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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3일 성 요셉 카파소 사제♬Sanctus-An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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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6-23 ㅣ No.1834

 

축일:6월23일
성 요셉 카파소 사제, OFS
San Giuseppe Cafasso Sacerdote  
Castelnuovo d’Asti, 15 gennaio 1811 - Torino, 23 giugno 1860
Etimologia: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Saint Joseph Cafasso
Also known as Priest of the Gallows
Born   1811 at Castelnuovo d'Asti, Italy
Died   23 June 1860 at Turin, Italy of pneumonia, a stomach hemorrhage, and complications of his congenital medical problems; his will bequeathed everything to aid the ministry of Saint Joseph Benedict Cottolengo; Saint John Bosco preached the funeral Mass homily
Name Meaning :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whom the Lord adds (Joseph)
Canonized : 1947 by Pope Pius XII

 
성 요셉 카파쏘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까스뗄누오보 다스띠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케이리 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꼬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는 성 필립보 네리, 성 프란치스꼬 드 살,
그리고 성요한 보스꼬와 떼어놀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센니즘을 퇴치케 하였다.
또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도 그였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에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돈보스꼬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카스텔누오보 다스티(Castelnuovo d'Asti)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Torino) 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그리고 성 요한 보스코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세니즘(Jansenism)을 퇴치토록 하였다. 또 그는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이기도 하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그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성 요한(돈) 보스코 사제 축일:1월31일.게시판1595번.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785번.

*성 프란치스코 드 살(살레시오) 주교 학자 축일:1월24일.게시판158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참고:
얀세니즘 
 
라틴어 Jansenismus  프랑스어 Jamsenisme  영어 Jnsenism

 
아우구스티노의 극단적인 주장을 강조한 신학사상.

원죄, 자유, 성총 등 많은 부분에서 비 가톨릭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상은 루뱅대학의 교수였던 얀센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가

1640년에 저술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용 중 5개조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1653년 이단설로 선고 받았다.

즉 얀세니즘은 다음과 같은 교의,

① 그리스도는 전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점

② 하느님은 모든 의인들에게 계명을 주고, 그것을 수행할 충분한 은총을 주었다는 점

③ 신을 등진 인간은 내적인 은총에 반항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④ 선악에 대한 내적 요청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점 등을 부정하였다.

 

그 밖에도 교회규율, 특히 속죄행위, 영성체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얀세니즘은 프랑스와 네델란드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이달의 성인] 성 요셉 카파소(1811-1860)
 윤 클레멘트 신부 
 
성 요한 보스코(1815-1888)와 절친한 영적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로도 알려졌지만 그는 살레시오 수도자는 아닌 교구 사제였다. 그는 돈 보스코의 사제 초기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특별히 1841년부터 1860년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돈 보스코에게 영적 지도를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가스텔누오보 다스피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농사를 짓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특별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된다. 그는 사제로 서품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토리노의 교회대학’(Ecclesiastica College of Turin)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애의 나머지를 토리노의 교회대학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고해성사를 주는 고해사제로 살면서 사제 양성에 헌신한다. 아울러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사랑과 봉사에도 뛰어났는데, 특별히 죄수들, 더욱이 사형수들에 대한 돌봄에 매우 열심이었다. 훗날 교회는 그를 죄수들의 주보 성인으로 공경한다.
 
그는 아울러 당대의 유명하던 성 필립보 네리(1515-1595),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 등과도 영적인 친분을 쌓으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들을 준다.
 
그는 또한 설교가로서도 탁월했는데, 그 당시 북 이탈리아 지방에 퍼지면서 유행하던 얀세니즘(Jansemism : 원죄, 자유, 은총 등에 대해 극단적인 주장을 하면서, 교회규율, 속죄행위, 영성체 등에 대한 요구를 거부)을 멀리하게 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글인 ‘성직자의 피정 묵상’에서 필수적인 덕행과 요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성직자들에게는 다음의 덕과 조건들이 필요하다. 즉, 인내의 정신, 가난, 겸손, 피정에 대한 사랑, 종교적 실천 등이다. 특히 성령, 덕행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일들이 필요한데,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이 되어서 영혼들을 비추고 거룩하게 해야 할 운명이 주어진다.’
 
