에 따라, 그러한 점에 대해서 자매들에게 한 요구사항을 어느 정도까지 누그러뜨렸지만, 스스로는 지극히 엄격한 가난의 생활을 끝까지 영위해 나갔다. 전형적인 카푸친으로서, 그녀는 다른 자매들에게는 건강 유지와 개인위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너그럽게 마련해주곤 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가혹했다. 예를 들어, 그녀의 거친 수도복에 덧댄 헝겊조각이 하도 많았기 때문에, 원래의 옷감을 더 이상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형제애와 기쁨을 주는 친교와 평등을 강조하는 진정한 카푸친 프란치스칸 전통에 깊이 배어든 플로리다 자매는 공동체 생활을 방해하는 수도원 내의 모든 사회적인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아빠티사로서, 그녀는 자매들에게 진정한 순종을 요구했지만, 스스로에게 특별한 대우를 원하지 않았고, 자매들에게 자신을 단순히 “플로리다 자매”라고 불러 주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또, 그녀는 그 당시 유행하던 형식적인 극존칭, 형식주의와 사회적 불평등 내재된 어감인 (한국말의 ‘귀하’란과 비슷한) ‘Lei’라는 단어 대신에, 자매들이 보다 친밀감이 드러나는 (한국말의 ’그대’란과 비슷한) ‘voi’라는 2인칭을 서로 서로 쓰도록 주장했다. 그러나 외부자매들을 봉쇄구역의 공동체 안으로 통합시키려는 그녀의 노력은 거센 반발에 부딪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녀는 결국 그냥 포기해야만 했다.



하느님 집 등잔대에서 밝게 빛나는 등불
이전의 체볼리 여백작은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로 남아 있었다. 플로리다 자매가 아빠티사로 당선되었을 때부터, 그녀의 성덕에 대한 평판은 널리 널리 퍼지게 되었고, 성녀 베로니카가 살아생전 유명했던 것보다 그녀가 살아생전에 더 유명해졌다.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갔고,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방문자들 중에는 토스카나(Tuscany)에서 온 비올란테 데 메디치(de’ Medici) 공주와 또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를 노렸던 제임스 스튜어트 왕세자(the Old Pretender)의 폴란드 출신의 클레멘티나 조비에스키비(妃)도 있었다.  플로리다 체볼리 자매의 숨은 관상 생활은 봉쇄수도원의 벽을 뚫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 특히 기도와 조언과 격려가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 눈부신 한줄기 빛이었다. 특히 치타 디 카스텔로의 시민들은 플로리다 자매의 신세를 많이 졌다. 1758년, 그들은 교황령의 국가 원수였던 교황에게 반란을 일으켜 실패했다. 하지만 플로리다 자매의 중재 덕택에 그들은 클레멘스 13세 교황께로부터 대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고통 중의 겸손과 인내심
그녀는 성녀 베로니카의 신비체험들을 많이 목격한 바 있고, 그녀 자신도 신비체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 있는데 만큼 그런 체험들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결코 그녀의 영적인 일기를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일기를 쓰게 한 고해사제가 죽자마자 플로리다 자매는 그것을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인격과 영성생활을 목격자들의 증언과 남겨진 그녀의 서신에서 그것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다. 평생 동안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녀가 인생 말년에는 포진 바이러스의 증상으로 고통스러운 가려움에 시달렸는데, 때문에 그녀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1747년, 그녀는 가시관을 받아씀과 심장을 뚫는 상처와 같은 그런 유형의 신비체험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 대신 그녀는 자연적인 병에 시달리게 되도록 자신의 몸을 봉헌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관상하고 고통을 받으시는 구세주를 닮으려고 했던 플로리다 자매는 결코 고생이나 육신의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러한 건강상태에는 극도의 내면적인 메마름과 온갖 종류의 유혹, 그리고 육체적 병으로 인한 불쾌감과 노령의 쇠약함이 부과되었다. 포진 바이러스는 그저 가려운 피부를 긁고 싶은 욕구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불쾌한 악취를 풍김으로써 크나큰 굴욕감도 가져왔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고통을 한없는 인내심과 진정한 기쁨으로 견디었고, 가끔은 유머의 가미로도 인내했다. 그렇지만 플로리다 자매는 그러한 자신의 상태를 자매들에게 숨겼기에, 자매들은 열심히 일하는 그들의 아빠티사가 그토록 고통을 받고 있었는지 추후도 의심하지 못했다. 플로리다 자매의 겸손은 뛰어났고,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곤 했다. “아아! 보잘 것 없는 난 말이야! 수도생활을 해온 이 모든 해 동안, 내가 해야 할 선행이 너무나 많았지만 나는 해내지 못했구나! 내가 회개할 수 있게 기도해다오.” 그녀는 단식하고자 하는 자신의 갈망을 건강 문제로 인해 결코 채우지 못했다. 그녀는 공동체 식사시간 외에도 자주 약간의 빵을 먹어야 했다. 그녀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젊은 수녀들에게 나쁜 모범을 보여 주게 되니 이에 있어서 좀 더 신종해지라고 어느 한 동료 자매가 그녀에게 권고했을 때에, 그녀는 단순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단식하지 않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분께서 그것을 알고 계시다면, 난 그분의 피조물들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더없이 행복해.”



