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동성당

[부활 제6주간 수요일]성령잡기(요한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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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0-05-20 ㅣ No.287

2020 5 20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공동번역성서)

                                 성령잡기

(요한16:12~15)

12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아멘

 

성령 하느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과 우리 안에 여전히 오염의 상태로 잔존하고 있는 세상의 찌끼들을 고소하세요그렇게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죄가 무엇인지 의는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게 되는 것인지 누가 과연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에 관해 깨우치고 알려주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관해 알려주신다는 말입니다그리고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주라는 것을 시인하게 해 주십니다.(고전12:3)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영원히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한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성령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영원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하느님은 우리 성도들과 하나로 연합된 삶을 사시기 위해 천국이라는 곳에 당신의 거처를 만드셨습니다그리고는 우리와 함께 영원을 사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그래서 이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 안에 미리 하느님 나라와 함께 그 나라에서 우리 안에 내주하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 성령과 함께 하나가 되어 사는 연습을 미리부터 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성령이 들린 사람이 아닌 귀신이 들린 사람들처럼 살 때가 있어요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인정을 합니다뿐만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잘 배우고 있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때때로 우리 안에서 나오는 마귀 적 언행과 의심 심지어 불신 등은 우리를 당황케 하고 아연케 합니다.

그런데 왜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우리 안에서 그 더러운 귀신의 행실과 생각과 언사가 튀어 나올까요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당신의 질문에 스승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그것을 알게 하신 이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십니다.(마태16:17) 우리는 그 순간 베드로의 마음을 주관하시던 분이 하느님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금방 예수님으로부터 마귀’ 라는 욕을 먹습니다금방 하느님의 간섭으로 스승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고백을 한 사람이 어느새 마귀에게 조종이 되어 사탄의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이란 말입니까금방 하느님의 영향을 받다가도 어느새 마귀에게 붙들리기도 하고 또 다시 하느님께 붙들려 성령의 일을 하곤 하는 그런 꼭두각시 같은 존재들인가요그렇지 않습니다우리가 성령께 붙들리는 그 순간 마귀는 우리에게 범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일5:18)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하느님의 아들이 그를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악마가 그를 다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에게서 나오는 마귀적 사고와 행동과 언사는 어떻게 된 것인가이 세상은 지금 한 마디로 용과 양의 전쟁터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용은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의 세력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묵시12:9) 그 큰 용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데이제 그 놈은 땅으로 떨어졌고 그 부하들도 함께 떨어졌습니다.

 

그렇지요그 용이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힌다고 하는데 용이 아담과 하와에게 꾀었던 그 내용으로 천하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그게 휘브리스’ 교만입니다피조물이 제 자리를 벗어나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여 스스로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살게 하는 것을 휘브리스’ 라 말합니다용은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이 세상의 가치를 참 가치라 속이며 하느님나라와 하느님을 그들에게서 감추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양은 용과는 정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목숨까지 바쳐내신 십자가의 삶의 증인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 형제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이 세상에는 그렇게 하느님과 하느님나라를 참 가치요 힘으로 여기며 오직 그곳에서만 행복을 찾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와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자신들의 삶의 목적으로 삼아 거기에서 희로애락과 행복과 불행을 얻는 세상 힘의 원리가 공존하고 있습니다그게 용과 양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그 용과 양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그 전투는 세상을 가르는 전투임과 동시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이기도 한 것입니다양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우리 안에 잉태된 새 생명의 기운을 말하는 것이고 용은 하느님을 떠난 모든 아담의 후예들이 하느님 없이 자신들의 자원과 이 세상의 힘으로 행복 즉 구원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인격과 육체에 쌓아놓은 습관과 성품과 집착과 중독 등을 말합니다구원을 얻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그러한 것들이 귀신처럼 성도의 몸에 잔존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우리를 만지지도 못하고 건드리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더 이상 고소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 우리의 삶 속에서 마귀적인 언사나 행동 마귀적인 사고를 격동시킬 수 없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도 성령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순간에도 마귀의 격동에 휘말려 마귀적 언행과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며 언제든지 귀신의 세력에 속한 자처럼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쉬운 말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이후에도 마치 귀신들린 자와 방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이라는 것은 가상의 동물입니다용은 토템을 숭배하던 고대시대에 주변 나라들을 정벌한 어떤 왕이 각 부족이나 나라가 섬기던 각각의 짐승들의 특징을 잡아 그려낸 것으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가장 강력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그러니까 용은 다른 것들을 다 정벌하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앉은 이 세상의 왕의 상징인 것입니다따라서 용이라는 짐승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은 자신들의 힘과 이 세상의 힘으로 하느님도 넘어서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죄 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용으로서의 왕의 얼굴을 용안이라고도 하고 왕의 침상을 용상이라고도 하며 왕의 옷을 용포라고도 하는 것입니다뿐만 아닙니다용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욕구는 우리 일상생활에도 아주 깊숙이 침투해 있고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등용문이라는 말을 아십니까중국 황하 상류의 용문이라는 급류가 흐르는 여울목 이름이 용문입니다전설에 의하면 잉어가 거꾸로 그 여울목을 타고 올라 급류를 이겨내면 용이 된다고 합니다힘써 등용문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지요거기에는 용이 되는 것이 최고의 영예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등용문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한 것입니다심지어 우리는 그 귀신들린 삶에 너무나도 중독이 되어 있어서 개천에서 용 났다 미꾸라지 용 됐다’ 는 등의 말을 칭찬으로 듣고 있습니다그건 칭찬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칭찬의 말은 개천에서 양 났다 미꾸라지 양 됐다’ 여야지 용이 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절대 칭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이렇게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전부 용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부립니다그 용의 잔재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우리 안에 오신 성령하느님은 양의 삶을 가르치시며 양의 삶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요한16:13-15)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 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 올 일들도 알려 주실 것이다.