그는 세상을 떠나던 해 봄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데, 그 해 여름에 임종을 맞는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미사를 하게 되는데, 그의 죽음을 마치도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던 돈 보스코 성인은 그날의 강론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사제생활의 한 모델, 성직자들의 교사, 죽어가는 이들의 위로자, 모든 이의 친구였습니다.”
 
하느님의 한 인간, 성직자들의 모범이요 교사, 가난한 이들과 죄수들의 친구가 되었던 그는 세상에서는 짧았던 49세의 일기로, 1860년 6월 23일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떠나갔는데, 1947년 6월 23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2011년 6월 5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전주주보 숲정이에서]



[금주의 성인] 성 요셉 카파소(St. Joseph Cafasso, 6월 23일)
1811~1860.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수감자들의 수호성인.
 
성 요셉 카파소는 이탈리아 부농집안에서 태어났다. 척추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난 그는 평생 구부정한 자세로 살았다. 성인은 신학교에 입학해 1833년 사제품을 받았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한 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명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성인은 또 교회규율과 성체성사를 거부하던 이단 얀세니즘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성인은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교정사목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비참한 대우를 받는 수감자들 인권보호를 위해 발벗고 나섰으며, 비인간적으로 이뤄지는 교수형 제도를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그는 돈보스코 성인과 10대 때부터 친구로 지냈는데 돈보스코 성인이 청소년사목에 뛰어드는 데 큰 힘이 됐다. 훗날 돈보스코 성인은 요셉 카파소 성인 장례식 강론을 맡았고, 성 요셉 카파소 전기를 남겼다. 성인은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됐다.[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박수정 기자]



 

 

 






 

 

 

 

 

          ♬Sanctus-Angel

 

 

 

 

 

 


 

  

 

 San Giuseppe Cafasso Sacerdote
23 giugno 
Castelnuovo d’Asti, 15 gennaio 1811 - Torino, 23 giugno 1860

Nasce a Castelnuovo d'Asti nel 1811, frequenta le scuole pubbliche al suo paese e poi entra nel Seminario di Chieri (Torino). E' di salute malferma, ma sacerdote già a 22 anni, e con un solido ascendente sui compagni. Viene accolto dal teologo Luigi Guala nel convitto ecclesiastico da lui aperto a Torino. Questi lo spinge a compiere opera di catechesi verso i giovani muratori e i carcerati, poi lo vuole a fianco nella cattedra di teologia morale. In 24 anni di insegnamento Giuseppe forma generazioni di sacerdoti, dedicandosi anche ad un'intensa opera pastorale verso tutti bisognosi: condivide le ore estreme con i condannati a morte ed opera tra i carcerati, cui non fa mancare buone parole e sigari, includendo nel suo servizio anche l'aiuto alle famiglie e il soccorso ai dimessi. Succeduto al Guala, ne perfeziona l'opera, rifiutando sempre ogni titolo onorifico. Grande amico di don Giovanni Bosco (che lo definirà «modello di vita sacerdotale»), lo aiuta materialmente e moralmente nella sua missione. E' patrono dei carcerati e dei condannati a morte. (Avvenire)

Etimologia: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Martirologio Romano: A Torino, san Giuseppe Cafasso, sacerdote, che si dedicò alla formazione spirituale e culturale dei futuri sacerdoti e a riconciliare a Dio i poveri carcerati e i condannati a morte.


Ascolta da RadioRai:
   Ascolta da RadioMaria:
  
