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멈추십시오. 사색하고 귀 기울이십시오. / 문규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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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peace-maker] 쪽지 캡슐

2008-10-12 ㅣ No.8618

문규현 신부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http://blog.daum.net/paulmun21/7318665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묵상

 

멈추십시오. 사색하고 귀 기울이십시오.

 

매일 새벽 5시 반이면 어김없이 미사를 드립니다. 때론 서늘한 마당에서 떠오르는 새벽해의 황홀한 조명 속에 근사하게, 때론 비좁은 방에서 더욱 다정하게, 때론 아름다운 성당에서 장엄하게, 셋일 때도 있고 다섯일 때도 있습니다. 그 꼭두새벽 조촐한 미사라도 같이 드리겠다고 새벽길 달려오는 신자도 있습니다.

 


언제나 가톨릭 성가 2번을 시작성가로 부릅니다. 천주교 사제로 떠난 이 오체투지 순례길, 제 심정이 이 성가에 그대로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부를 때마다 늘 그냥 새롭고 좋고 감사합니다. 1절부터 4절까지 다 부릅니다. 그래야 모든 의미가 완성됩니다.


        1.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2. 저 수풀 속 산길을 홀로 가며 아름다운 새소리 들을 때

                산위에서 웅장한 경치 볼 때 냇가에서 미풍에 접할 때

        3. 주 하느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을 위해 보내주시어

                십자가에 내 죄를 대신하여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네.

        4. 주 하느님 세상에 다시 올 때 내 기쁨 말로 다 못하겠네.

                겸손되이 주님께 경배할 때 그 크신 공덕 내가 알겠네.

        

                (후렴)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주 하느님 크시도다.

        


그리고 미사 때면 언제나 저희는 하루하루 묵상할 가치를 뽑는 카드놀이를 합니다. 사랑, 신뢰, 완전함, 평화, 성찰, 경청, 고귀함, 사려깊음, 정의, 관용, 배려, 친절..... 이런 것들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다보면 순례길은 더 많은 의미와 깊이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갈수록 스산해지건만, 죄송하게도 저희에게 이번 주는 가장 행복한 소풍 길이었던 듯합니다. 날씨가 순례길에 선 이래로 제일 고르게 좋았습니다. 사실 아직까진 한낮 햇살이 머리 벗겨지도록 뜨겁게 내리꽂힙니다만, 작물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기에 기꺼이 고마워하며 갑니다.


때론 곡물들을 햇살에 말리느라 부산한 농부들 곁을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좀 더 살피며 길을 가게 되고, 수고하는 농심을 향해 절로 고마움과 존경의 절을 올리게 됩니다. 익어가는 벼들로 누렇게 황금바다로 일렁이는 들판, 그걸 잠시라도 바라보노라면 오체투지로 헉헉대던 심장도 혈관도 근육도 일순간 평온해집니다. 저것이 황금이지요. 사람들이 잊고 살고 있는 진짜 황금. 평화와 평온함, 경건함과 넉넉함을 불러일으키는 것, 생명을 살리고 생명의 뿌리가 되는 것이 진짜 금인 것입니다.


농사는 하잘 것 없이 치부하면서 곡물투기와 땅 투기에는 열중하는 사람들. 금 사는 일에는 넘치게 관심두면서 황금들판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은 잊은 지 오래인 사람들. 사람은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고 죽어가든 말든 외면하면서 부동산이나 성장이니 개발이니 하는 것들에는 갖은 의미와 생명력을 부여하는 사람들. 성찰 없고 뿌리 없는 삶, 끝없는 욕심과 욕심으로 부풀려져 매일 매일을 불안과 근심으로 채우는 사람들. 사랑과 자비는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그저 장사에 몰두하는 사람들.... 감동도 없고 울림도 없고 생기도 없고 평온도 사라진 이 현실에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고통과 시련을 통해 타락과 교만에서 벗어나도록 성찰과 새로남의 기회를 거듭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헤아릴 뿐. 길을 묻고 또 묻고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


금요일에는 가을비가 살살 내렸습니다. 햇살에 말리겠다고 널어놓은 곡물들이 그만 비에 젖은 걸 봤습니다. 하늘 파랗게 높으니 갑작스런 비를 미처 생각 못했을 농부 속은 많이 상했겠지요.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어도 농부는 햇볕에 작물을 말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에 그걸 선택했을 겁니다. 또 농부는 가뭄이 들면 설사 내일 비 소식이 있다 해도 오늘 물대러 나갑니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삶이라는 순례길도 그렇게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삶의 근본, 원초적인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외면하고 잊고 있던 가치들을 기억하고 찾고 선택해야 합니다. 이번 주일 묵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은 과연 어떤 가치들을 담고 있는지, 또 어떤 가치들을 선택하며 살고자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것들이 정말 하느님이 선사하신 선물이 맞는지를. 허위와 위선과 탐욕은 버리고 진짜 내가 되기 위해, 허망한 유혹이나 욕심을 비우고 진정 마음에 묵직하게 간직해야 하는 가치들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어제 토요일, 전주 천주교 순교성지 치명자산에 올랐습니다. 오체투지와 함께 많은 신부님들과 신자 여러분, 그리고 강론을 대신한 설정스님의 말씀 속에 생명평화 미사를 드렸습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곳에서의 오체투지는 아주 각별하고 각별한 감동과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땅에 엎드릴 때마다 순교자들의 영혼과 정신을 더욱 깊고 가까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드러난 외양은 참으로 곤궁하고 비참하였으되 신심과 영혼만은 최고조로 고양되고 행복하였을 순교자들. 삶과 신앙의 본질, 핵심과 진리를 추구하고 간직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순교자들. 그분들 앞에 오체투지로 인사드리고 현양할 수 있었음은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가는 길 질주하는 길, 멈추십시오.

사색하고 귀 기울이십시오.

자기 마음이, 삶이, 주위 존재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10월 12일 문규현 바오로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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