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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안에서만 오로지 의화가 가능하다 1689_ 799_justice 1032_ 1122_ 1250_마지막 아담 히브리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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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ㅣ No.1689

 

 

질문 1: "the rectitude of divine love"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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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질문 1: "the rectitude of divine love"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요?

 

1. 들어가면서

이 글을 작성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1.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는 2014년 6월 29일에 "Homilectic Directory(강론 지침)"이라는 제목을 가진 문헌을 공표하였으며, 이 문헌의 부록 I "강론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에 주어진 가해 연중 제26일 강론의 주제들로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특정 항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댜음의 문장이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
rc_con_ccdds_doc_20140629_direttorio-omiletico_en.html
 

(발췌 시작)
CCC 1807: just person distinguished by habitual rectitude toward others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1:

(1)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807항인데, 특히 영어본과 우리말본에는, 바로 위에 발췌된 문장 중의 "rectitude (라틴어: rectitudo)"라는 용어에 대응하는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된 용어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catechism_lt/p3s1c1a7_lt.htm#ARTICULUS 7  VIRTUTES (라틴어 정본)

(발췌 시작)
1807 Iustitia virtus est moralis quae in constanti et firma consistit voluntate Deo et proximo tribuendi id, quod illis debetur. Iustitia erga Deum ? virtus religionis ? appellatur. Erga homines disponit ad uniuscuiusque observanda iura et ad stabiliendam in relationibus humanis harmoniam quae aequitatem respectu personarum et boni communis promovet. Homo iustus, saepe in Libris Sacris commemoratus, rectitudine distinguitur habituali suarum cogitationum et rectitudine sui agendi modi erga proximum. ? Non consideres personam pauperis nec honores vultum potentis. Iuste iudica proximo tuo ? (Lv 19,15). ? Domini, quod iustum est et aequum servis praestate, scientes quoniam et vos Dominum habetis in caelo ? (Col 4,1).

(이상, 발췌 끝)

 

출처 2: http://www.vatican.va/archive/FRA0013/__P5Z.HTM (프랑스어본)

(발췌 시작)

1807 La justice est la vertu morale qui consiste dans la constante et ferme volonté de donner à Dieu et au prochain ce qui leur est dû. La justice envers Dieu est appelée " vertu de religion ". Envers les hommes, elle dispose à respecter les droits de chacun et à établir dans les relations humaines l’harmonie qui promeut l’équité à l’égard des personnes et du bien commun. L’homme juste, souvent évoqué dans les Livres saints, se distingue par la droiture habituelle de ses pensées et la rectitude de sa conduite envers le prochain. " Tu n’auras ni faveur pour le petit, ni complaisance pour le grand ; c’est avec justice que tu jugeras ton prochain " (Lv 19, 15). " Maîtres, accordez à vos esclaves le juste et l’équitable, sachant que, vous aussi, vous avez un Maître au ciel " (Col 4, 1).

(이상, 발췌 끝)

 

출처 3: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3s1c1a7.htm#1807 
(영어본)

(발췌 시작)

1807 Justice is the moral virtue that consists in the constant and firm will to give their due to God and neighbor. Justice toward God is called the "virtue of religion." Justice toward men disposes one to respect the rights of each and to establish in human relationships the harmony that promotes equity with regard to persons and to the common good. The just man, often mentioned in the Sacred Scriptures, is distinguished by habitual right thinking and the uprightness of his conduct toward his neighbor. "You shall not be partial to the poor or defer to the great, but in righteousness shall you judge your neighbor."68 "Masters, treat your slaves justly and fairly,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69

(이상, 발췌 끝)

 

출처 4: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
110610121307&page=676
 (우리말본)

(발췌 시작)

1807 정의는 윤리적인 덕으로서,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이다. 하느님을 향한 정의를 ‘경신덕’(敬神德, virtus religionis) 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대상으로 할 때는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하고, 사람들에 대한 공평과 공동선을 촉진시키는 조화를 인간관계 안에 확립하도록 하는 것이 정의이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의로운”사람은 사고의 올바름이 몸에 배고 이웃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레위 19,15) . “주인 여러분, 종들을 정당하고 공정하게 다루십시오. 여러분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콜로 4,1)

(이상, 발췌 끝)

 

(2) 바로 위의 제(1)항에서 비교/검토한 바로부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지역 언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발생한 개념 전달 장애 혹은 개념 전달 오류를, 교황청 신앙경신성에서 "강론 지침"을 통하여 간접적인 방법으로, 교정하고자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상, 게시자 주 1-1 끝)

 

1-2.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소장중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발행된 바로 위의 제1-1항에서 말씀드린 문헌의 우리말 번역본에 주어진,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문장의 우리말 번역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췌 시작)
교리서 1807: 이웃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밴 '의로운' 사람

(이상 발췌 끝)

 

1-3. 또 다른 한편으로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위의 제1-1항에서 말씀드린 문헌의 번역 대본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다음의 두 나라 언어본들뿐입니다:

 

Homiletic Directory (29 June 2014)
[English, Italian]

 

 

출처 1: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
rc_con_ccdds_doc_20140629_direttorio-omiletico_en.html
(영어본)


출처 2: ?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
rc_con_ccdds_doc_20140629_direttorio-omiletico_it.html
(이탈리아어본)  

 

1-4. 위의 제1-1항의 영어 문장과 제1-2항의 우리말 번역문을 언뜻 비교/검토하더라도, 우리말로의 번역 작업시에,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한 것이 아니고,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habitual rectitude"라는 표현이 전후의 문맥 안에서 독자들에게 일관성있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FAJ.HTM 

3 rectitude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본문 중의 세 개의 항들, 즉, 제415항, 제1991항, 그리고 제2518항에서 "rectitude(라틴어: rectitudo)"로 일관성있게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되고 있는 하나(one)의 용어가,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해당 항들에서 서로 다르게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이 된 것을, 즉, 다음의 차이점들

 

Although set by God in a state of rectitude men ... (영어본 CCC 제415항),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 (우리말본 CCC 제415항);

 

the rectitude of divine love(영어본 CCC 제1991항),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우리말본 CCC 제1991항);

 

sexual rectitude(영어본 CCC 제2518항),

올바른 성생활(우리말본 CCC 제2518항)

 

을 고려하고, 그리고 또한 

 

영어본 교리 교육 총지침서 제157항에서의 한 개의 문장,

 

출처 1: http://www.intratext.com/IXT/ENG0159/__P2T.HTM

출처 2: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lergy/documents/
rc_con_ccatheduc_doc_17041998_directory-for-catechesis_en.html
 

(발췌 시작)

157 [...] In catechesis, therefore, subjects take on a commitment in activities of faith, hope and charity, to acquire the capacity and rectitude of judges, to strengthen their personal conversion, and to a Christian praxis in their lives. [...]

 

157 [...] 그러므로 교리 교육에서 주제들은, 판단에 있어서의 능력 및 [당사자의 영혼에 성화 은총에 의하여 형성된]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을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서 가지도록(acquire) 하기 위하여, 그들의 인격적(personal) 윤리적 변화/회심(conversion)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들의 삶들 안에서 어떤 그리스도인의 실천(praxis)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덕(faith), 망덕(hope) 그리고 애덕(charity)[즉, 향주삼덕(向主三德)들]의 활동들 안에 있는 어떤 헌신을 다루기 시작합니다(take on).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졸번역 끝)

 

우리말본 교리 교육 총지침서 제157항에서, 다음과 같이, 정도가 지나치게 의역 번역된, 그리고 번역 오류들이 있는, 문장으로 번역된 것을

 

(발췌 시작)

157 [...] 따라서 교리 교육 대상자들이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활동에 투신하는 것은 판단의 능력과 정확성을 기르고 개인의 회개를 굳게 하며 신앙의 삶을 실천하려는 것이다. [...]