"사랑받으시는 선"이신 분과 정열적으로 사랑에 빠진 그녀
플로리다 자매는 그리스도 수난의 신비에 대한 신심을 품었던 것뿐만 아니라, 성체성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한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빠티사로 그녀의 임기 동안에는 일주일에 네 번의 영성체가 수도원에서 흔한 관행이 되었는데, 그 시절에는 이러한 관행이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리스도 성심의 신적인 사랑은 플로리다 자매 자신에게 생활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분의 거룩하신 어머니 마리아님께 대한 그녀의 신심은 또한 언제나 진심어리고 다정스러웠다. 늘 하느님의 어전에 살아가도록 노력했던 그녀는 매일의 임무에 매진하면서도 자신의 영혼 안에 내재하시는 주님께 주의를 기울이곤 했다. 평생 동안 하느님과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그녀는 공동체 총회 때나 자매들과의 사적인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사랑받으시는 선”이신 그분에 관해서 늘 열정적으로 말하곤 했다. 

영원히 서로 엮인 두 사람의 운명
플로리다 자매는 자신의 전임자의 시복시성운동에 전심으로 투신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 자신은 살아생전 그 시복식을 몸소 보지 못했다. 실제로 베로니카 성녀의 시복식은 플로리다 자매가 선종한지 거의 40년 후인 1804년까지 이루어지 않았다. 플로리다 체볼리 자매는 1767년 6월 12일에 선종했다. 플로리다 자매의 유해는 작은 함에서 모셔진 채 수도원 성당의 중앙 제대 옆 측면 제대에 안치되어 있다. 그 중앙 제대 밑에는 부패하지 않은 성녀 베로니카의 시신이 모셔진 유리관이 있다. 살아생전에 함께였던 것처럼 이제 죽음 후에도 함께 있는 복녀 플로리다 체볼리와 성녀 베로니카 줄리아니의 운명은 영원히 서로 엮여져 있는 것이다. 비록 플로리다 자매가 자신의 수도양성 기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카푸친 생활을 오상을 받은 그 유명한 성녀의 눈부신 그늘 아래에서 보낸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유지했으며, 또 선종할 무렵, 그녀 스스로는 사랑에 타오르는 자신만의 등불을 든 채로 자신의 천상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러 나서는 동정녀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Iesus amor, fiat voluntas tua! (사랑이신 예수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님, 저로 하여금 당신을 영원토록 사랑하며 당신을 위하여 살고 죽기를 갈망하나이다. 나의 구세주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당신의 거룩한 상처들을 제 마음 한 가운데에 찍어 주시옵소서. 이 단 하나의 사랑의 불꽃을 지닌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지 당신을 찾지 못하게 될 만큼의 그러한 가혹한 고통은 결코 느끼지 못하겠나이다." "이제까지 나는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으니, 삶에 있어서 나에게 남겨진 이 잠시 동안에 내가 사랑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 복녀 플로리다 체볼리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Martirologio Romano: A Città di Castello in Umbria, beata Florida (Lucrezia Elena) Cevoli, vergine dell’Ordine delle Clarisse, che, sebbene coperta di piaghe in tutto il corpo, svolse con laboriosità e solerzia i compiti a lei affidati. 