14 또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듣는 것만을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그런데 그 듣는 것이란 내 것’ 예수님의 것이랍니다예수님의 것이 어린양 십자가 자기부인 순종입니다. 14장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요한14:26)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보혜사)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 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서 제자들을 향해 세상에 어린양으로 가라고 하셨고 고난을 받으라고 하셨고 용서하라 하셨고 섬기라 하셨으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성령은 그 가르침이 왜 옳으며 어떻게 옳은가를 가르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을 가르치시는 성령과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용의 잔재가 늘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우리는 그러한 우리 내면의 다툼 속에서 자꾸 양의 편을 드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3:14~16) 14 여러분은 마음 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품고 있으니 공연히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5 이런 지혜는 위에서 내려 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인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분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야고보가 교회에게 한 말씀입니다시기와 다툼을 경계하라 하면서 그러한 지혜는 마귀 적이라 합니다분명 우리 안에서 귀신 적 발상과 귀신적 사고 귀신적 행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따라서 우리가 성령 안에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귀신들린 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귀신들린 자의 삶은 다른 삶이 아닙니다하느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뜻과 야망과 비전을 이루는 삶을 추구하는 모든 삶이 다 귀신들린 자의 삶입니다.

용이 입에 물고 있는 것이 여의주입니다여의주(如意珠)는 내 뜻이 내 마음과 같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구슬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래서 불교에서는 여의주를 얻은 듯 무슨 일이 뜻대로 잘 되어 가는 때에 여의보주라고 합니다.그러니까 용과 여의주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뜻을 세우고 자기의 뜻대로 이루며 사는 것을 힘이요 행복이요 구원이라 생각하는 모든 이 세상의 죄인들을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는 한 편으로는 성령의 삶을 다른 한 편으로는 귀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성경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헬라어 프뉴마’ 입니다그 단어는 숨 호흡 바람’ 으로도 혼용해서 번역이 되는 단어입니다그 단어가 한 문장 안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쓰인 곳이 있습니다.

 

