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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위령성월(11월 2일 위령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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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2-11-01 ㅣ No.727

 

제의를 입으신 십자가상의 예수.8세기.

 

11월 위령성월

 

11월 2일 위령의 날(All Soul’S Day)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기억하는 날로써

일년에 한 번씩 위령의 날을 지키도록 명령한 클뤼니수도원의 오딜로의 영향으로

998년 부터 보편화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이날 3번의 미사를 바칠 수 있도록 허가되었는데,

이러한 특권은 위령의 날과 성탄절에만 부여되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것을 상기하여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 미사동안에 우리들이 사랑했고,우리를 사랑했던 죽은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의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을 얻도록,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합니다.

 

아래의 글은 이기정신부님 홈에서 올렸습니다.

별이 태어나는 마을 http://akijaki.pe.kr

 

★ 그리스도인과 죽음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면서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죽는 것은 순리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앙의 확신 때문입니다.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마태오 10, 28)"라고 하신 말씀은 육신이 죽은 뒤에도 생명의 원리는 계속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가 소멸된 후에도 계속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고 지복직관(之福直觀)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명예가 값진 기름보다 좋고,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좋다.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좋다.

산 사람은 모름지기 죽는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웃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좋다.

얼굴에 시름이 서리겠지만 마음은 바로 잡힌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잔치집에 있다…(전도서 7, 1)."

 

따라서 교회가 세상을 떠난 영혼을 잊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계시하신 진리, 즉 죽음이 모든 것의 끝장이 아니라

초자연적 질서의 세계,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진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이들을 잊지 않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이에게도 다시 한번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다운 의미를 음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 사심판

사심판

우리가 죽은 뒤 하느님 앞에 나아가서 개개인이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결과로 영원한 행복이나 벌을 받는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뒤에 상이나 벌을 받는다는 이러한 사심판은 교리 안에 담긴 내용이지 교회가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어떤 이는 죽어 단련을 받고, 어떤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직접 뵈오며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사심판에 대해 함축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 연옥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구원의 희망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에 부족함과 그릇된 점을 벗지 못한 채 간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행복인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분이신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적은 결점이 있어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뒤에 이러한 결점을 정화해야 하는데 이 상태를 "연옥"이라 합니다.

 

"연옥"이라는 말이 성서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연옥에 대한 인정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교회의 전통이며 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심판에 근거를 두었던 확신입니다.

 

연옥에 관한 교리는 1439 년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설정하였으며

"연옥은 일생동안 하느님께 저지른 죄를 보속하여 치루는 기간"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교회가 죽은 영혼을 기억하는 이유

 

정화 중의 영혼들은 자신의 회복을 위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옥 영혼들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면서도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이러한 기도는 현세에 사는 우리들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입니다.

 

교회는 이미 초세기부터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였습니다.

로마시대에 박해를 당하던 때 신자들의 유일한 피난처였던 지하 공동묘지(까다꼼바)의 비석에도, 죽은 이들이 죄의 사함을 속히 받아 천국의 영원한 행복에 들게 해달라는 기도문이 많이 새겨져 있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초세기부터 이미 교회 전례에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 삽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은 이를 잊지 않고 기도할 때, 그들은 위로를 받고 기다리던 부활의 기쁨으로 하느님 안에 안식을 누리게 되고, 우리를 전구(傳救)하여줌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 갈 수 있습니다.

 

뜨리덴띠노 공의회에서는 "연옥은 존재하며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성제로 도움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교회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전 세계의 모든 사제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미사를 3 대씩 봉헌하게 했으며, 또한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한달 동안 연옥에서 정화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 위령 신심과 우리 생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신심은 가톨릭의 좋은 신심(信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신심은 세상을 떠난 영혼들의 불우한 처지를 도와주는 사랑의 실천이며,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며, 우리 자신을 위한 신심이기도 합니다.

정화 중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은, 하느님을 찬미할 영혼들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하는 일이므로 곧 하느님의 영광을 이루는 일이며 우리의 기도와 선행의 도움을 받은 그 영혼들은 우리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신심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는 좋은 기회도 될 것입니다.

