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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i caritas et amor 혹은 Ubi caritas est vera? 540_ 773_love 843_ 1094_ [애덕의 완미] perfection of ch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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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0 ㅣ No.1704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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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다음은, 2016년 7월 2일 밤 8시에 의정부교구 일산성당에서 개최되었던, 의정부교구 세이트 에프렝 양상블의 제4차 정기연주회에서 연주된, 작곡가 Maurice Durufle (1902-1986) 작곡의 Ubi Caritas 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2.htm

(발췌 시작)

2-1. Ubi Caritas by Maurice Durufle (1902-1986)

연주 시간: 약 2:32.

 

주: 일부 스마트폰에서 바로 위의 오디오 덱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다음의 링크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링크 주소: http://pds.catholic.or.kr/Archives/300/1/gnattboard/954/69/05_Ubi_Caritas_M_Durufle.mp3

 

이번 연주회의 제1부를 성공적으로 연주한 뒤에 약 10분 정도의 휴식 시간을 가졌으며, 위의 곡은 제2부 첫 번째 곡인데, 참 잘 불렀다는 생각입니다.

 

이 곡은 성 목요일 세족례를 위한 교창송(antiphones)들 중의 하나로서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사용해온 그레고리오 찬미가의 라틴어 가사를 또한 가사로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1)

 

무반주 다성음악 연주의 경우에 각 파트별로 넉넉한 호흡 및 정확한 음정의 유지가 대단히 중요한데, 비록 연주회 공간의 음향이, 조금 과장하여 말하면, "boom box"의 소리처럼 쉽게 "웅웅"하면서 마구 퍼져 흩어지는 경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여건 아래에서도 차분하고 그리고 깨끗하게 잘 불렀다는 생각입니다.

 

테너 파트와 베이스 파트가 각각 둘로 나누어지기에 6성부 곡인데 (즉, 무대에 선 형제님들의 숫자를 고려할 때에 쉽지 않은 곡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다른 파트들과 잘 조화를 이루는 형제님들의 푸근하고 따뜻한 음성이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자매님들에 의한 그레고리오 선율의 도입 부분이 조금 더 가볍고 더 잘 모아진 더 깨끗한 단선율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아쉬움은, 어쩌면 이 부분까지 잘 불렀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라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 개인의 과도한/지나친 욕망(inordinate desire)이 요구하는 아쉬움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하였던 작곡가 M Durufle는 네 편의 모테트 곡들로 구성된 Quatre Motets, Op. 10과 한 편의 장례 미사곡 Requiem, Op 9을 남겼는데, 이들 모두 대단히 훌륭한 곡들로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연주된 곡은 이들 네 개의 모테트 곡들 중의 첫 번째 곡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족입니다만,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경우에, 2004년 5월 2일에 미국 펜실베니아주 State College Choral Society 봄 연주회 (장소: Grace Lutheran Church, State College, PA)에서, 1st Tenor Member로서, 참가하여 위에서 말씀드린 곡들 전부를 부른 경험이 있습니다. 만 12년도 더 지나서 당시의 연주회 프로그램과 악보들을 꺼집어 내어 들여다 보니, 세월이 참으로 무심하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연합 성가대의 인원이 약 150명이었는데, 이 연주회의 무대에 서기 위한 오디션 통과 후 들은 첫 마디가, 악보 구입 안내였습니다. 연주될 곡들의 악보들 모두를 반드시 구입하여야만 연주회 무대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다성음악 곡들을 부르는 상상을 해 보십시오. 대단히 커다란 바위들이 그러나 가볍게 사푼 사푼 굴러가는 듯한, 평소에 합창단 연주회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소리를, 대단히 인상적인 소리들의 어우러짐 속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당시의 연주회 모습과 뒷풀이 모임을 담은 사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능이 보강된 사진첩 제공자: 필자]:

http://org.catholic.or.kr/conservatory/frames/prelude2SCCS2004SpringConcert.htm [PC 사용자]

http://org.catholic.or.kr/conservatory/frames/SCCS2004SpringConcert.htm [스마트폰/PC 사용자]

 

다른 한편으로, 이곡은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즉, "Where charity(caritas) and love(amor) are, God is there", 즉, "애덕(caritas)사랑(love)이 있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옵니다"로 시작하는데, 그러나 우리말본 성경들과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서 "caritas (charity)""amor (love)" 들 다를 모두 "사랑"이라는 동일한 순수한 우리말 단어로 번역하고 있기에 국내의 교우님들께서 그렇게 번역된 우리말본 문헌들만을 읽고서는 "이 사랑이 저 사랑과 어떻게 다른지"를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에(대단히 심각한 수준의 번역 오류라 아니 할 수 없음), 이 글이 또한 이들 두 "사랑"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에 대하여 제대로 학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를 들어, 그동안 국내에서, 이 기도문 중의 caritas et amor, 즉, 애덕(caritas)사랑(love) 을 "사랑"과 "사랑"이라고 번역할 수는 없다 보니, 이들 둘 다를 임의적으로 뭉쳐서, "참사랑"으로 번역해 온 모양인데,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들 두 "사랑"들 사이의 차이점을 모르는 분이,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하여, 심지어 개인에 따라 대단히 주관적일 수도 있는 "참"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면서까지, 의역 번역(free translaltion)을 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악보에 이 곡의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을 해 주신 신호철 음악감독께 감사드립니다.