(요한3: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여기에서 주님은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그런데 바람이라고 번역이 된 말과 성령이라고 번역이 된 말이 똑같은 단어입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번역을 해도 무방합니다. ‘성령은 임의로 불고 싶은 대로 분다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그 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람을 잡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성령을 잡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이 모든 천지만물에 우리 성도들이 배워야 할 하늘의 비밀을 모형으로 감추어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은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요그래야 성령을 붙들 수 있잖아요손바닥을 넓게 펴고 있다가 바람이 살랑살랑 손바닥에 와 닿으면 그 때 콱 움켜쥐면 되나요바람을 잡기 위해서는 바람에 자신의 전 존재를 노출시켜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그 방법으로 바람을 붙들어 놓을 수는 없지만 바람과 연합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니까요.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때로는 돌풍처럼 강하게 불기도 하고 때로는 느낄 수 없을 만큼 약하게 불기도 하지만 공기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바람은 있습니다마찬가지로 성령 하느님은 편재하시고 무소부재 하시는 분이십니다그 분은 어디에나 계십니다우리가 그 바람 같은 성령님을 포착하고 붙들기 위해서는 그 분 앞에 우리의 전 존재로 서게 될 때 우리는 그 분을 포착할 수 있으며 그 분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성령 하느님 앞에 우리의 전 존재를 드러내 놓을 수 있을까요그냥 아무 생각 없이 대충 살다보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벼락같은 성령의 임재가 느껴질 날이 오게 되는 것일까요그러한 신앙을 우연의 신앙’ 이라 했습니다그렇게 해서 성령을 포착하게 되는 것은 맑은 날 벼락 맞는 것보다 더 희박합니다우리는 규칙적으로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는 노출을 해야 합니다그러한 성도의 노출 방법으로 개혁주의 신학이 제시하는 것이 말씀 기도 성례’ 입니다다른 말로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라고도 하지요.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며 수시로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려야 하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례가 행해질 때 빠지지 말고 참석을 해야 합니다그 모든 것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곳이 교회의 공적 예배(미사)입니다예배는 우리가 성령을 포착하고 성령을 인식하며 성령의 뜻을 분별하여 쫓는 데에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배(미사)를 하는 이유를 은혜를 받기 위하여’ 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예배(미사)는 인간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순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행동을 말합니다그런데 그 예배(미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혜를 불같이 경험하게 됩니다은혜를 받기 위하여 예배(미사)를 하는 것이 아닌데 예배(미사)를 하는 자에게는 은혜가 쏟아 부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 앞에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찬양 앞에 하느님을 향한 기도 앞에 우릴 노출시킵니다이렇게 하느님을 예배하고 난 후의 우리 일상과 허다한 세상 일로 시간을 보낸 후의 우리일상이 과연 같을 수 있을까요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우리는 지금 이 시간 바람 같은 성령 하느님을 온 몸으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이러한 예배의 삶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하여 일어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용과 양의 전쟁에서 양의 편을 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렇지 않고 말씀과 기도와 예배의 파워를 의지하지 않은 채 그냥저냥 벼락같은 은혜를 우연에 의지하여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은 용의 미혹에 수시로 넘어가게 됩니다그게 귀신들린 삶입니다성령을 안에 모시고 귀신들린 삶과 방불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용은 우리의 실수와 넘어짐을 우리 눈으로 목도케 함으로 해서 우리를 자포자기의 상태로 몰아가는 수법을 씁니다.

실수와 넘어짐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용의 유혹에 더욱 더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그 때 우리를 흔들어 깨워 우리를 돕고 계시는 막강한 바람이신 성령을 경험케 해주는 것이 바로 말씀과 기도와 예배인 것입니다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 용의 유혹을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그렇다고 해서 우리 안에서 폭로되는 용의 삶이 우리에게 반드시 해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과 함께 하면서도 용의 삶을 사는 것을 폭로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여러 가지 유익도 줍니다.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용의 삶을 직면하면서 우리의 티끌 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의로울 수 없으며 단 한순간도 선할 수 없다는 것을 거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드러나는 귀신의 삶에 당면할 때 불안함과 안타까움과 죄스러움과 당혹스러움과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그러면서 양의 삶의 고귀함과 가치 있음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용의 삶이 주는 쾌락과 거기에 비례하여 오게 되는 하늘 백성들이 겪는 심적 고통을 함께 겪게 해 주심으로 해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이들이 용의 삶을 살게 되면 어떠한 피폐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는지를 직접 경험케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경험하고 배우고 인식을 했으면 이제 하나하나 버리면서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야지요아울러 기도와 말씀과 예배와 함께 좋은 신앙의 친구들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우리의 영성은 예외 없이 밝을 때와 어둘 때충만할 때와 쳐질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서로 영적 리듬이 다른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함께 모여 영적 교제를 나누게 되면 성령의 임재에 더 자주 더 많이 노출될 수 있게 됩니다.

 

(마태15:21~28) 2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이 때 그 지방에 와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나서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제 딸이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하고 계속 간청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그 때에 제자들이 가까이 와서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 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24 예수께서는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하고 말씀하셨다. 2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서 꿇어 엎드려 '주님저를 도와 주십시오하고 애원하였다그러나 26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하며 거절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는 '주님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28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바로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예수님께서 띠로 지방에 가셔서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띠로와 시돈 지방 여인 하나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그리고는 자기 딸이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자기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물론 이 에피소드의 중심 메시지는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폐하신 예수님이 이방인에 대한 차별 또한 철폐하시는 것을 그 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띠로와 시돈 지방 여인이 자신의 딸에게 귀신이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탁을 한 부분과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개라고 부르신 것 그리고 그녀가 그러한 주님의 처사에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개 됨을 인정한 것 등입니다저는 여기에서 귀신이 들린 사람을 둘로 봅니다하나는 정말 귀신이 들린 그 여인의 딸이고 다른 하나는 그 딸의 귀신들림이라는 상태에 의해 불행해 하고 있는 그 띠로와 시돈 지방 여인입니다우리가 서두에 살펴보았듯이 귀신이 들린 자의 삶이라는 것은 하느님 이외의 이 세상 다른 것에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 빼앗기고 있는 상태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따라서 딸이 귀신 들린 것에 의해 행과 불행을 넘나드는 그 여인 또한 귀신들린 상태인 것입니다.