(이상, 발췌 끝)

 

을 또한 고려할 때에,

 

"rectitude" 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적 의미가, 여태까지, 언어 장벽 혹은 문화 장벽 때문에, 국내 및 한문 문화권의 가톨릭 지역 교회들 안쪽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 끝에,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게시자 주 1:

(i) 초자연덕들인 향주삼덕들 중의 하나인 "hope"를, "희망(hope, 망덕)"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바람"으로 번역한 것, (ii) "conversion"을, "회심/윤리적 변화"로 번역하는 대신에, "repentance"의 번역 용어인 "회개"로 번역한 것, 그리고, (iii) 이번 항에서 함께 살펴보았듯이, "rectitude"의로움, 공정함, 올바름, 혹은 정확성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한 것은, 번역 오류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특히 교리 교육 총지침서 제157항에서의  "rectitude of judgment (rettitudine di giudizio, rectitude de jugement)"의 경우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i) "판단의 의로움", "판단들 공정함", "판단의 올바름", 그리고 "판단의 정확성" 중의 어느 번역 표현도 전후 문맥 안에서 그 적절성에 있어 우열을 가릴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ii)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판단은 당연히, 마땅히 의로워야(just, righteous) 하고, 마땅히 공정해야(fair) 하고, 마땅히 올바라야(right) 하고, 그리고 마땅히 정확하여야(correct) 하기 때문에어법적 혹은 수사학적 번역 오류가 아닌 어떤 종류의 번역 오류가 여기에 또한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다.

 

(3) 무슨 말씀인고 하면, 어떤 속(屬)적 개념(generic/general concept)을 나타내는 "rectitud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 속적 개념의 일부 종(種)적 개념(special concepts)들을 형이상학적으로(metaphysically)/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떄문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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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 지적과 관련하여, 예를 들어, 다음을 읽도록 하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최근 2주 동안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회복하고자(restore) 노력하였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이라는 용어의 속(屬)적 정의(definition)바로 아래의 (ii)[즉, 반대 14에 대한 답변 중의 제(ii)항]에 간략하게 주어져 있다는 생각이다. 아래의 제4-1항에 제시된 문장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출처: https://isidore.co/aquinas/QDdeVirtutibus.htm  

(발췌 시작)

[In the absence of Thomas’s response to the remaining objections, Vincent de Castro Novo, O.P. supplied the following responses.]

 

[나머지 반대들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답변의 부재(absence) 때문에, Vincent de Castro Novo, O.P (주: O.P.: 도미니코 수도회)께서 다음과 같은 답변들을 제공하였습니다.]

 

Ad 14. It should be said that rectitude is of two kinds. There is one which is special and is constitutive with reference to external things which come into man’s use and are the proper matter of justice. There is another that is general and implies an order to the fitting end and to divine law, and this is common to every virtue and enters into the definition of virtue.

 

반대 14에 대한 답변.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이 두 종류(kinds)들에 대한 것임이 마땅히 말해져야 합니다. (i) 그 하나는 종(種)적이고(special) 그리고, 사람의 사용 안쪽으로 들어오며 그리고 [사추덕(four cartinal virtues)들 중의 한 개의 윤리덕(a moral virtue)인] 정의/의로움(justice)의 고유한 질료(matter)인, 외부의 사물들에 대한 언급과 함께 구성 요소가 되는(constitutive with) 바로 그러한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입니다. (ii) 또다른 하나는 속(屬)적이고(general) 그리고 적합한 끝(the fitting end) 쪽으로 및 신법(divine law)쪽으로 어떤 질서/순서(an order)를 의미하며(implies), 그리하여 바로 이것이 모든 덕(virtue)에 공통이고 그리하여 덕의 정의(definition) 안쪽으로 들어오는[즉, 수용되는(受容)/받아들여지는(accepted)], 바로 그러한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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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4) 1997년에 확정된 라틴어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rectitudo"와 이 단어의 파생서들을 직접 찾아보는 것은, 라틴어 단어의 어미 변화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데, 이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다음의 주소에 안내된,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색인을 먼저 들여다 본 후에, 확보되는 항들의 번호들에 근거하여, 또한 다음에 안내된, 라틴어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의 해당 항들을 찾아 보는 것을 권고드린다:

 

http://www.intratext.com/IXT/FRA0013/1/JO.HTM (프랑스어본 CCC의 용어색인에서, rectitude 라는 용어가 사용된 총 10개의 항들은 다음과 같음:

제30항, [제415항은 이 용어색인에 나열되지 않음], 제1780항, 제1805항, 제1807항, 제1991항, 제2464항, 제2468항, 제2518항, 제2763항, 제2764항)

 

http://ch.catholic.or.kr/pundang/4/catechism_lt_index.htm (라틴어 정본 CCC)

 

(5) "rectitudo"와 이 단어의 파생어들이 사용된 라틴어 정본 및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의 다수의 항들에 대응하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의 항들에서, 직역 번역을 하여 "rectitude"를 사용하지 않고, "sound (제30항)" "righteousness(제1805항)", "uprightness(제1780항; 1807항; 제2464항; 제2468항)", "rightly(제2763항)", "rightness(제2764항)" 등으로, 속(屬)적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를, 개별적 혹은 종(種)적으로 번역을 한 것은, key word를 근거로 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또다른 한 종류의 번역 오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 게시자 주 1 끝)

 

2.

우선적으로, 이번 항에서는, "rectitude"라는 용어의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의 용례(examples)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다음에 나열된 파란색 글자들를 클릭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라틴어본 원문과 영어본 본문 중에서 "rectitude (라틴어: rectitudo)" 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항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rectitude" site:isidore.co/aquinas/summa

 

"rectitude of justice" (rectitudinem iustitiae)

 

"rectitude of the primitive state (rectitudo primi status)" 

 

"rectitude of natural love (rectitudo naturalis dilectionis)" 

 

"rectitude of hope" 

 

"rectitude of charity and virtue (rectitudo caritatis et virtutis)" 

 

"rectitude of judgment (rectitudinem iudicii)" 

 

"rectitude of life" (rectitudinem habet, rectitudine vitae)

 

"rectitude of the Christian faith" 

 

"practical rectitude" 

 

"rectitude of reason" 

 

"rectitude of human reason (rectitudo rationis humanae)" 

 

"rectitude of the practical reason (rectitudo rationis practicae)"

 

"rectitude of the appetite (rectitudinem appetitus)" 

 

"rectitude of the will"

 

"rectitude of virtue" 

 

"rectitude of knowledge" 

 

"rectitude of counsel" (rectitudini consilii)

 

"rectitude of discretion (rectitudo discretionis)" 

 

"rectitude of the mind (rectitudo animi)" 

 

"moral rectitude" 

 

"rectitude of their government" 

 

"rectitude of the will and of the deed"

 

"internal rectitude (interioris rectitudinis)"

 

"rectitude of order (rectitudinem ordinis)"

 

2-2. (중간 결론 1) 그런데 다음의 발췌문은, "rectitude[[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정의(正義)(justitia)"로 불리는 한 개의 덕(a virtue)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058.html 

(발췌 시작)
Justice is the same as rectitude, not essentially but causally; for it is a habit which rectifies the deed and the will.

