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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해설: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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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38

[사도신경 해설 36]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1) 재림

최영철 알폰소 신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재림에 관한 믿음 표명으로 끝난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늘에서 모든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는 고백이다. 심판은 하느님 구원의 최종완성을 뜻한다. 이 땅에서 구원사업을 시작하고 성취하신 분께서 최종 마무리하기 위하여 여기에 다시 오실 것이다. 첫 번째 오심과 두 번째 오심은 아주 대조적이다. 첫 번째는 가난, 비천, 소박, 평범의 모습인데 반해 두 번째는 부유, 영광, 위엄, 장엄의 모습이다. “구름을 타고 천사들을 거느리며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다.” 첫 번째는 시작과 실현인 데 비해 두 번째는 최종완성이기 때문이다. 강생 때에는 사람들로부터 심판 받는 죄인의 모습이었으나 재림 때에는 죽은 이든 산 이든 모든 이를 심판하는 임금의 모습이다. 겨자씨처럼 초라한 시작은 위대한 완성으로 마무리된다.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32) 그래서 재림은 우리 희망의 근거이다. 처음과 중간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겹더라도 마지막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을 누차 강조하셨다. 신문받을 때, 종말에 관한 비유를 통하여, 특히 승천 순간에 재림을 선언하셨다. 신문 받으시는 자리에서 단언하신 것은 역설적이다. 죄인으로 재판 받으시는 순간에 예수님은 만인들을 판결하는 심판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6,64) 유다 최고의회 앞에서 재판 받을 때에 하신 이 말씀은 승천에 관한 것인지, 재림에 관한 것인지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둘 다 언급한 말씀으로 해석해도 된다. 왜냐하면 승천이 천사들에 의해 재림이 장엄하게 선포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실상 두 사건은 긴밀히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1,11) ‘언제?’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사도 1,7) 재림의 사실만 강조하실 뿐 그 때에 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단언하신다. 그 때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다만 그 사실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림의 사실보다는 그때에만 주목하게 되면 그릇된 종말관을 가지게 된다.

교회 역시 초기에는 종말의 때에 큰 관심을 갖고 그 때가 임박했다고 생각하였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열망 덕분에 교회는 시련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 “주님, 어서 오십시오!”라는 교회의 열망은 초기의 어려움과 박해 및 내부의 시련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고 선교를 향한 열정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재림에 대한 희망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활력으로 작용한다. 재림의 때가 늦어진다고 판단한 교회는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맞갖은 자세가 선교임을 깨닫고 선교에 열중하였다. 재림 사실에 주목해야지 그 때에는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오실 주님은 항상 오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승천과 재림은 긴밀히 결부되어 있어 그 둘 사이의 ‘중간시기’를 설정한다. 지금 우리는 그 시기에 살고 있다. 승천으로써 주님의 구원사업이 성취되었고 재림과 더불어 최종완성된 것이다.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의 중간시기는 장차 재림하실 주님께서 언제나 오고 계시는 시기이다. 승천한 주님은 재림 때까지 언제나 우리를 방문하고 현존하신다. 주님의 재림 덕분에 그리스도인은 항상 인내로이 희생하며 기다린다. 주님은 “보라, 내가 곧 간다.” 하고 선언하고 교회는 성령과 더불어 “오십시오.” 하고 간청한다.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2009년 1월 25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사도신경 해설 37]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2) 최후의 심판


주님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심판이다. 심판은 하느님의 마지막 구원행위이다. 세상에서의 구원활동은 주님에 의해 시작되고 실현되었으니 의당 그분에 의해 완결될 것이다.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고 강생 및 파스카가 구원의 성취라면, 구원의 완성은 심판이다. 창조와 구원이 삼위일체의 공동 사업지만 그 일들의 시작과 성취는 모두 성자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구원의 완성은 성자를 통하여 마무리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판결은 마지막 일이다. 그것으로 모든 일이 최종 마무리 된다. 재판 판결로 인해 피고인의 운명이 결정된다. 해방이냐 감옥행이냐가 판결로써 판가름 난다. 심판은 구원과정의 최종 순간이다. ‘가르는 것’이다. 역사 안에 뒤섞여 있는 선과 악을 가려내고 진실과 거짓을 분간해 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 25,32) 가르는 것은 분간하고 분리시키는 것이다. 뒤섞여서 분간되지 않는 것을 가르는 것이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고 단으로 묶어 태워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30) ‘염소’와 ‘가라지’는 악과 거짓을, ‘양’과 ‘밀’은 선과 진실을 가리킨다. 심판은 갈라서 좋은 것은 보관하고 나쁜 것은 없애버리는 작업이다. 그것은 악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일구어 내고 악을 섬멸하는 것이다.

판단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때문에 심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심판은 무섭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다. 물론 최종 판결이므로 죄많은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심판은 희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주겠다.”(묵시 22,12) 심판은 우리가 상상못할 정도의 엄청나게 후한 보상의 순간이기도 하다. 심판 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작은 친절과 미소, 격려와 도움, 슬픔과 눈물, 고통과 박해에 대한 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심판의 기준은 주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모든 이들 특히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와 헐벗은 이들과 맺은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의 관계가 심판의 기준이다.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핌으로써 그들 안에 계시는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심판이 좌우된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과 마찬가지로 심판은 먼 장래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지금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이 주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 재림하실 주님께서 지금 찾아오고 현존하시므로 종말에 실현될 주님의 심판은 현재 진행 중이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은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죽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재림과 심판은 세상 마지막 일들이지만 그 일들은 현재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현재는 종말의 시기이다. 결정적인 때는‘지금’이다.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 곧 ‘선사된 기회’이다.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우리는 현재 충실해야 한다. 주님에게 칭찬받는 충실한 종으로 수고해야 한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충실하게 일하고 있는 종!”(마태 25,46) 신앙의 등잔에 사랑의 기름을 채워 놓아야 한다(25,1-13). ‘착하고 충실한 종’은 지금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이다. [2009년 2월 1일 연중 제4주일 가톨릭마산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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