 

위령의 달을 맞아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 먼저 가신 이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하는 기도와 선행과 희생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영원한 삶의 시작인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니, 이러한 죽음을 묵상하며 영원한 삶의 터전인 현세의 삶을 사랑하고, 성실한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자유로이 자신의 현 존재를 전체적으로 완성하는 최고 행위이다(K.라너)."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고린토 후서 5, 7)."

 

★ 성서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구약성서

죽음과 죄에 대한 관계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창세기 2, 16, 17).

즉 인간의 죽음과 삶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구약초기에는 죽은 뒤에도 생명이 이어간다는 생각은 뚜렷하지 않았으며 오래 살아 장수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묵시문학에서는 죽음을 새롭게 이해했습니다(다니엘 12, 1-14).

즉 하느님께서 의인을 죽음에서 구제해 주실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죽은 이가 부활한다는 희망이 움터 났습니다.

이러한 전망은 지혜문학에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지혜서 3, 1-4).

 

신약성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신 정복자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다는 생각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집념이 덜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이 임박하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회개를 기다리시면서 재림을 연기하시고 계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마치 도둑처럼, 어느 순간에 종말의 시각이 올 것으로 여기게 되자 신자들은 죽음의 신비를 심사숙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생활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로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는 생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성사생활 즉 병자성사와 노자성사에서 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성바오로 사도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형제 사티루스의 죽음)에서

(Lib 2,40.41.46.47.132.133: CSEL 73,270-274.323-324)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분과 함께 죽도록 합시다.

 

죽는 것이 이득이고 사는 것은 형벌임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며 죽는 것도 이득이다.

" 우리 육신이 죽어야 생명의 영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생의 전부가 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분과 함께 죽도록 합시다. 죽음이라는 별리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육정에서 떨어져 나와 높은 데에 자리잡고 정욕들이 그를 붙잡아 매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되도록, 우리 안에는 매일매일 죽음을 향한 심성과 성향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영혼이 현세부터 죽음의 유사성을 입으면 훗날에 죽음은 그의 형벌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육의 법을 영의법이 거슬러 싸워 영혼이 죄의 법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이것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바울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치유해 주실 의사가 계십니다. 그분의 치료제를 받아들입시다. 우리의 치료제는 그리스도의 은총이고 죽음의 몸은 우리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 있지 않도록 우리 육신을 멀리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아직 육신 안에 있지만 육신의 일을 따르지 말고 인간 본성이 지닌 권리들을 요구하지 말며 은총의 선물을 요구하도록 합시다.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세상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하기만 하셨다면 죽음을 피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피하여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써가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은 모든 이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분 죽음의 인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그 죽음을 전하며 제사를 바칠 때 그것을 선포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승리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성사입니다. 그분의 죽음은 연례적인 세상의 축제입니다.

그분의 죽음에 대해 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분의 거룩한 죽음에서 죽음이 불사 불멸을 얻고 죽음이 죽음을 속량했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음에 대해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멸시하지 않으 시고 피하지도 않으신 그런 죽음을 우리가 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처음에 죽음은 인간 본성의 부분이 아니었다가 후에만 그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물들의 시초부터 죽음을 설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치료제로서 세우셨습니다.

사람이 범한 죄의 책벌로서 인간 삶에 비참한 상태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수고와 비애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삶이 잃어버린 것을 죽음이 다시 얻을 수 있도록 이 모든 고통들이 끝맺어져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사 불멸은 이 은총 없이는 이득보다는 짐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혼은 이 삶의 짓눌림과 지상의 몸이 눌리는 중압에서 해방되어 천상의 집회에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인들만 거기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예언서가 말하는 칠현금을 타는 이들이 바치는 찬미를 우리도 바칠 것입니다.

"전능하는 주 하느님, 주 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시여,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십니다. 주님,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 누구이오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니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와 경배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난 영혼은 "모든 육신이 당신께로 오리이다."라는 시편 작가의 말에 따라 노래하는 이들이 기쁨 가운데 지상의 집에서 천상의 집에로 인도되어, 세상에 예속되지 않고 영과 일치된 신부와 예수님과의 혼인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복된 다윗은 누구보다 더 이날을 보게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오직 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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