Beata Florida Cevoli Religiosa
12 giugno 
11 novembre 1685 - 12 giugno 1767

Martirologio Romano: A Città di Castello in Umbria, beata Florida (Lucrezia Elena) Cevoli, vergine dell’Ordine delle Clarisse, che, sebbene coperta di piaghe in tutto il corpo, svolse con laboriosità e solerzia i compiti a lei affidati. 


Lucrezia Elena Cevoli nasce a Pisa l'11 novembre 1685, figlia del conte Curzio e della contessa Laura della Seta. Appena diciottenne, nella primavera del 1703, Lucrezia decide di entrare nel monastero delle Clarisse Cappuccine di Città di Castello. In pochi credono che Lucrezia, abituata ad una vita agiata e benestante, potesse superare le durezze di una vita quale è quella dettata dalla regola di S. Chiara. Certo l'impatto con il monastero fu molto duro, le monache le sembravano demoni e anche la maestra S. Veronica Giuliani non era molto intenzionata a riceverla. Ma la sua vocazione vera ed autentica contribuì non solo a superare il difficile momento dell'ambientamento ma rafforzò la volontà e la costanza della sua scelta.
L'8 giugno del 1703 iniziò il periodo di noviziato, il 10 giugno del 1705 emise la professione solenne dei voti e prese il nome di Florida.
Tra i primi incarichi dati a suor Florida figura quello di "rotara", incarico che veniva dato a suore esperte e dalla notevole personalità, a Florida fu assegnato proprio per la sua personalità, per la sua capacità di avere polso e capacità di governo. Una delle testimoni diceva infatti: "suor Veronica era buonissima per far orazione, suor Florida aveva più spirito e più coraggio".
Per i motivi sopra descritti nel 1716 quando Veronica Giuliani divenne badessa, suor Florida venne eletta vicaria, per molti anni svolse il suo incarico seguendo in particolare la vita quotidiana, le sue piccole e grandi difficoltà e curando soprattutto i rapporti umani.
Alla morte di Veronica nel 1727, divenne badessa Florida e guidò il monastero fino al 1736.
Suscitava molta meraviglia il fatto che pur provenendo da una famiglia aristocratica, spesso si prestava a svolgere i lavori più umili.
Fu colpita da un erpete che per circa vent'anni gli arrecò un fastidioso prurito, sofferenza che affrontò con grande naturalezza e soprattutto senza far notare agli altri la propria sofferenza.
Suor Florida fu tra le promotrici della causa di beatificazione della sua maestra Veronica Giuliani, nel 1753 decise di erigere un nuovo monastero proprio nella casa dei Giuliani a Mercatello sul Metauro. Dava le direttive alle persone che seguivano i lavori, cercando di non sperperare le risorse per la costruzione del nuovo monastero e facendo tutto ciò che garantiva la minor spesa.
Dopo trentasette giorni di febbre, il 12 giugno 1767, suor Florida morì, venne ricordata da tutti per la sua vita straordinaria vissuta nella vita di ogni giorno e nell'ordinarietà di una vita vissuta secondo la regola da lei abbracciata giovanissima e dedicata interamente a Dio.
La causa di beatificazione fu iniziata nel 1838 e nel 1910 furono approvale le virtù eroiche. Venne beatificata il 16 maggio 1993 da papa Giovanni Paolo II.

