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동성당 게시판

형, 세발 자전거,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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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bejoyful] 쪽지 캡슐

2000-02-26 ㅣ No.1344

형, 세발자전거 , 예수

- 임의진 (남녘교회 목사, 참꽃 피는 마을 발행인)

 

 

형을 버버리라고 놀려들 댔지만

 

내 바로 위의 형은 다운증후군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었다.

障碍名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동네 아이들 사이에는

’병신, 멍충이, 버버리’로 통했다.

 

형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버버리집 아무개’로 다짜고짜 불리어졌다. 철없는 아이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잇살 먹은 어른들 조차 뻔히 알고 있는 이름을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버버리’라고 쉬이 불러 댔다. 허기사, 째보네, 곰보네, 꼽사네 하면서 마구 ’몸꼴’대로 불러댔던 그 시절에는 말 못하는 아이하나 가리켜 버버리라고 부르는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네에서는 버버리든 뭐든 불러 댔어도 우리 집에서만큼은 형을 이름 그대로 다정히 불렀다. 그리고 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온 식구들이 서럽게 울면서 이리저리 동네 구석구석, 온 들판을 찾아 헤메고 다녔다. 우리 집에서만큼은 형은 병신도 멍충이도 버버리도 아니었고 오직 사랑하는 식구중 한사람이었을 뿐이었다.

 

한번은 내가 꼬라지가 난 김에 형을 ’버버리’라 그랬다가 큰 누나에게 멱잡혀설랑은 감나무 밑에서 뒈지게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그날처럼 누나가 목놓아 서럽게 울었으랴. ’아, 절대로 그리 불러서는 안되겠구나’ 마음을 다져 먹고는 그날로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버버리’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아주 지워 버렸다. 그후로는 아무리 뿔따구가 나도 형의 이름을 꼬박 꼬박 새겨 불렀다.

 

그러나 동네 아이들은 참으로 진드기처럼 따라다니며 버버리라고 놀려 댔다. 연년생 단짝으로 맞붙어 다니던 우리 형제는 만만한 ’이지메’의 대상이었다. 싸움질이라도 잘했으면 좋으련만 안되는 놈은 하는 짓마다 안 되는지라 주먹이라고 있는 것이 지지리 헛물이었다. 그래 놓으니 맨날 쌍코피만 줄줄 흘리고 다닐 밖에.

 

일이 이 지경이면 말발이라도 드세야 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삼 시 세 때 밥상머리 앞에서 기도를 바치는 입으로, 어찌 말을 배우면서 쌍시옷 욕지기를 일로 벌어하는 우악스런 아이들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나는 땍땍거리며 겨루는 시늉이라도 하고 그랬지만, 형은 까닭 없이 당하면서도 싫은 내색이라고는 한 구석도 내 비칠줄 몰랐다.

 

"그라믄 뭘라 살어? 어디 가서 팍 듸져뿔재 뭘라 사냐고.." 분에 못이겨 형에게 화살을 퍼부어 보기도 했으나 벙그러져 웃어 버리는 데야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형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멀고 아득한 길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형은 날마다 초등학교에 찾아와 운동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느그 성 왔다." 유리창 가까이 앉은 녀석이 무슨 보고 올리듯이 꼬박꼬박 챙겼다. 그러면 나는 유리창 너머로 형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 보았고, 고무신을 벗어 흙놀이를 하거나 시이소오에 올라가거나 하면서도 내가 있는 교실로 눈을 떼지 않는 형에게 간간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이 감기라도 걸려 드러누운 날이면 운동장은 하냥 쓸쓸한 빈 구석이었다. 형 때문에 당하는 고초를 생각하면 후련한 마음이 들어야 쓸 터인데 형제간 마음이란게 참 괴이한, 알다가도 모를 무엇이었다. 둘이 재재거리며 돌아오던 신작로를 혼자서 걷노라면 마음 한 귀퉁이가 여간 허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며칠 후 다시 운동장에 형이 보이는 날이면 얼마나 마음이 새구럽게 환해지고 따뜻해져오던지.....,

 

그래 반가움에 가방을 미처 메지도 않고 뛰어 나오는데 동네 덩치들이 가라는 집은 가지를 않고 ’너 오랜만에 본다’는 듯 형을 빙 둘러 섰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시누대 끝으로 푹푹 배를 찌르며 놀리고 있었다. 나는 책가방을 던져 두고 녀석들에게 미친 듯이 대들었다.