 

이 가사에서 말하는 "amor(love, 사랑)"은, 이 라틴어 교창송의 두 번째 가사 중의 "Christi amor", 즉, "Christ's love", 즉,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구체적인 표현 때문에,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의 신성(神性)적 사랑(amour divin, divine love)에서 말해지고 있는 사랑이며, 따라서, "love of concupiscence"를 말하는 종(種)적 사랑(special amor)만이 아니고, 네 종류의 종(種)적 사랑들로 구성되는 속(屬)적 사랑(generic amor)을 말함을 알 수 있습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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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도록 하라:
https://en.wikipedia.org/wiki/Ubi_caritas

 

(*2) 게시자 주: 사실, 영어권 개신교 측에서 성경 번역 시에 주도적으로 라틴어 "amor"를 영어로 "love"로 번역해온 것부터, 왜냐하면 이들 두 단어들의 어원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들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http://bbs.catholic.or.kr/home/bbs_list.asp?menu=question_and_answer&PSIZE=100
&searchkey=N&searchtext=%EC%82%AC%EB%9E%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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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추가 일자: 2016년 7월 20일]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위의 (#) 부분을 작성하면서, 한편으론, 상당히 의아해 하였는데, (*1) 게시자 주에 안내된 자료를 잘 읽어보면, 위의 노래의 가사인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라틴어 문장이, 과거에, "Ubi caritas est vera, Deus ibi est" [즉, (졸역) Where charity is true, God is there, 즉, (졸역) 애덕이 충만하게(fully) 구현(具現)된/실재(實在)하게 된(vera, true)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나이다]이었다는 언급이 주어져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에 의한 졸번역인 "애덕이 충만하게(fully) 구현(具現)된/실재(實在)하게 된(vera, true)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나이다"라는 문장이, 위에서 이미 우리말 번역 오류라고 필자가 지적한 국내에 알려진 기존의 번역문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나이다"와 동일한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하지 않음에 또한 주목하십시오.

 

사실 이 부분에 대하여 어제 밤에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는데, 그러나 들여다본 바를 이글에다 무작정 추가하는 것은, 관람기이어야 하는 이 글이 더 길어질뿐만이 아니라 또한 일종의 여담/벗어남(digression)이므로, 이글의 주된 부분인 연주회 실황 음악 감상을 주되게 원하는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어쩌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필자의 판단에 따라, 별도의 글에서 다루고자 하오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약간 수고스럼더라도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여 계속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주: 이 글의 주소입니다]

[이상, 2016년 7월 20일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끝)

 

2.

2-1. 다음의 주소에 있는 설명을 우선 읽도록 합시다:

 

출처: http://www.preces-latinae.org/thesaurus/Hymni/UbiCaritas.html

(발췌 시작)

Ubi Cartitas is taken from the antiphons sung during the ceremony of the Washing of the Feet at the Mass of the Last Supper on Holy Thursday. As is the entire Mass of the Last Supper, this hymn is intimately connected with the Eucharist, and is thus often used during the Exposition of the Blessed Sacrament. Recent tradition has the first line as "Ubi caritas et amor" (where charity and love are), but certain very early manuscripts show "Ubi caritas est vera" (where charity is true). The current Roman Missal favors this later version, while the 1962 Roman Missal and classical music favors the former.

 

Ubi Caritas는 성목요일 최후의 만찬 미사에서 세족례의 경축 동안에 불리는 교창송(antiphons)으로부터 발췌됩니다. 최후의 만찬 미사 전체가 그러하듯이, 이 찬미가는 영성체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이 복된 성사의 현시[즉, 성체 현시] 동안에 자주 사용됩니다. (i) 최근의 전통은 첫 번째 줄을 "Ubi caritas et amor" (애덕과 사랑이 있는 바로 거기에)를 가지나, 그러나 (ii) 구체적인 매우 오래된 사본들은 "Ubi caritas est vera" (애덕이 충만하게(fully) 구현(具現)된/실재(實在)하게 된(vera, true) 바로 거기에)"를 보여줍니다.(*1) 현재의 로마 미사 경문은 바로 이 후자 본[즉, (ii)에 있는 표현]을 선호하나,(*2) 이와는 달리 1962년 미사 경문과 고전 음악은 전자[즉, (i)에 있는 표현]를 선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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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예를 들어, 다음의 제2-3항을 보라.