Iesus amor, fiat voluntas tua! Fa, Gesù, che eternamente ti ami, e patire e morire per te io brami. Crocifisso Gesù, mio Redentore, stampatemi le vostre sante piaghe in mezzo al cuore. Chi avesse una scintilla di questo amore non sentirebbe niente di grave quanto di penoso si può mai trovare. Pregate per me acciò cominci ad amare per questo poco che mi resta di vita, giacché nulla ho fatto finora.
(b. Florida Cevoli)


Autore: Carmelo Rand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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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02-04-14
Letto da 3604 persone
 


Beata Florida Cevoli 
11 novembre -12 giugno 1767
Clarisse Cappuccine


Lucrezia, questo il suo nome di battesimo, nacque, undicesima di quattordici figli, l'11 novembre 1685 da Laura e Curzio Cevoli, una delle famiglie della nobiltà pisana. La piccola Lucrezia, da quello che raccontano i testimoni del processo di beatificazione, era una bambina di un'intelligenza eccezionale. All'età di dodici anni, dopo aver ricevuto il Sacramento della Cresima, entrò come educanda nel Monastero di San Martino, dove già si trovavano due sue sorelle più grandi. È proprio in questo periodo che la giovane Lucrezia cominciò ad ascoltare la voce del Signore che la chiamava a vivere una vita austera nel nascondimento e in assoluta povertà.

Dopo un approfondito confronto con un padre barnabita, che ne seguiva il cammino interiore, fece la sua scelta di entrare fra le Cappuccine di Città di Castello, non solo perché era abbastanza lontano dalla sua famiglia ma soprattutto perché già si facevano sentire gli echi della santità di Veronica Giuliani. Oltre ad incontrare lo sfavore dei genitori, incontrò anche quello iniziale della comunità tifernate e addirittura della stessa suor Veronica, preoccupata che l'arrivo di un'aristocratica potesse portare a forme di rilassamento nel Monastero. Comunque attraverso varie raccomandazioni Lucrezia riuscì ad ottenere il consenso di entrambe le parti e il 4 giugno 1703, festa della Santissima Trinità, entrò in Monastero accolta da tutta la comunità.

Il giorno della Vestizione, alla presenza del vescovo tifernate Luc'Antonio Eustachi, ricevette il nome di Florida in onore del patrono di questa città e questo fu quasi un presagio per lei, come se già il Signore le facesse intendere che avrebbe avuto un ruolo speciale a Città di Castello come portatrice di pace e amore. Al suo ingresso in Monastero la giovane suor Florida trovò come Maestra suor Veronica Giuliani di cui già tanto aveva sentito parlare. Veronica dal canto suo scrive nel suo Diario: "…ero tutta travagliata per il timore che avevo della prossima croce dell'ufficio del Noviziato…Iddio mi fece capire che è suo volere che io accetti questo peso dell'ufficio e che lasci tutta la cura a Lui e che esso sarà il Maestro della novizia e mio". Anche la Vergine Maria le disse di non preoccuparsi per la novizia con queste parole: "Bada bene, o Veronica, alla mia Floridina, gioia mia, gioia del mio Divin Figlio".

Tra la maestra e la novizia ci fu fin dall'inizio una perfetta sintonia di spirito, anche perché Veronica dovette ricredersi riguardo alla giovane che si trovò davanti: era tutt'altro che un'aristocratica abituata alle delicatezze!

Il 20 giugno 1704, Suor Florida poté emettere la sua professione che la legava per sempre allo Sposo che fin da bambina aveva cercato; divenne ben presto una monaca modello: piena di molte virtù, spiccava per la sua preghiera soprattutto per i missionari, per gli eretici e per tutti coloro che sono lontani da Dio. Ciò che maggiormente risaltava in lei era la fede, come testimoniò una sua consorella al processo di beatificazione: "Aveva una grande fede in Dio: il solo guardare il Crocifisso le apportava grande tenerezza e si commuoveva fino alle lacrime".