«Quando varcai per la prima volta la soglia del carcere, mi sentivo disorientato. Vagavo nei corridoi senza sole, incerto sul da farsi; attraverso gli spioncini delle pesanti porte mi affacciavo alle celle scrutando chi vi abitava: visi spettrali, con i segni profondi della sofferenza, della fame, della paura. Poi, dopo pochi giorni dal mio primo ingresso nel carcere, mi si disse che avrei dovuto, l’indomani, assistere un condannato a morte. Il “mio” primo condannato a morte!». Inizia così il racconto della prima volta che padre Ruggero Cipolla (1911-2006), francescano e per cinquant’anni cappellano delle carceri giudiziarie di Torino, scriveva nel 1960. La toccante testimonianza prosegue: «Sentii nell’anima uno schianto, crebbe la mia incertezza. E mi aggrappai disperatamente al confortatore per eccellenza dei condannati a morte: san Giuseppe Cafasso, il prete della forca».
Oggi Benedetto XVI del santo dei carcerati afferma: «Conosceva la teologia morale, ma conosceva altrettanto le situazioni e il cuore della gente, del cui bene si faceva carico, come il buon pastore. Quanti avevano la grazia di stargli vicino ne erano trasformati in altrettanti buoni pastori e in validi confessori. Indicava con chiarezza a tutti i sacerdoti la santità da raggiungere proprio nel ministero pastorale». Sono parole che il Santo Padre ha pronunciato durante la Catechesi dell' Udienza generale del 30 giugno 2010, a pochi giorni dalla chiusura dell’Anno sacerdotale (11 giugno 2010), un tempo di grazia, che ha portato e porterà frutti preziosi alla Chiesa, e che ha visto, per volontà di Benedetto XVI, il Santo Curato d’Ars proposto come principale modello dei ministri di Dio.
Proprio quest’anno ricorrono duecento anni dalla nascita di questo Homo Dei e da poco si è chiuso il 150° del suo dies natalis. Della sua morte egli, con profonda umiltà, affermava: «Disceso che sarò nel sepolcro, desidero e prego il Signore a fare perire sulla terra, la mia memoria, sicché mai più alcuno abbia a pensare di me, fuori di quelle preghiere che attendo dalla carità dei fedeli. E accetto in penitenza dei miei peccati tutto quello che dopo la mia morte si dirà nel mondo contro di me». Era nel mondo, ma non fu del mondo. La sua memoria, nonostante la sua aspirazione fosse quella di sparire dai ricordi, rimane viva non per volontà di qualcuno, visto che non ha fondato alcuna congregazione o istituto religioso, ma per la forza di ciò che è stato ed ha rappresentato.
Nacque a Castelnuovo d’Asti, oggi Castelnuovo Don Bosco, il 15 gennaio 1811 e morì a Torino il 23 giugno 1860. Era il terzo di tre figli: la sorella Marianna divenne la madre del beato Giuseppe Allamano (1851-1926), rettore del Convitto e del Santuario della Consolata, nonché fondatore dell’Istituto Missioni della Consolata.
Giovanni Bosco (1815–1888), di soli quattro anni più giovane e suo compaesano, una volta invitò il giovane don Cafasso a vedere i giochi della fiera di Castelnuovo ed ebbe di tutta risposta: «Colui che abbraccia lo stato ecclesiastico si vende al Signore: e di quanto c’è nel mondo, nulla deve più stargli a cuore». Fu sempre gracile e minuto, «era quasi tutto nella voce», diceva don Bosco, eppure fu un gigante nello spirito.
Riceve l’ordinazione sacerdotale il 21 settembre 1833 nella chiesa dell’Arcivescovado di Torino e l’anno dopo avviene l’incontro con don Luigi Guala (1775–1848), dalla spiritualità ignaziana, insigne moralista e teologo, il quale ricevette una salda preparazione all’apostolato dal venerabile Pio Brunone Lanteri (1759-1830) di cui fu collaboratore e con il quale fondò il Convitto Ecclesiastio di San Franceso d’Assisi, volto alla formazione del clero torinese, dove don Cafasso entrò nel 1834.
Nella terra subalpina prendono vita i moti risorgimentali e la Chiesa, duramente perseguitata sotto Napoleone, ora si appresta, dopo il Regno del cattolico Re Carlo Alberto (1798–1849), salito al trono nel 1831 (molto attento alla riforma del clero, avendo stabilito un fecondo accordo con Papa Gregorio XVI) a ricevere feroci attacchi dal governo liberale e massonico.
Dal punto di vista spirituale nel Regno di Sardegna è influente l’ École française, quella del teologo e Cardinale Pierre de Bérulle (1575-1629), uno dei protagonisti dell’età della controriforma che, ispirandosi a san Filippo Neri (1515-1595), fondò a Parigi l'Oratorio di Gesù e Maria Immacolata. Bérulle, come Jean-Jacques Olier (1608–1657), Charles de Condren (1588-1641), Giovanni Eudes (1601– 1680), Francesco di Sales (1567- 1622) e Vincenzo de’ Paoli (1581–1660), ha vissuto e lottato per restituire splendore e grandezza allo stato sacerdotale, il «primo ordine del regno», che prima del Concilio di Trento era in larghi strati caduto nella rilassatezza. La formazione sacerdotale avvenne così, per don Cafasso, con gli insegnamenti dei maestri del Grand Siècle, e alle figure ricordate si affiancarono sant’Alfonso Maria de’ Liguori, maestro di morale, e san Carlo Borromeo, maestro di zelo. Cafasso fu anche erede di Nicola Diessbach (1732 – 1798), nativo di Berna, convertito dal calvinismo e fondatore dell’«Amicizia cristiana», opera che ebbe una felice continuazione proprio nel venerabile Pio Brunone Lanteri.