 

정의(正義)(justice, justitia)가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과.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인과적으로(casually) 동일한데, 이는 정의(正義)(justice, justitia)가, 행동(the deed) 및 의지(the will, 즉, 지성적 욕구, 즉, 이성적 욕구)를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에 부합하도록(conform)] 교정하는(rectifies), 한 개의 습관(a habit)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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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여기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rectitude"'[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받아들여진 올바름(rectitude)'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다.

 

(2) 그리고 여전히 여기서 말하는 "이 올바름"이 "본질적으로(essentially) 어떠한 내용"을 의미하는지는, 또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회복된(restored), "rectitude"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 제시된, 아래의 제4항에서 디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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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3. 다른 한편으로, 다음에 나열된 주소들을 클릭하면,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문헌들 중에서 "rectitude" 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문헌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rectitude" site:vatican.va

 

"rectitude of divine love"

 

"rectitude of intention"

 

"rectitude of moral life" 

 

"rectitude of Christ"

 

"rectitude of life"

 

"rectitude of intention"

 

"rectitude of intentions"

 

"rectitude of spirit"

 

"rectitude of heart and mind"

 

"rectitude of conscience"

 

"rectitude of will"

 

"rectitude of judges"

 

"rectitude of reason"

 

"rectitude of action"

 

"the rectitude of their feelings and of their morals

 

"intellectual and moral rectitude"

 

(중간 결론 2)  이상 함께 고찰한 바로부터 우리는, "rectitude"라는 용어가 그리스도교 교회 내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한 개의 그리스도교 교회의 용어임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3.

이번 항에서는, 세속의 사전들 등에 주어진 "rectitude (라틴어: rectitudo)" 라는 단어의 의미를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3-1. 라틴어 단어 "rectitudo"에 대한 라틴어 사전에 주어진 설명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www.perseus.tufts.edu/hopper/morph?l=rectitudo&la=la#lexicon

 

특히, Merriam-Webster Dictionary에 다음과 같이 설명된, "directness" 라는 언급이 위의 라틴어 사전에 "rectitudo"라는 단어의 설명 중에 주어져 있음에 크게 주목합니다:

 

출처: http://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directness 

(발췌 시작)
directness

 

1. the character of being accurate in course or aim

1. 과정 혹은 목표에 있어 적확(的確)함이라는 특성을 말한다.

 

2. strict pertinence

2. 엄밀하게 적절(適切)을 말한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2. 다음은 Webster's Dictionary 1828년 에 주어진 "rectitude"에 대한 사전적 설명입니다만, 그러나 이 설명은, 예를 들어, 위 제2-1항제2-3항에 제시된 다양한 문맥 안에서의 용례들에 일관성있게 대체할 수 없는, 어떤 부수적(accidental) 혹은 종(種)적(special) 설명들이라는 생각이며, 따라서 이 단어의 정의(definition)로서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webstersdictionary1828.com/Dictionary/rectitude 

(발췌 시작)

REC'TITUDE, noun [Latin rectus, right, straight.]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받아들여진 올바름(rectitude), 명사 [라틴어 rectus, right, straight.]

 

In morality, rightness of principle or practice; uprightness of mind; exact conformity to truth, or to the rules prescribed for moral conduct, either by divine or human laws.

 

윤리/윤리성(morality)에 있어, 원리 혹은 실천의 올바름(rightness); 마음의 곧음(uprightness); 신법들 혹은 인정법(divine or human laws)들 둘 중의 하나에 의하여, 진리 쪽으로, 혹은 윤리적 품행/행실을 위하여 규정된 규칙들 쪽으로, 정확한 일치/부합(conformity)을 말합니다.

 

rectitude of mind is the disposition to act in conformity to any known standard of right, truth or justice; rectitude of conduct is the actual conformity to such standard. Perfect rectitude belongs only to the Supreme Being. The more nearly the rectitude of men approaches to the standard of the divine law, the more exalted and dignified is their character. Want of rectitude is not only sinful, but debasing.

 

마음(mind)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mind)은 올바름(right), 진리(truth) 혹은 정의(justice)에 대한 어느 알려진 표준/기준(standard) 쪽으로 일치/부합(conformity)에 있는 행위(act) 쪽으로 성향을 말하며, 행실/품행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conduct)는 그러한 표준/기준 쪽으로 현실태적(actual) 일치/부합을 말합니다. 완미한(perfect)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은 지고의 존재(the Supreme Being, 즉, 하느님)께만 오로지 속합니다. 사람들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이 신법(the divine law)의 표준/기준 쪽으로 더 많이 접근할수록, 그들의 품성(character)은 더 많이 찬양받게 되고(exalted) 그리고 품위있어 보이게 됩니다(dignified).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의 결핍/부족(want)은 단지 죄[즉, 윤리적 악(moral evil)]가 있는(sinful) 것만이 아니고 또한 품위를 떨어뜨립니다(debasing).

 

There is a sublimity in conscious rectitude - in comparison with which the treasures of earth are not worth naming.

 

의식하는(conscious)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에는, 세속의 보물들이 그것과 비교하여 몀명할 가치 조차 없는, 어떤 숭고함(a sublimity)이 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3.

3-3-1.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다음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는 "rectitude"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rdict.htm

 

3-3-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Modern Catholic Dictionary의 저자인 Hardon 신부님의 글 중에서, "rectitude" 라는 용어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아래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Justice 에 대한 설명을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archives/Grace/Grace_003.htm

 

바로 위의 출처에 주어진 "Justice(Justitia)" 에 대한 설명에서, (i) (rectitude) [예를 들어, 세례 시에 세례를 받는 자의 영혼 안쪽에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되는(infused) 상존(常存) 은총(habitual grace)] 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이, 당사자의 영혼 안쪽에 존재하게 되는/형성되는 바로 이 "rectitude"의 한 원리(a principle of rectitude)이며, 그리고 바로 이 "rectitude"에 의하여 당사자의 영혼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초자연적으로 올바르게(supernaturally right)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Sanctifying grace is a principle of rectitude within his soul: by it his soul is supernaturally right with God.] 

 

이와 같이 당사자의 영혼 안쪽에 "rectitude"의 형성 이후에, 즉, 교정된(being rectified) 이후에, 즉, 의화된(being justified) 이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계속됩니다:

 

(발췌 시작)

 His mind (through faith) is right with God, not just with the God of the universe, of nature, but with the Triune God of faith. That is why it is easier for a sinner to come back: the virtue of faith is still in him. A picture of Christ on the Cross can be a most powerful motive, moving him to contrition. And as faith orientates the mind toward the "inside" of God, the essence of God and the Trinity of Persons, so the infused virtue of charity makes the will right, rightly orientated for loving the Triune God.

 

당사자의 마음(mind)은 (믿음/신덕/신앙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올바르게 되는데, 단지 자연의, 우주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만이 아니고, 신앙(faith)의 성삼위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올바르게 됩니다. 다음의 이유가 왜 한 명의 죄인이 되돌아 오는 것이 더 쉬운 이유입니다: 신뢰/믿음이라는 덕(the virtue of faith)이 여전히 그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십자가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즉, 십자고상(十字苦像)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자를 통회(contrition) 쪽으로 움직이는, 한 개의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ii) (credere Deo) 신뢰/믿음(faith)이 그자의 마음(mind)을, 하느님의 본질이며 그리고 거룩한 위격들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안쪽(inside)"을 향하여 지향하게(orientates) 함에 따라,

(iii) (credere in Deum) 또한 주입되는 애덕(愛德)이라는 덕(the virtue of charity)이, 그자의 의지(the will)를 올바르게, 성삼위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하고자 올바르게 지향하게 되도록(orientated), 만듭니다.