 

(요일2:22) 누가 거짓말장이입니까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이런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이며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라는 것은 예수만이 구세주이시라는 것 즉 예수님만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의 주체이심을 부인하고 다른 세상의 힘들에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수여받는 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것입니다그들이 바로 '거짓말하는 자요 '적그리스도즉 '마귀의 세력이라는 것입니다그 상태를 가리켜 주님은 ’ 라 부르십니다물론 거기에서의 ’ 는 구속사 속에서의 유대인의 선택적 위치에 대조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자에 관한 메시지의 측면에서 그 단어를 이해하게 되면 그 ’ 라는 단어는 하느님과 연합된 자로서의 하느님 자녀 됨을 거부하고 돈 자식 명예 인기 등에 마음을 빼앗긴 아담의 후손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을 그렇게 살다가 갑니다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선택에서 제외된 자들로서의 이방인들을 ’ 라고 부른 것입니다그들은 모두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이 세상의 힘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다가 가야할 존재들이니까요.

그래서 성경이 굳이 이 여인이 이방 여인 가나안 띠로와 시돈 지방 여인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그렇게 도저히 불가능한 자타가 공인하는 ’ 에 불과한 여인이 하느님의 은혜로 메시아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그러자 그 여인이 메시아이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에게 무엇을 부탁하는가 하면 자신이 자신의 딸에게 매어있는 상태를 끊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딸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이 여인은 자신이 딸에게 매어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주님은 그 상태를 ’ 라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그러나 그 여인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자신이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 다른 것에 묶여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 자유스러운 것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입니다성경은 그러한 ’ 의 상태에 있는 여인이 떡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빵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에 보면 이 띠로와 시돈 지방 여인의 에피소드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이 오병이어의 사건이고 바로 뒤이어 나오는 사건이 칠병이어의 사건입니다그것은 이 땅에 하늘의 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형하고 있는 에피소드들이지요그러니까 지금 그 여인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분의 살과 피가 자신에게도 부어져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교회의 대표로 거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주님은 그녀의 믿음에 찬사를 보내십니다메갈레 피스티스’ '메가톤급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칭찬하시는 메가톤급 믿음이란 하느님 이외의 이 세상 다른 것들에 묶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켜 ’ 라 인정하고 귀신 들린 자’ 라는 것을 인정하며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그 분의 빵 되심을 믿는 믿음 뿐임을 알고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그 때 귀신이 나갑니다.

마르코복음에 보면 귀신들렸던 그 여인의 딸이 침상에 누워있었다는 구절이 굳이 들어가 있습니다고대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침상에 눕다’ 는 개념은 종종 죽음’ 을 상징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따라서 그 귀신들렸던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떡 되심의 은혜로 이 세상에 대해 죽어 버린 것입니다그게 축귀(逐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좀 이 ’ 의 처지에서 구해 주세요 하고 간절히 기도를 하십니까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예배를 의지하여 그 ’ 의 삶을 조금씩 몰아내고 계세요우리 스스로 기도를 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의 삶을 살 수가 없거든 그냥 교회가 모이는 자리에 나와서 가만히 앉아 계세요그리고 믿음의 동지들을 자주 만나서 그들의 삶을 듣고 우리의 삶을 나누세요그렇게 우리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조금씩 우리의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성숙은 우리에게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느님을 포착하고 인식하며 그 분의 뜻을 꼭 붙들고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향한 우리의 열심이 반드시 수반 되어야 합니다.

 

(야고4: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하십시오그러면 악마는 여러분을 떠나 달아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용의 세력으로 자꾸 우리를 미혹하려 하는 마귀의 세력을 대적하십시오우리의 대적에 마귀는 우리를 피하여 물러간다고 성경은 분명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베드5:8-9) 8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 다닙니다. 9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악마를 대적하십시오아시다시피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여러분의 교우들도 같은 고난을 다 당해 왔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우는 사자처럼 물려고 달려듭니다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성도간의 교제로 이겨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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