Padre spirituale, direttore di anime, consigliere di vita ascetica ed ecclesiastica, formatore di sacerdoti, a loro volta formatori di altri preti, religiosi e laici, in una sorprendente ed efficace catena, Cafasso fu rettore per 24 anni del Convitto ecclesiastico, che nel 1870 mutò sede e da via San Francesco si trasferì al santuario della Consolata, dove oggi riposano le sue spoglie.
Le sue lezioni erano attraenti perché costruite sulle verità di Fede e sul sapiente bagaglio di conoscenze, ma anche palpitanti di documentazione raccolta dal vivo nel confessionale, al capezzale dei morenti, nelle missioni predicate al clero e al popolo, e nelle carceri, luogo a lui molto caro. Uomo di sintesi e non di pedanti trattazioni, combatté il rigorismo di matrice giansenista. Voleva fare di ogni sacerdote un uomo di Dio splendente di castità, di scienza, di pietà, di prudenza, di carità; assiduo alla preghiera, alle funzioni religiose, al confessionale, devoto di Maria Santissima e attingente forza dal Santo Sacrificio. Primo dovere del prete, diceva, era quello di essere santo per santificare e che «grande vergogna che un sacerdote si lasci anche solo eguagliare in virtù da un laico! Che onta per noi!».
Fu confessore della serva di Dio Giulia Falletti di Barolo (1786-1864) e fra i sacerdoti da lui formati ricordiamo: san Giovanni Bosco, fondatore dei Salesiani e delle Figlie di Maria Ausiliatrice; Giovanni Cocchi (1813–1895), fondatore di uno dei primi oratori di Torino e del Collegio degli Artigianelli; beato Francesco Faà di Bruno (1825-1888), fondatore dell'Opera di Santa Zita e della congregazione delle Suore Minime di Nostra Signora del Suffragio; Gaspare Saccarelli (1817- 1864), fondatore dell’Istituto della Sacra Famiglia; Pietro Merla (1815 -1855), fondatore del Ritiro di San Pietro in Vincoli; Francesco Bono (1834–1914), fondatore dell’Istituto del Santo Natale; beato Clemente Marchisio (1833-1903), fondatore dell’Istituto delle Figlie di San Giuseppe; Lorenzo Prinotti (1834-1899), fondatore dell’Istituto dei sordomuti poveri; Adolfo Barberis (1884–1967), fondatore delle Suore del Famulato Cristiano.
Operò soprattutto per la conversione dei peccatori, dei grandi peccatori. Aveva l’ambizione di portare i condannati a morte subito in Paradiso, senza passare per il Purgatorio e per il recupero dei carcerati, è proprio il caso di dirlo, fece più lui di mille legislazioni.
Era assiduo delle prigioni Senatorie, tanto da rimanervi fino a tarda notte, a volte tutta la notte. Portava sigari e tabacco da fiutare, al posto della calce che i carcerati raschiavano dai muri; ma soprattutto portava alla conversione ladri e assassini efferati. Erano lenti e tormentati pentimenti, altre volte, invece, si trattava di conversioni immediate, che avvenivano anche a pochi istanti prima dell’impiccagione. Il «prete della forca» usava immensa misericordia, possedendo un’intuizione prodigiosa dei cuori, e trattava i suoi «santi impiccati» come «galantuomini», tanto che il colpevole sentiva così forte l’amore paterno da piegarsi e desiderare di morire per arrivare presto in Paradiso con Gesù, come il buon Ladrone, crocefisso sul Calvario.
Intanto le aspirazioni patriottiche si ponevano in contrasto con le intenzioni giacobine e anticristiane. Clero e fedeli venivano spinti a prendere posizioni estreme e Cafasso adottò una linea precisa: intransigente sulla dottrina e sui principi, schierato con la Chiesa e con il Papa, ma ugualmente comprensivo con le anime e saggio moderatore nell’ordine pratico. Al clero piemontese raccomandò di non invischiarsi nelle questioni politiche, perciò non si trovarono più sacerdoti  in Parlamento, approvanti le leggi regaliste o pronti a professare l’errore dai pulpiti.
Dotato nella docenza di calma, accortezza e prudenza, fu, soprattutto, il grande nemico del peccato, come ha ancora ricordato Benedetto XVI: «Dalla sua cattedra di teologia morale educava ad essere buoni confessori e direttori spirituali, preoccupati del vero bene spirituale della persona, animati da grande equilibrio nel far sentire la misericordia di Dio e, allo stesso tempo, un acuto e vivo senso del peccato».