 

Sanctifying grace, then, in making us just, gives us a basic supernatural rectitude, a deep-down orientation and inclination to an all-virtuous life. We sometimes think it would have been convenient if God had put it "nearer the surface," so to speak. For persons and things around us often pull us strongly away from right action, We have adequate principles of right action deep within us, it is true, but we are very much affected by persons and things, and do not always act rightly. Our first aim, then, is always to act rightly. But a much higher degree of perfection would be not merely to do the right action, but to do it perfectly in God’s way and at God’s time, by habitually following the lead of the Holy Spirit drawing us through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i)' (rectitudo) 성화 은총은, 그러니까(then), 우리들을 의롭게(just) 만듦[즉, 의화됨(justified)]에 있어, 어떤 전적으로 덕이 있는 삶 쪽으로 한 개의 깊숙히 아래에 있는(deep-down) 방향성(orientation) 및 기울어짐(inclination)인, 한 개의 기본적 초자연적 rectitude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느님께서 이것을, 말하자면, "더 표면 가까이에" 놓아 주셨더라면 더 간편할 것일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사물들이 자주, 올바른 행동(right action)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강하게 우리들을 잡아 당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안쪽 깊은 곳에 올바른 행동의 적절한 원리(adequate principles)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cf. '믿음'(faith)이라는 용어의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정의된(defined),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2항],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과 사물들에 의하여 대단히 크게 영향을 받게 되어, 그리하여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iv) 그러나 완미(完美)[perfection, 즉, 완전함(completeness) 및 흠/결함 없음]에 있어서의 어떤 훨씬 더 높은 등급은 단지 올바른 행동을 실행하는 것만이 아니고, 성령의 선물들[즉, 성령칠은(聖靈七恩)(칠십인역 이사야 11,1-2)들 및 성령의 은사(charismata)들(1코린토 제12장)]을 통하여 우리들을 잡아 당기고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습관적으로(habitually) 뒤따름으로써, 하느님의 방식(way)으로 및 하느님의 때(time, 즉, kairos)[즉, 하느님께서 일을 하시는 때(at the time of Opus Dei, 즉, 오푸스 데이의 시점)]에 이 행동을 완미(完美)하게[perfectly, 즉, 완전하게(completely) 그리고 흠/결함 없이] 실행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3-2: 위의 설명에서도 "rectitud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 명확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다.

 

3-3-3.

 

출처: https://www.ewtn.com/library/Theology/grace10.htm

 

3-4. 그런데, 바로 위의 제3-3항에 주어진 설명과는 전적으로 달리, 정말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예들 들어, 다음에 있는 개신교 측의 "Holman Bible Dictionary""rectitude" 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전혀 주어지지 않은 점입니다:

 

출처: http://www.studylight.org/dictionaries/hbd/browse.cgi?pn=2&l=r

 

질문 2: 바로 위의 제3-3-2항에 대응하는 혹은 해당하는 설명이, "은총(grace)만으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개신교 측 문헌의 어디에 제시되어 있는지요?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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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은총(grace)"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제목: 은총의 정의(definition)와 고유한 역할, 교회의 고유한 역할]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5.htm <----- 필독 권고

 

또한 다음의 글 [제목: 영원한 구원에 필수적인 하느님의 도움들 두 개 - 법과 은총]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2.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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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내용 추가 끝]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는 이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며, 따라서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4-1. (중간 결론 3)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4에 주어진 설명에 근거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회복한(restore) "rectitud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0.htm

(발췌 시작)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받아들여진 올바름(rectitude)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을 말합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4-1: 따라서,

(1) "rectitude"라고 불리는 올바름은, 당사자의 고유한 그 무엇을 출처/기원으로 하는 올바름이 결코 아니고, 적어도 3자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한 말단(a term)인 하느님 혹은 다른 자의 일(work/labor)에 의하여, 즉, 당사자의 영혼에 받아들여진(accepted) 한 주체에 의한 교정(rectification)의 과정을 거쳐서 당사자의 영혼에 형성되는(formed), 따라서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받아들여진마지막 끝(the last end) 쪽으로 과정 혹은 목표에 있어 적확(的確)함(위의 제3-1항에 발췌된 라틴어 단어 설명 참조)을 말하는 것임에 반드시 주목하도록 하라.

 

(2) 바로 위의 제(1)항에서 지적한 바는, 개신교 측의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의 정의(definition)에서 "개인의 의로움/올바름(righteousness)"이, 바로 위의 제3항에서처럼,  성화 은총을 통한 하느님의 일(Opus Dei, 오푸스 데이)에 의하여 당사자의 영혼에 수용(受容)된/받아들여진 의로움/올바름이라고 전혀 언급되지 않음을 또한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함에 주목하라.

(이상, 게시자 주 4-1 끝)

 

4-2.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근거하여, 이번 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가 서술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을 더 구체적으로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의 가르침과 교리적으로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제4-2-1항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15항이 가르치는 바를 먼저 읽은 후에, 그런 다음에 제4-2-2항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이 가르치는 바를 읽도록 하십시오.

 

게시자 주 4-2: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본문 중에서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항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LD.HTM 

 

특히,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정의(definition) 전반에 걸쳐,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의 가르침에 따라, 초자연적 도움인 은총(grace)으로 시작하여 은총으로 끝나는, CCC 제1989항부터 제1996항까지 꼭 읽도록 하십시오.

 

4-2-1.  

Although set by God in a state of rectitude man ... (영어본 CCC 제415항),

(발췌 시작)
415 "Although set by God in a state of rectitude man, enticed by the evil one, abused his freedom at the very start of history. He lifted himself up against God, and sought to attain his goal apart from him" (GS 13 § 1). 

 

415 "사람[즉, 아담]은, 비록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즉, 원 의로움(original righteousness)]의 한 상태로 하느님에 의하여 설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the evil one)에 의하여 유혹을 받아, 역사의 바로 그 시작에서 자신의 자유로움(freedom)을 남용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에 반하여 위로 들어 올렸으며,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고자 시도하였습니다" (GS 13 § 1).

 

415 "사람[즉, 아담]은, 비록,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the last end)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하느님으로부터]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rectitude)[즉, 원 의로움(original righteousness)]의 한 상태로 하느님에 의하여 설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the evil one)에 의하여 유혹을 받아, 역사의 바로 그 시작에서 자신의 자유로움(freedom)을 남용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에 반하여 위로 들어 올렸으며,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GS 13 § 1).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4-2-2: 바로 위에 제시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우리말 졸번역문과, 바로 아래에 발췌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 번역문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이, 얼마나 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 (우리말본 CCC 제415항); <----- 이 표현에는 명백한,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가 있습니다.

 

(발췌 시작)
415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312)

(이상, 발췌 끝) 

 

바로 위의 발췌문에서, "의롭게"가 수식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예를 들어, (i) 하느님께서 인간의 창조를 "의롭게" 하셨음을 말하는지, 혹은 (ii) 하느님에 의하여 인간이 "의롭도록" 창조되었음을 말하는지, 결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iii) 심각한 문제는, 이들 두 경우들 모두에 있어, "의롭다"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문제가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4-2-2.  

the rectitude of divine love(영어본 CCC 제1991항),

 

신성(神性)적 사랑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신성(神性)적 사랑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가,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the last end)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우리말본 CCC 제1991항); <----- 이 표현에는 명백한,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가 있습니다.