 Iesus amor, fiat voluntas tua!
Fa, Gesù, che eternamente ti ami, e patire e morire per te io brami.
Crocifisso Gesù, mio Redentore, stampatemi le vostre sante piaghe in mezzo al cuore.
Chi avesse una scintilla di questo amore non sentirebbe niente di grave quanto di penoso si può mai trovare.
Pregate per me acciò cominci ad amare per questo poco che mi resta di vita, giacché nulla ho fatto finora.
Beata Florida Cevoli

Dalla testimonianza di uno dei suoi confessori, don Antonio Giordani, sappiamo che davvero aveva una grande fede, grazie alla quale riuscì a sopportare per trent'anni le fortissime tentazioni che la facevano disperare di potersi salvare: "Una volta quando era ancora novizia si recò da suor Veronica che si trovava malata all'infermeria e le disse: «Mi salverò o non mi salverò?» La santa cercò di consolarla ma i suoi tentativi non riuscirono a calmare suor Florida; allora le comandò di portarle il santo Bambino, (quello stesso Bambino che più di una volta tra le mani di suor Veronica era diventato di carne). Lo prese tra le mani e rivolgendosi alla statuetta disse: «Che dite, Santo Bambino: volete bene a questa figliola? Se voi le volete bene e si salverà, datemi qualche segno». Il divino Bambino aprì una mano e con due dita, pollice e indice, afferrò il dito indice della mano sinistra di suor Veronica stringendolo fortemente per lo spazio di un'ora".

Lo stesso Bambino, quando veniva portato in processione per le celle del Monastero dalla santa, entrando in quella di suor Florida diceva al cuore di Veronica: "Questa mia sposa è di mio gusto: fa che ella si mantenga con purità e semplicità come è di presente".

Sicuramente suor Florida fu la più vicina a suor Veronica e poté prima delle altre convincersi della sua santità, inoltre spesso le veniva imposto, da parte dei confessori e, in particolare, dal Padre Crivelli, mandato dal Sant'uffizio, di far da tramite per sottoporla ad alcune prove.

Quando suor Veronica divenne abbadessa della comunità, suor Florida, fu eletta vicaria; prima ancora però, fu anche maestra delle novizie, ma sempre sotto la direzione di suor Veronica.

La santa ebbe in suor Florida un aiuto davvero particolare e prezioso: prima di tutto era la sua confidente e con lei poteva condividere i "segreti di Dio"; inoltre le fu veramente di supporto in tutti quei compiti che richiedevano un livello culturale superiore al suo. Alla morte di santa Veronica, nel 1727, la beata Florida fu eletta abbadessa e, sulle orme della sua maestra, seppe guidare la comunità sfruttando al massimo le sue capacità naturali e spirituali.

Dai processi per la beatificazione sappiamo che davanti ad alcune sorelle che facevano fatica ad aprire il loro animo, lei riusciva a prevenirle e a vedere le loro sofferenze interiori; una di esse racconta: "Con confidenza di figlia posavo il mio capo sul suo seno, ella mi teneva così stretta… e in questo punto sentivo come delle scosse così forti che mi facevano sobbalzare ed io da tutto ciò provavo vari sentimenti interni di devozione specialmente quando mi trovavo in qualche afflizione dell'anima. Ma non voleva che le monache si attaccassero a lei perché diceva: «Dio è geloso e il nostro cuore lo vuole tutto per sé".

Esercitò l'ufficio di abbadessa per venticinque anni. In questo così lungo tempo, dimostrò di essere la serva di tutte le sorelle, sapeva andare incontro alle necessità di ognuna, specialmente delle malate, delle anziane e delle afflitte. Grazie a lei la comunità fece un vero cammino di rinnovamento e di ritorno pieno all'osservanza, soprattutto per quanto riguarda la povertà, tanto amata e ricercata da san Francesco e dalla nostra Madre santa Chiara. Favorì l'introduzione della causa di beatificazione della sua antica maestra Veronica Giuliani e nel 1753 decise di far erigere un monastero nella casa dei Giuliani a Mercatello sul Metauro. Dopo trentasette giorni di febbre, il 12 giugno 1767, suor Florida morì.

La causa di beatificazione fu iniziata nel 1838 e nel 1910 furono approvate le virtù eroiche. Venne beatificata il 16 maggio 1993 da papa Giovanni Paolo II. La sua festa liturgica si celebra il 12 giug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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