Autore: Cristina Siccar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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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chesi di Benedetto XVI durante l'Udienza Generale del 30 giugno 2010

Cari fratelli e sorelle,
abbiamo da poco concluso l’Anno Sacerdotale: un tempo di grazia, che ha portato e porterà frutti preziosi alla Chiesa; un’opportunità per ricordare nella preghiera tutti coloro che hanno risposto a questa particolare vocazione. Ci hanno accompagnato in questo cammino, come modelli e intercessori, il Santo Curato d’Ars ed altre figure di santi sacerdoti, vere luci nella storia della Chiesa. Oggi, come ho annunciato mercoledì scorso, vorrei ricordarne un’altra, che spicca sul gruppo dei "Santi sociali" nella Torino dell’Ottocento: si tratta di san Giuseppe Cafasso.
Il suo ricordo appare doveroso perché proprio una settimana fa ricorreva il 150° anniversario della morte, avvenuta nel capoluogo piemontese il 23 giugno 1860, all’età di 49 anni. Inoltre, mi piace ricordare che il Papa Pio XI, il 1° novembre 1924, approvando i miracoli per la canonizzazione di san Giovanni Maria Vianney e pubblicando il decreto di autorizzazione per la beatificazione del Cafasso, accostò queste due figure di sacerdoti con le seguenti parole: "Non senza una speciale e benefica disposizione della Divina Bontà abbiamo assistito a questo sorgere sull’orizzonte della Chiesa cattolica di nuovi astri, il parroco d’Ars, ed il Venerabile Servo di Dio, Giuseppe Cafasso. Proprio queste due belle, care, provvidamente opportune figure ci si dovevano oggi presentare; piccola e umile, povera e semplice, ma altrettanto gloriosa la figura del parroco d’Ars, e l’altra bella, grande, complessa, ricca figura di sacerdote, maestro e formatore di sacerdoti, il Venerabile Giuseppe Cafasso". Si tratta di circostanze che ci offrono l’occasione per conoscere il messaggio, vivo e attuale, che emerge dalla vita di questo santo. Egli non fu parroco come il curato d’Ars, ma fu soprattutto formatore di parroci e preti diocesani, anzi di preti santi, tra i quali san Giovanni Bosco. Non fondò, come gli altri santi sacerdoti dell’Ottocento piemontese, istituti religiosi, perché la sua "fondazione" fu la "scuola di vita e di santità sacerdotale" che realizzò, con l’esempio e l’insegnamento, nel "Convitto Ecclesiastico di S. Francesco d’Assisi" a Torino.
Giuseppe Cafasso nasce a Castelnuovo d’Asti, lo stesso paese di san Giovanni Bosco, il 15 gennaio 1811. E’ il terzo di quattro figli. L’ultima, la sorella Marianna, sarà la mamma del beato Giuseppe Allamano, fondatore dei Missionari e delle Missionarie della Consolata. Nasce nella Piemonte ottocentesca caratterizzata da gravi problemi sociali, ma anche da tanti Santi che si impegnavano a porvi rimedio. Essi erano legati tra loro da un amore totale a Cristo e da una profonda carità verso i più poveri: la grazia del Signore sa diffondere e moltiplicare i semi di santità! Il Cafasso compì gli studi secondari e il biennio di filosofia nel Collegio di Chieri e, nel 1830, passò al Seminario teologico, dove, nel 1833, venne ordinato sacerdote. Quattro mesi più tardi fece il suo ingresso nel luogo che per lui resterà la fondamentale ed unica "tappa" della sua vita sacerdotale: il "Convitto Ecclesiastico di S. Francesco d’Assisi" a Torino. Entrato per perfezionarsi nella pastorale, qui egli mise a frutto le sue doti di direttore spirituale e il suo grande spirito di carità. Il Convitto, infatti, non era soltanto una scuola di teologia morale, dove i giovani preti, provenienti soprattutto dalla campagna, imparavano a confessare e