 

게시자 주 4-2-2:

(i) 바로 이 "신성(神性)적 사랑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1)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을, 즉, 신성(神性)적 사랑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가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the last end)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성부(the Father)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2)의 수용(受容)(#2)이라는 올바름"을, 가지셨고, 그리고
(ii) 또한 "이러한" 성부 하느님의 명령에 완미하게(perfectly) 순종함으로써 바로 이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을 몸소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하고 계신 분이,

바로 십자고상(十字苦像)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루카 복음서 23,47에서 백인대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발췌 시작)

(루카 복음서 23,47)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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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인성(人性)적 사랑(human love)"용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 및 차이점들은 다음의 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2) 게시자 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 amour divin)이,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서 13,34(diligatis).35(dilectionem; 15,12(diligatis).17(diligatis); 로마 13,8(diligatis); 1테살로니카 4,9(diligatis); 1요한 3,11(diligamus).23(diligamus); 4,7(diligamus, diligit).11(diligere).12(diligamus); 2요한 1,5(diligamus)]라는 새 규범(precept)인,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 드러내어진 바로 그 사랑/사랑 행위[라틴어: dilectio, 프랑스어: dilection, 영어: dilection]가, (i)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the last end)[즉, 인류의 구원]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성부(the Father)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 그리고 (ii)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이 명령 받음의 수용(受容)", 이들 둘 다에 대한 대단히 잘 요약된 서술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09항에 제시되어 있다:

 

출처 1: http://www.vatican.va/archive/FRA0013/__P1L.HTM#609

Jésus épouse librement l’amour rédempteur du Père

 

609 En épousant dans son cœur humain l’amour du Père pour les hommes, Jésus " les a aimés jusqu’à la fin " (Jn 13, 1) " car il n’y a pas de plus grand amour que de donner sa vie pour ceux qu’on aime " (Jn 15, 13). Ainsi dans la souffrance et dans la mort, son humanité est devenue l’instrument libre et parfait de son amour divin qui veut le salut des hommes (cf. He 2, 10. 17-18 ; 4, 15 ; 5, 7-9). En effet, il a librement accepté sa passion et sa mort par amour de son Père et des hommes que Celui-ci veut sauver : " Personne ne m’enlève la vie, mais je la donne de moi-même " (Jn 10, 18). D’où la souveraine liberté du Fils de Dieu quand il va lui-même vers la mort (cf. Jn 18, 4-6 ; Mt 26, 53).

 

출처 2: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22a4p2.htm#609

(발췌 시작)

Jesus freely embraced the Father's redeeming love


예수님께서 성부의 속량하시는 사랑을 자유롭게 수용(受容)하셨습니다/받아들이셨습니다

 

609 By embracing in his human heart the Father's love for men, Jesus "loved them to the end", for "greater love has no man than this, that a man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425 In suffering and death his humanity became the free and perfect instrument of his divine love which desires the salvation of men.426 Indeed, out of love for his Father and for men, whom the Father wants to save, Jesus freely accepted his Passion and death: "No one takes [my life]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427 Hence the sovereign freedom of God's Son as he went out to his death.428

 

60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한 성부의 사랑(amour)당신의 인간 심장(his human heart)(##1) 안에 수용(受容)하심으로써,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셨는데" (요한 복음서 13,1),(##2) 이는 "벗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amour)은 없기" (요한 복음서 15,13) 때문입니다. 고통 받음과 죽음 안에서 당신의 인성(humanity)은, 사람들의 구원을 욕망하는(desire), 당신의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 amour divin)의 자유롭고 그리고 완미한(perfect) 도구(instrument)가 되셨습니다 (히브리 2, 10.17-18; 4,15; 5,7-9을 참조하라). 정말로, 성부(Father)를 위한(for) 그리고 성부께서 구제하고자(save) 원하시는 사람들을 위한(for), 당신의 사랑[즉, 당신의 신성(神性)적 사랑]에서 유래하여(out of),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다음과 같이 자유롭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요한 복음서 10,18). 따라서 당신께서 자신의 죽음 쪽으로 나아가셨음 처럼(as) 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의 제한 없는 권위을 가지는 자유로움(sovereign freedom) (요한 복음서 18,4-6; 마태오 복음서 2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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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1) 영어로 "his human heart"로 번역되는 표현을, "당신의 인간 심장"으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을 하는 대신에, 다음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09항에서처럼, "당신의 마음"으로 잘못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의(敎義) 신학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
path=110610121307&page=264
 

 

(2) 그리고 바로 이 심각한 번역 오류의 지적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5_heart.htm <----- 추가 읽을꺼리

 

(##2) 번역자 주: 바로 이 서술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 amour divin)의,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서 13,34(diligatis).35(dilectionem; 15,12(diligatis).17(diligatis); 로마 13,8(diligatis); 1테살로니카 4,9(diligatis); 1요한 3,11(diligamus).23(diligamus); 4,7(diligamus, diligit).11(diligere).12(diligamus); 2요한 1,5(diligamus)]라는 새 규범(precept)인,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 드러내어진 바로 그 사랑/사랑 행위[라틴어: dilectio, 프랑스어: dilection, 영어: dilection]의, 올바름/진리(rectitude, truth)"이 "그리스도의 인간 심장 안에 수용(受容)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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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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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 결론 4)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의 첫 두 문장들이,

 

CCC 1991 Justification is at the same time the acceptance of God's righteousness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Righteousness (의로움, justitia) (or "justice") here means the rectitude of divine love. With justification, faith, hope. and charity are poured into our hearts, and obdience to the divine will is granted us.

 

논리적 등가로, 다음을 말함을 알 수 있습니다:

 

CCC 1991 (a)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는, 동시에,

(CCC 1991, a-i) 하느님의 "의로움(justitia, righteousness)"을, 즉,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09항에 대단히 잘 서술된, 그리스도의 인간 심장(Christ's human heart) 안에 수용(受容)된,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바로 이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 amour divin),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서 13,34(diligatis).35(dilectionem; 15,12(diligatis).17(diligatis); 로마 13,8(diligatis); 1테살로니카 4,9(diligatis); 1요한 3,11(diligamus).23(diligamus); 4,7(diligamus, diligit).11(diligere).12(diligamus); 2요한 1,5(diligamus)]라는 새 규범(precept)인, 예수님의 새 계명(#0)에서 드러내어진 바로 그 사랑/사랑 행위[라틴어: dilectio, 프랑스어: dilection, 영어: dilection]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rectitude)[게시자 주 4-2-2에 발췌된 루카 복음서 23,47 필히 참고]"을,

(CCC 1991, a-ii)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신뢰/믿음(즉, 예를 들어, 구약 시절 유다인들의 믿음인, 초자연덕이 아닌 믿음, credere Deo)[fidem(라틴어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trust, faith, confidence, reliance(라틴어 사전)]을 통하여, 그리고 세례(Baptism)를 통하여,

우리가, 또한 우리의 인간 심장(our human hearts)들 안에, 받아들임/수용(受容)함을 말합니다.(#1)

 