 

그러나 그날이라고 무슨 재변이 났겠는가. 우리 형제는 작살나게 두들겨 맞았고 바닥에 나뒹굴며 꺼이꺼이 서러운 울음만 뱉어냈다. 던져두고 간 ’병신들이 지랄한다.’는 말이 가슴 밑바닥까지 후벼댔지만 우리 형제는 다시 일어나 소매로 쓰삭 상처를 훔치고는 해질녘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그런 날은 미루나무가 늘어선 황토길이 그렇게 멀고 아득할 수가 없었다.

 

세발 자전거를 밀어주셨던 예수님

 

어느 해 겨울날, 나는 늑막염에 걸려 이모부가 막 개업한 영암의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이모네 삼형제들은 보는 사람마다 딴 데 가서 놀라고 훠훠 그래싸도 세발 자전거 한 대씩을 꿰차고는 병실 복도를 누비면서 야단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전거가 하도 부러워 링겔 주사를 꽂고 누워서도 ’자전거 한 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침을 꼴각이며 자전거 타령을 늘어 놓고 있었다.

 

퇴원을 하는 날, 어디서 보셨는지 이모네 뒷간 모퉁이에 부러지고 녹슨 자전거를 하나 얻게 된 아버지는 그것을 일일이 사포로 녹을 닦으시고 읍내 철공소에 가서 부러진 곳을 잇고 페인트까지 칠하여 중고 세발자전거 한 대를 안겨 주셨다. 나는 너무나 좋아 맵추운 겨울 한복판은 아랑곳없이 병의 뒤끄터리 무서운 줄도 모르고 어둑해지거나 끼니 때 말고는 방에 들어 가려고를 하지 않았다.

 

자전거가 생긴 날로부터 형은 내 자전거를 밀어 주는 ’종’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오줌을 누려고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페달을 한번 밟았는데, 것을 본 내가 길길이 뛰며 뒤로 뒤집어 우는 통에 형은 자전거 앞자리를 다시는 넘보지 않았다. 부지런히 뒤를 밀면서 굵은 땀만 연신 흘렸다.

개학이 다가오자 걱정이 들었다. 자전거를 학교에 가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 처리 문제가 여간 고심 되지가 않았다. 형에게 타지 말라고 몇 번이나 경고를 놓고 나서야 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학교로 옮길 수 있었다.

 

그 날은 일찍 파하고 돌아왔는데,

멀리서 보니 글쎄 형이 자전거를 밀며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내가 없는데, 의자에 낮아 페달을 한번 밟고 놀 수도 있을 텐데, 마당을 뱅뱅 돌며 구부정한 자세로 자전거를 밀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멀리서 본 순간 가슴 저편에 뜨거운 음성이 고였다. ’이제 그만 형에게 주어라’

 

아, 그날 나는 처음으로 형에게 자전거를 양보했다. 아니 자전거를 형에게 가지라고 아주 주어 버렸다. 그리고 그르 처음 운전석에 앉히고 열심히 밀어 주기까지 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어린 나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신 바로 그날이었다.

 

 

연민의 강물이 되고 연민의 바다가 되고픈 나의 목회는

 

시방 형은 이승을 떠나 밤하늘에 별이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내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세발 자전거를 밀어 주는 예수님으로 말이다. 障碍友, 버림받은 사람들, 가슴 미어지는 아픔으로 신음하는 사람들, 서러운 눈물을 삼키며 흐느끼는 이 땅의 모든 가난한 이웃들 바로 그 곁에서 등을 토닥여 주고 함께 연민의 강물이 되고 연민의 바다가 되고픈 나의 목회는, 아마 몰라도 형에게 자전거를 내어주고 밀어주던 그 날의 연장이 아닐 것인가, 그런 생각을 다시금 새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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