a predicare, ma era anche una vera e propria scuola di vita sacerdotale, dove i presbiteri si formavano nella spiritualità di sant’Ignazio di Loyola e nella teologia morale e pastorale del grande Vescovo sant’Alfonso Maria de’ Liguori. Il tipo di prete che il Cafasso incontrò al Convitto e che egli stesso contribuì a rafforzare – soprattutto come Rettore - era quello del vero pastore con una ricca vita interiore e un profondo zelo nella cura pastorale: fedele alla preghiera, impegnato nella predicazione, nella catechesi, dedito alla celebrazione dell’Eucarestia e al ministero della Confessione, secondo il modello incarnato da san Carlo Borromeo, da san Francesco di Sales e promosso dal Concilio di Trento. Una felice espressione di san Giovanni Bosco, sintetizza il senso del lavoro educativo in quella Comunità: "al Convitto si imparava ad essere preti".
San Giuseppe Cafasso cercò di realizzare questo modello nella formazione dei giovani sacerdoti, affinché, a loro volta, diventassero formatori di altri preti, religiosi e laici, secondo una speciale ed efficace catena. Dalla sua cattedra di teologia morale educava ad essere buoni confessori e direttori spirituali, preoccupati del vero bene spirituale della persona, animati da grande equilibrio nel far sentire la misericordia di Dio e, allo stesso tempo, un acuto e vivo senso del peccato. Tre erano le virtù principali del Cafasso docente, come ricorda san Giovanni Bosco: calma, accortezza e prudenza. Per lui la verifica dell’insegnamento trasmesso era costituita dal ministero della confessione, alla quale egli stesso dedicava molte ore della giornata; a lui accorrevano vescovi, sacerdoti, religiosi, laici eminenti e gente semplice: a tutti sapeva offrire il tempo necessario. Di molti, poi, che divennero santi e fondatori di istituti religiosi, egli fu sapiente consigliere spirituale. Il suo insegnamento non era mai astratto, basato soltanto sui libri che si utilizzavano in quel tempo, ma nasceva dall’esperienza viva della misericordia di Dio e dalla profonda conoscenza dell’animo umano acquisita nel lungo tempo trascorso in confessionale e nella direzione spirituale: la sua era una vera scuola di vita sacerdotale.
Il suo segreto era semplice: essere un uomo di Dio; fare, nelle piccole azioni quotidiane, "quello che può tornare a maggior gloria di Dio e a vantaggio delle anime". Amava in modo totale il Signore, era animato da una fede ben radicata, sostenuto da una profonda e prolungata preghiera, viveva una sincera carità verso tutti. Conosceva la teologia morale, ma conosceva altrettanto le situazioni e il cuore della gente, del cui bene si faceva carico, come il buon pastore. Quanti avevano la grazia di stargli vicino ne erano trasformati in altrettanti buoni pastori e in validi confessori. Indicava con chiarezza a tutti i sacerdoti la santità da raggiungere proprio nel ministero pastorale. Il beato don Clemente Marchisio, fondatore delle Figlie di san Giuseppe, affermava: "Entrai in Convitto essendo un gran birichino e un capo sventato, senza sapere cosa volesse dire essere prete, e ne uscii affatto diverso, pienamente compreso della dignità del sacerdote". Quanti sacerdoti furono da lui formati nel Convitto e poi seguiti spiritualmente! Tra questi – come ho già detto - emerge san Giovanni Bosco, che lo ebbe come direttore spirituale per ben 25 anni, dal 1835 al 1860: prima come chierico, poi come prete e infine come fondatore. Tutte le scelte fondamentali della vita di san Giovanni Bosco ebbero come consigliere e guida san Giuseppe Cafasso, ma in un modo ben preciso: il Cafasso non cercò mai di formare in don Bosco un discepolo "a sua