      그리고 그런 다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의 세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CCC 1991, b)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와 함께, [초자연덕들인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을 구성하는] 신덕(faith, 믿음), 망덕(hope, 희망), 그리고 애덕(charity, 사랑)우리의 심장(our hearts)들 안쪽에 부어 넣어지며,(#2) 그리하여 신성(神性)적 의지(the divine will) 쪽으로 순종(obedience)이 우리들에게 허락됩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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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게시자 주:

(1)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다음에 있는, 자신의 "십계명 해설"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새 계명"신성(神性)적 사랑의 법(the law of divine love)"이라고 부르고 있다:

https://isidore.co/aquinas/TenCommandments.htm  

https://aquinas.cc/en/1014/~DecemPrae 

 

그리고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글에서는, 또한 다음이 성립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랑의 법(the law of love)" = "애덕과 은총의 법(the law of charity and grace)" = "복음의 법(the law of the Gospel)" = "그리스도의 법(the law of Christ)"(갈라티아 6,2)

 

(2)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다음에 있는, 자신의 "십계명 해설"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해지고 있는 한 개의 요약된 법(an abridged law)이란, 요한 복음서 13,34(diligatis).35(dilectionem; 15,12(diligatis).17(diligatis); 로마 13,8(diligatis); 1테살로니카 4,9(diligatis); 1요한 3,11(diligamus).23(diligamus); 4,7(diligamus, diligit).11(diligere).12(diligamus); 2요한 1,5(diligamus)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새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를 말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이 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70항을 또한 반드시 읽도록 하라:

 

출처: http://isidore.co/aquinas/TenCommandments.htm [서문]

(발췌 시작)

But it is clear that not all can sweat away to gain knowledge. Therefore Christ gave an abridged law which all can know, and no one can be excused from observing it because of ignorance. And that is the law of divine love.

 

그러나 모든 이들이 지식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땀을 흘릴(sweat away)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는, 그리고 무지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지키는 행위로부터 면제될 수 없는, 한 개의 요약된 법(an abridged law)을 그리스도께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신성적 사랑의 법(the law of divine love)[주: 달리 말하여, 신성적 사랑을 [당신이 우리들에게 행하셨듯이, 서로에게] 실천하라는 예수님의 뜻/의지가 예수님에 의하여 직접 표명된/정식화된 법, 즉, "예수님의 새 계명"]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다음에 있는, 자신의 "십계명 해설"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바로 "rectitude of divine love"정의(definition)에 어떤한 내용이 주되게 포함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출처: http://isidore.co/aquinas/TenCommandments.htm [서문]

(발췌 시작)

But it should be realized that this law must be the rule of all human acts. We see that manufactured goods are good and right when they measure up to a standard. So also any human work is right and virtuous when it harmonizes with the standard of divine love, and when it is out of tune with this standard it is not good or right or perfect. For human acts to be good, they must harmonize with the standard of divine love.

 

그러나 바로 이 법이 인간의 행위(human acts)들 모두의 규칙(rule, regula)임이 틀림이 없는 것이 마땅히 알아차려져야 합니다. 제조된/생산된 재화(goods)들이, 그들이 한 개의 기준/표준(a standard)에 달할(measure up to) 때에, 선(good)하고 그리고 올바른(right, rectum) 것임을 우리가 봅니다. 그래서 또한 임의의 인간의 일(human work)도, 그것이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이라는 기준/표준(standard, regulae)과 조화를 이룰(harmonize with) 때에, 올바르고(right, rectum) 그리고 덕이 있으며(vkrtuous),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기준/표준으로부터 벗어나(out of tune) 있을 때에, 그것은 선하지도(good) 않고 그리고 올바르지도(right, rectum) 않으며 그리고 완미하지(perfect)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들이 선하기(good) 위하여서는, 이 행위들은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이라는 기준/표준(standard, regulae)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그런데, 인간의 행위들이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기준/표준(standard, regulae)과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우선적으로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의지(the will) 안쪽으로 바로 이 기준/표준(standard, regulae)이, 올바름/진리(rectitude)로서, 그 순서/질서(order)에 있어 반드시 그리고 당연히 제일 먼저 수용(受容)되어야/받아들여져야 을 인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위의 제4-1항에 제시된 "rectirud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s)를, 여러 번 그리고 천천히, 반복하여, 다시 읽도록 하십시오.

 

(4) 이제, 다음과 같이 여러 이름들을 가진 "새 법(the New Law)""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 amour divin)의 행위 안에서만 오로지 가능함/있을 수 있음을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70항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970항에서 발췌한 다음의 문장은,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 amour divin)을 할 것을 명령하는 새 규범(precept), 예수님의 새 계명 안에서만 오로지, "그리스도 쪽으로 믿음/신뢰를 통하여 열심 신자들에게 제공되는, 성령의 은총인, 한 개의 사랑의 법(a law of love)이라고 불리는(CCC 제1972항), 한 개의 은총의 법(a law of grace)이라고 불리는(CCC 제1972항)한개의 자유로움의 법(a law of freedom)이라고 불리는(CCC 제1972항)복음의 법, 즉, 새 법[the New(kainos) Law, 즉, 옛 법(the Old Law)보다 질적으로 더 우수한 법]"가능함/있을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3s1c3a1.htm#1970 

(발췌 시작)

CCC 1970 [...] The entire Law of the Gospel is contained in the "new commandment" of Jesus, to love one another as he has loved us.

 

CCC 1970 [...] 복음의 법 전체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 15,12; 13,34 참조).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1) 게시자 주:

(1) 그런데, "the rectitude[이 수용(受容)된 올바름]"라는 언급이, 예를 들어, 교회의 박사성 베다 가경자(St. Bede Venerable, 672-735년)마르코 복음서 8,34-38에 대한 주석에서 이미 주어졌음에 주목하라.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Bede" 의 주석에서 발췌된 다음의 표현을 읽도록 하라:

 

출처: http://isidore.co/aquinas/CAMark.htm#8 

(영문본 발췌 시작)

the rectitude which we preserve in our hearts

 

우리의 심장들 안에 우리가 보존하고 있는 이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 더 나아가,  "the rectitude[[판단 및 절차에 있어] 이 수용(受容)된 올바름]"이, 사실은, 적어도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에게까지 거슫러 올라감에 대한 서술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plato.stanford.edu/entries/practical-reason-med/ 

 

참고 자료: "rectitude" "practical principles" "practical reason" "Aquinas" "Augustine"

 

(#2) 게시자 주:

(1)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은, 16세기 초반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가 주장하였듯이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가, 자기 중심적인 주장자 자신의 고유한 신념(belief)을 말하는 믿음(faith)인지 혹은 향주삼덕들 중의 하나인 초자연덕을 말하는 믿음(faith)인이지도 알 수 없는믿음(faith)에 의하여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의 세 번째 문장의 서술과 관련하여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에 주어진 설명을 읽는 것이, 초자연덕(supernatural virtues)들을 말하는 향주삼덕(the three theological virtues)들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70_light_&_rectitude.htm <----- 필독 권고

 

(#3) 게시자 주: 여기서 말하는 신성(神性)적 의지(the divine will)는, (CCC 1991, a-i)(CCC 1991, a-ii)의 결과 피조물인 인간들의 의지(the will)일 수도 있는신성(神性)적 사랑의 주체(subject)를 말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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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 결론 5) 따라서, 우리는,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에 의하여, CCC 1991로부터 다음을 한 개의 Corollary로서 도출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 이후, 유일한 속(屬)적 수용(受容)된 올바름(the unique generic rectitude)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09항에 대단히 잘 서술된새  아담[두 번째 아담]으로 불리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 amour divin)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divine love) 안에서만 오로지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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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 다음은, 위의 제1-4항에서 고찰한 바를 다시 살펴보는 것인데, 특히 아래의 빨간색 글자들을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517-2519항들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들은 모두 "심장(heart)"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말본 성경 본문과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에서 "(인간의) 심장[(human) heart, cœur (humain)]" "(인간의) 마음"으로 번역된 것은, 여기를 클릭하면 이에 대한 지적의 글들을 읽을 수 있듯이그리스도교 교의(敎義) 신학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5. 