immagine e somiglianza" e don Bosco non copiò il Cafasso; lo imitò certo nelle virtù umane e sacerdotali - definendolo "modello di vita sacerdotale" -, ma secondo le proprie personali attitudini e la propria peculiare vocazione; un segno della saggezza del maestro spirituale e dell’intelligenza del discepolo: il primo non si impose sul secondo, ma lo rispettò nella sua personalità e lo aiutò a leggere quale fosse la volontà di Dio su di lui. Cari amici, è questo un insegnamento prezioso per tutti coloro che sono impegnati nella formazione ed educazione delle giovani generazioni ed è anche un forte richiamo di quanto sia importante avere una guida spirituale nella propria vita, che aiuti a capire ciò che Dio vuole da noi. Con semplicità e profondità, il nostro Santo affermava: "Tutta la santità, la perfezione e il profitto di una persona sta nel fare perfettamente la volontà di Dio (…). Felici noi se giungessimo a versare così il nostro cuore dentro quello di Dio, unire talmente i nostri desideri, la nostra volontà alla sua da formare ed un cuore ed una volontà sola: volere quello che Dio vuole, volerlo in quel modo, in quel tempo, in quelle circostanze che vuole Lui e volere tutto ciò non per altro se non perché così vuole Iddio".
Ma un altro elemento caratterizza il ministero del nostro Santo: l’attenzione agli ultimi, in particolare ai carcerati, che nella Torino ottocentesca vivevano in luoghi disumani e disumanizzanti. Anche in questo delicato servizio, svolto per più di vent’anni, egli fu sempre il buon pastore, comprensivo e compassionevole: qualità percepita dai detenuti, che finivano per essere conquistati da quell’amore sincero, la cui origine era Dio stesso. La semplice presenza del Cafasso faceva del bene: rasserenava, toccava i cuori induriti dalle vicende della vita e soprattutto illuminava e scuoteva le coscienze indifferenti. Nei primi tempi del suo ministero in mezzo ai carcerati, egli ricorreva spesso alle grandi predicazioni che arrivavano a coinvolgere quasi tutta la popolazione carceraria. Con il passare del tempo, privilegiò la catechesi spicciola, fatta nei colloqui e negli incontri personali: rispettoso delle vicende di ciascuno, affrontava i grandi temi della vita cristiana, parlando della confidenza in Dio, dell’adesione alla Sua volontà, dell’utilità della preghiera e dei sacramenti, il cui punto di arrivo è la Confessione, l’incontro con Dio fattosi per noi misericordia infinita. I condannati a morte furono oggetto di specialissime cure umane e spirituali. Egli accompagnò al patibolo, dopo averli confessati ed aver amministrato loro l’Eucaristia, 57 condannati a morte. Li accompagnava con profondo amore fino all’ultimo respiro della loro esistenza terrena.
Morì il 23 giugno 1860, dopo una vita offerta interamente al Signore e consumata per il prossimo. Il mio Predecessore, il venerabile servo di Dio Papa Pio XII, il 9 aprile 1948, lo proclamò patrono delle carceri italiane e, con l’Esortazione apostolica Menti nostrae, il 23 settembre 1950, lo propose come modello ai sacerdoti impegnati nella Confessione e nella direzione spirituale.
Cari fratelli e sorelle, san Giuseppe Cafasso sia un richiamo per tutti ad intensificare il cammino verso la perfezione della vita cristiana, la santità; in particolare, ricordi ai sacerdoti l’importanza di dedicare tempo al Sacramento della Riconciliazione e alla direzione spirituale, e a tutti l’attenzione che dobbiamo avere verso i più bisognosi. Ci aiuti l’intercessione della Beata Vergine Maria, di cui san Giuseppe Cafasso era devotissimo e che chiamava "la nostra cara Madre, la nostra consolazione, la nostra speranza".