이번 항에서는 위의 제1항에서 살펴본 바른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1.

5-1-1. (중간 결론 6)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는 2014년 6월 29일에 "Homilectic Directory(강론 지침)"이라는 제목을 가진 문헌을 공표하였으며, 이 문헌의 부록 I "강론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에 주어진 가해 연중 제26일 강론의 주제들로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특정 항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댜음의 문장이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
rc_con_ccdds_doc_20140629_direttorio-omiletico_en.html
 

(발췌 시작)
CCC 1807: just person distinguished by habitual rectitude toward others

 

CCC 1807: 다른 이들 쪽으로 향하는 습관적/상존(常存)의(habitual) (사고 및 품행 등에 있어) (윤리적)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cf. CCC 415, 1591, 2518)에 의하여 구별되는 의로운 자 (just person distinguished by habitual rectitude toward others)

(이상, 발췌 및 우리말 졸번역 끝)

 

즉,

CCC 1807: 다른 이들 쪽으로 향하는 상존(常存)적으로,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what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rectitude, cf. CCC 415, 1591, 2518)에 의하여 구별되는 의로운 자 (just person distinguished by habitual rectitude toward others)


5-1-2.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소장중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발행된 바로 위의 제1-1항에서 말씀드린 문헌의 우리말 번역본에 주어진,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문장의 우리말 번역문은 다음과 같은데, 위의 제5-1항에서의 우리말 번역문들과 어디서,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발췌 시작)
교리서 1807: 이웃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몸에 밴 '의로운' 사람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1-2:
(1) 여기서 말하는 "올바름"은, 객관적이 아니고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그 판단 근거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예를 들어, 특정한 꽃을 두고서 어떤 자가 "아름답다"고 주장 할 때에, 그러나 관측자에 따라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이러한 문장들은, 지성을 지닌 피조물인 인간들 누구에게나 "참(true)" 혹은 "거짓(false)" 이들 둘 중의 한 개의 진리값을 항상 가지는, 소위 말하는 "명제(proposition/statement)"아닙니다.  따라서, "의로운 자"에 대한 서술에서, "올바름"의 여부가 이와 같이 판단 기준에 따라 거부될 수도 있는 우리말 번역문에 번역 오류가 없다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이제, "올바름"이라는 표현과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受容)된/받아들여진 올바름"이라는 표현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4) 마찬가지 이유 때문에, 혹시라도 누군가가, "오직/오로지 믿음(faith)만으로 의롭게 된다"라고 주장하, 우리는 여기서 말하는 "믿음(faith)"이, (i) "(受容)된/받아들여진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ii)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 고유의, 개인적/개별적 원천의, 극히 주관적인, 어떤 신념(a belief)/어떤 느낌(a feeling)"을 말하는 것인지, 반드시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물으면서, 히브리서 제11장에 기록된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던 믿음들이, 이들 (i)(ii) 둘 중의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에 대하여서도 또한 반드시 함께 묵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5-1-2 끝).

 

5-2.

5-2-1. (질문 2) 기존의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에서는, 영어로 "rectitude of divine love"로 번역되는 표현이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으로 번역되었는데, 바로 이 번역된 우리말 어구에서 "공정(公正)함"이라는 차용(借用)된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은 어디에 주어져 있는지요?

 

혹시 이 용어의 의미가 다음의 주소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설명대로라고 한다면,

 

출처: http://124.137.201.223/search/List_dic.jsp 

(발췌 시작)

공정(公正)하다

「형용사」

공평하고 올바르다.

(이상, 발췌 끝)

 

 바로 이 사전적 설명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위의 제4-1항에 제시된 "rectirud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s)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십시오.

 

혹시 이 용어의 의미가 다음의 주소에 있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설명대로라고 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신성(神性)적 사랑/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divine love)은, 마태오 복음서 20,4.14-15[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마태오 복음서 9,13("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오 복음서 18,12-14[길 잃은 양의 비유] 등에 잘 예시되어 있듯이, 1/n 식으로, 공평하게 분배하는 사랑이 결코 아니고, 각자의 몫에 따라,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5-2-2. 그리고 영어로 "divine love"로 번역되는 표헌이, 단순히, "하느님 사랑"으로 번역된 것이 명백한 번역 오류임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첫 부분에 있으닌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5-3.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518항의 경우에 있어, (i) 제5-3-1항에서 의미하는 바와, (ii) 제5-3-2항에 발췌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제공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518항에 주어진, 빨간 색칠을 한 어구가 의마하는 바가 동일한지에 대하여 또한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sexual" 이라는 형용사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어찌하여, "성생활(sexual life)"이라는 표현으로 둔갑할 수 있는지요???:

 

5-3-1.

sexual rectitude(영어본 CCC 제2518항),

 

(졸번역) 

성(性) [행위]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 (*): 아래의 (**)와 비교하십시오

 

즉, 성(性) 행위가,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the last end)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이상, 졸번역 끝)

 

5-3-2.  

올바른 성생활(우리말본 CCC 제2518항) <----- (**): 위의 (*)와 비교하십시오.

 

6.

6-1. 이번 항에서는, 바로 위의 제4항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하여 회복된(restored)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의 보편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본문 중에서 속(屬)적 개념(generic concept)인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이, generalization 과정의 역 과정인, specialization 과정 혹은 patricularization 과정을 거쳐, 어떻게 종(種)적으로(specially) 사용되고 있는지를 재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rectitude" site:isidore.co/aquinas/summa 

 

"rectitude of justice" (rectitudinem iustitiae) 정의(正義)(justice)[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 primitive state (rectitudo primi status)" 원초적 지위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마지막 끝(the last end)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natural love (rectitudo naturalis dilectionis)" 본성적 사랑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해지고 있음(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발췌 시작)
As natural knowledge is always true, so is natural love well regulated; because natural love is nothing else than the inclination implanted in nature by its Author. To say that a natural inclination is not well regulated, is to derogate from the Author of nature. Yet the rectitude of natural love is different from the rectitude of charity and virtue: because the one rectitude perfects the other; even so the truth of natural knowledge is of one kind, and the truth of infused or acquired knowledge is of another.