Spunti bibliografici su San Cafasso Giuseppe a cura di LibreriadelSanto.it

Siccardi Cristina, Giuseppe Cafasso, Paoline Edizioni, 2011 - pagine
Cafasso Giuseppe, Esercizi spirituali al clero. Istruzioni, Effatà, 2008 - 288 pagine
Cafasso Giuseppe, Predicazione varia al popolo. Istruzioni e..., Effatà, 2006 - 368 pagine
Cafasso Giuseppe, Missioni al popolo. Meditazioni, Effatà, 2002 - 434 pagine
Altri suggerime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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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giunto il 2011-03-19

 

 

Saint Joseph Cafasso
 
Also known as
Priest of the Gallows

Memorial
23 January
Profile
Born with a deformed spine, and into a wealthy peasant family; he was short in stature and crippled throughout his life. Ordained in 1833. Professor of moral theology at ecclesiastical college at Turin in 1836. Superior of the college from 1846 to 1860. Retreat house director. Pastor of Saint Francis Church in 1848. Renowned confessor. Promoted devotion to the Blessed Sacrament. Friend of and advisor to Saint John Bosco, having first met him when Joseph was 12 years old; Saint John wrote a biography of Saint Joseph. Uncle of Blessed Joseph Allamano. Founded religious fellowships.

Worked to reform prisons and prisoners, and to improve prison conditions in Turin. Ministered to condemned prisoners, winning converts Once escorted 60 newly converted condemned to the gallows. Since many of the prisoners were hanged immediately after confessing and receiving absolution, Joseph referred to them as "hanged saints".

Born
1811 at Castelnuovo d'Asti, Italy
Died
23 June 1860 at Turin, Italy of pneumonia, a stomach hemorrhage, and complications of his congenital medical problems; his will bequeathed everything to aid the ministry of Saint Joseph Benedict Cottolengo; Saint John Bosco preached the funeral Mass homily

Name Meaning
whom the Lord adds (Joseph)

Canonized
1947 by Pope Pius XII

Patronage
 captives
 imprisoned people
 prisoners
 prisons
Storefront
Commercial Links related to Saint Joseph Cafasso
Additional Information
 Book of Saints, by the Monks of Ramsgate
 Catholic Exchange
 Daughters of Saint Paul
 For All The Saints, by Katherine Rabenstein
 Google Directory
 Our Sunday Visitor's Encyclopedia of Saints, by Matthew Bunson, Margaret Bunson, and Stephen Bunson
 Vietnamese Eucharistic Youth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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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s
A single word from him - a look, a smile, his very presence - sufficed to dispel melancholy, drive away temptation and produce holy resolution in the soul.

-Saint John Bosco, writing about Saint 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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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born to love, we live to love, and we will die to love still more.

-Saint Joseph Caf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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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is man who in the world is called an ecclesiastic, a priest? Who is this personage whom some bless and others curse? Who is he whom the whole world talks about and criticizes, and who is the subject of discussion by all pens and all tongues?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at name which resounds in every corner of the world? What is a priest? In order to define clearly what he is, I shall avail myself of the distinctions that Saint Bernard made concerning ecclesiastics and shall consider him in his nature, in his person, in his habits. Quid in natura, quis in persona, qualis in moribus! In his nature he is a man like others. In his person, his dignity is above that of all other men in the world. In his conduct and habits, he should be a man totally different from all others as he is by his dignity and office. These are the three points which I propose for your consideration.

-Saint Joseph Caf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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