 

자연적 지식이 항상 참(true)이듯이, 마찬가지로 잘 규제된[well regulated, 즉 과도하지(inordinate) 않은] 자연적/본성적 사랑(natural love)도 또한 참인데, 왜냐하면 자연적 사랑은 단지 창조주(Author)에 의하여 본성 안에 심어진 바로 그 기울어짐(inclination)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본성적 기울어짐(a natural inclination)이 [그 대상에 대한 과도한 욕망(inordinate desire) 때문에] 잘 규제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본성/자연의 창조주로부터 벗어나는(derogate from)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yet) 자연적/본성적 사랑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은 애덕(charity) 및 덕(virtue)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즉, 초자연적(supernatural 수용된 올바름]과 다른데, 왜냐하면, 심지어 자연 지식의 진리가 하나의 종류이고, 그리고 [초자연적으로] 주입된(infused) 혹은 [자연적으로] 습득된(accquired) 지식의 진리가 또다른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후자[즉, 애덕 및 덕 행위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가 전자[즉, 자연적/본성적 사랑 행위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를 완미하게 하기(perfect) 때문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rectitude of hope" 희망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charity and virtue (rectitudo caritatis et virtutis)" 애덕 및 덕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judgment (rectitudinem iudicii)" 판단의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life" (rectitudinem habet, rectitudine vitae) 삶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 Christian faith" 그리스도교 믿음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practical rectitude" 실천적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reason" 이성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게시자 주 6-1: (중간 결론 7) 

다음의 문장은, "이성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reason)" 상태에 있는 한 개의 지성덕(an intellectual virtue)은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성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reason)" 상태에 있는 이성이 바로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이라고 불리는 한 개의 지성덕을 말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다음의 주소들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75.htm [신학대전여행, Ia, IIae, q84]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74.htm [신학대전여행, IIa, IIae, q132]

 

교만(pride), 탐욕(covetousness), 허영(vainglory), 야망(ambition) 등의 용어들의 의미가 정의될(defined) 때에 사용되는,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이성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reason) 상태에 있는 이성"이라고 바로 여기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출처: http://isidore.co/aquinas/english/Ethics6.htm [제1109항]

(발췌 시작)

1109 [...] Consequently, we should divide right reason, an intellectual virtue that is rectitude of the reason, into its species, as in a similar fashion we have already divided the moral virtues.

 

1109 [...] 결과적으로, 우리는, 어떤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가 윤리덕(moral virtues)들을 이미 분리하였듯이, 이성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of the reason) 상태에 있는 한 개의 지성덕인, 올바른 이성(right reason)을 그 종(種, species)들로 마땅히 분리하여야(divide) 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rectitude of human reason (rectitudo rationis humanae)" 인간의 이성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 practical reason (rectitudo rationis practicae)" 실천 이성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 appetite (rectitudinem appetitus)" 욕구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 will" 의지(즉, 지성적 욕구, 즉, 이성적 욕구)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virtue" 덕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knowledge" 지식/앎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counsel" (rectitudini consilii) 조언/충고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discretion (rectitudo discretionis)" 신중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 mind (rectitudo animi)" 마음(mind)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moral rectitude" 윤리적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ir government" 그들의 통치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ㅍ있음(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rectitude of the will and of the deed" 의지(즉, 지성적 욕구, 즉, 이성적 욕구)의 및 행동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internal rectitude (interioris rectitudinis)" 내면적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 [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5월 19일] 

6-2.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영문본 본문 중에서 "rectitude" 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부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intratext.com/IXT/ENG0023/1/2V.HTM

 

특히, 다음에 발췌된, Ia, q63, a1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많이 부족한 죄인에 의하여 위의 제4-1항에서 제시된 "rectitud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아래의 문잘을 읽으면서 대입하면, 아래의 문장을 독자들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출처: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61-64.htm#q63a1co

(발췌 시작)

I answer that, An angel or any other rational creature considered in his own nature, can sin; and to whatever creature it belongs not to sin, such creature has it as a gift of grace, and not from the condition of nature. The reason of this is, because sinning is nothing else than a deviation from that rectitude which an act ought to have; whether we speak of sin in nature, art, or morals. That act alone, the rule of which is the very virtue of the agent, can never fall short of rectitude. Were the craftsman's hand the rule itself engraving, he could not engrave the wood otherwise than rightly; but if the rightness of engraving be judged by another rule, then the engraving may be right or faulty. Now the Divine will is the sole rule of God's act, because it is not referred to any higher end. But every created will has rectitude of act so far only as it is regulated according to the Divine will, to which the last end is to be referred: as every desire of a subordinate ought to be regulated by the will of his superior; for instance, the soldier's will, according to the will of his commanding officer. Thus only in the Divine will can there be no sin; whereas there can be sin in the will of every creature; considering the condition of its nature.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그 고유한 본성으로 생각하게 되는 한 천사 혹은 어느 다른 이성적 피조물은 죄를 지을 수도 있으며, 그리고 어떠한 피조물에 있어서던지 그것이 죄를 죄를 짓지 않음은, 그러한 피조물아 은총(grace)이라는 한 선물 때문에(as) 죄를 짓지 않음을 가지는 것이지, 본성의 조건으로부터가 아닙니다. 바로 이것의 이유는, 왜냐하면 죄를 짓는 행위가 본성(nature), 기술(art), 혹은 윤리적 실천(morals)들에 있어 죄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때에, 한 행위가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바로 그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으로부터 어떤 벗어남(a deviation) 이외의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규칙(rule)이 행위자의 바로 그 덕(virtue)뿐인 바로 그러한 행위만이 홀로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올바름(rectitude)에 결코 어긋나지 않습니다(never fall short of). 만약에 장인(匠人)의 손이 조각하는 규칙 그 자체이라면, 그는 올바르게(rightly)와 다르게 나무를 조각할 수가 없으나, 그러나 만약에 조각 행위의 올바름(rightness)이 다른 규칙에 의하여 판단된다면, 조각 행위는 올바르거나(right) 혹은 결함이 있을(faulty)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의지(Divine will)는 하느님의 행위의 단일한 규칙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어느 더 고급의 끝 쪽으로 돌려지지/맡겨지지(is referred)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창조된(created) 의지[will, 지성적 욕구(intellectual appetite), 즉, 이성적 욕구(rational appetite)]는, 그것이, 그쪽으로 마지막 끝이 장차 언급될, 하느님의 의지에 의하여 규제되는 한, 행위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하느님에 의하여 명령을 받고 있는 (따라서, 정의되는)]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을 가지는데, 이것은, 예를 들어, 병사의 의지는 그자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교의 의지에 따라서 규제되듯이, 한 종속자(a subordinate)의 모든 욕망(desire)은 그자의 상급자(superior)의 의지에 의하여 마땅히 규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오로지 하느님의 의지에만 죄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이와는 달리 모든 피조물의 의지에는, 그 본성의 조건을 고려할 때에, 죄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삳,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5월 21일]

"자기 자신이 많이 부족한 죄인임을 진실로 인정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자연적 우의적 도움인 은총(grace)의 덕택으로 

받아들이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의롭게 되는 자들, 즉, 하느님에 의하여 의로움을 인정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자연적 우의적 도움인 은총(grace)의 덕택으로

우리의 영혼/심장(heart)/의지 안에 형성되는 질서/순서(order)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의

수용(受容)/받아들임이라는/이라고 정의되는(defined)

올바름(rightness)을 말한다."

 

즉,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자연적 우의적 도움인 은총(grace)의 덕택으로

우리의 영혼/심장(heart)/의지 안에 형성되는 질서/순서(order)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받아들임이라는/이라고 정의되는(defined)

올바름(rightness)을 말한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에서 사용되고 있는 표현, "신성적 사랑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the rectitude of divine love)"는 다음을 말합니다:

 

"신성적 사랑에 있어서의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초자연적 우의적 도움인 은총(grace)의 덕택으로

우리의 영혼/심장(heart)/의지 안에 형성되는 질서/순서(order)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한 개의 종(種)적(special) 진리', 즉,

'신성적 사랑이,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는 바(that which is being duly ordered to the last end, conforming to the eternal law)'의 

수용(受容)/받아들임이라는/이라고 정의되는(defined)

올바름(rightness)을 말한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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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22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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