 

(*2) 게시자 주: 다음의 교황청 유관 부서 발 교령(Decree)을 참조하라: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
rc_con_ccdds_doc_20160106_commento-decreto-lavanda-piedi_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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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2. 실제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다음과 같이, 위의 (i) 혹은 (ii)에 있는 라틴어 표현들이 그 제목이 "Ubi caritas"인, 동일한 그레고리오 선율를 가진, 찬미가의 가사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2-3. 다른 한편으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소장 중인 "Graduale Triplex" 제168쪽과 제 887쪽에는 "Ubi caritas est vera"가 있는데, 특히 제168쪽에 있는 이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 바로 위 오른쪽에 다음과 같은 언급이 주어져 있습니다:

 

(발췌 시작)

Auctor ignotus in Italia (saec. IX-X?)

 

이탈리아에서 알려지지 않은 저자 (9-10세기 경?)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2-4. 그리고,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Ubi caritas est vera"를 가사로 가지는 그레고리오 찬미가를, 악보를 보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영어 번역문에 이미 지적한 문제[즉, true charity( 애덕)로 번역된 문제]가 또한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gregorian-chant-hymns.com/hymns-2/ubi-caritas.html 

 

3.

3-1.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23주일매년 연중 제19주간 수요일복음 말씀(마태오 18,15-10)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한 것인데, 마태오 복음서 18,19-20에 대한 해설에서, 성 목요일 전례가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를 읊조리는데, 이 읊조림은 그 영감을 1요한 4,12의 본문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9_wed.htm

(발췌 시작)

19-20.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where charity and love resides, there God is", the Holy Thursday liturgy intones, drawing its inspiration from the sacred text of 1 John 4:12. For it is true that love is inconceivable if there is only one person: it implies the presence of two or more (cf. Aquinas, "Commentary on St. Matthew", 18:19-20). And so it is that when Christians meet together in the name of Christ for the purpose of prayer, our Lord is present among them, pleased to listen to the unanimous prayer of His disciples: "All those with one accord devoted themselves to prayer, together with the women and Mary the mother of Jesus" (Acts 1:14). This is why the Church from the very beginning has practiced communal prayer (cf. Acts 12:5). There are religious practices -- few, short, daily "that have always been lived in Christian families and which I think are marvelous -- grace at meals, morning and night prayers, the family rosary (even though nowadays this devotion to our Lady has been criticized by some people). Customs vary from place to place, but I think one should always encourage some acts of piety which the family can do together in a simple and natural fashion" (St. J. Escriva, "Conversations", 103).

 

19-20.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 애덕(charity)과 [신성적] 사랑(love)이 거주하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where charity and love resides, there God is)"(*)를, 성 목요일 전례(the Holy Thursday liturgy)가 읊조리는데(intones), 이 읊조림은 그 영감(inspiration) 1요한 4,12의 성스러운 본문으로부터 인용한 것입니다. 이는 사랑(love)은, 만약에 오로지 한 명의 인격(one person)만 있다면, 인지(人智)가 불가능하고(inconceivable), 그리고 사랑[이라는 관계의 상태(relationship)를 나타내는 개념][그 말단들로서] 둘 혹은 더 많은 인격들의 현존을 의미함(implies)이 참(true)이기 때문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Aquinas), "Commentary on St. Matthew," 18,19-20를 참조하라]. 그리하여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만날 때에, 우리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당신의 제자들의 이구동성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즐거워하시면서, 그들 사이에 현존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사도행전 1,14). 바로 이것이 교회가 바로 그 처음부터 공동체 기도(communal prayer)(**)를 실천해 왔던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12,5를 참조하라). "식사들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grace at meals), 아침과 밤 기도들, [비록 요즈음에 우리의 여인(our Lady, 즉 성모님)에 대한 바로 이러한 신심이 비록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비난받아 왔기는 하나] 가족 묵주기도(the family rosary) 등의 -- 그리스도인들의 가족들 안에서 항상 계속되어 온(have been lived in)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경이로운, 소수의, 짧은, 날마다인 --  경신덕적 실천/관습(religious practices)들이 있습니다. 관례(customs)들은 장소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vary), 그러나 가족이 간단하고 그리고 자연적 방식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에 기인하는 어떠한 행위(acts)들을 우리가 항상 격려하여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St. J. Escriva), "Conversations",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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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바로 이 문장 자체는 애덕(charity, caritas)[신성적] 사랑
(love, amor)
이 동일한 그 무엇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아님을 또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애덕(charity)과 [신성적] 사랑(love)의 차이점에 대한 글들은 다음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마태오 복음서 18,19-20에 대한 가톨릭 교회측의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주석서들에 주어진 주석들 그리고 이 구절들에 관련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90년 12월 7일자 회칙인 "구세주의 임무(Redemptoris missio)"의 제2장, 제20항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4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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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3-2. 그리고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제1독서(1요한 4,11-18), 가해 예수 성심 대축일 제2독서(1요한 4,7-16), 그리고 나해 부활 제7주일 제2독서(1요한 4,11-16)에 포함되는, 1요한 4,12 전문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piphany_wed.htm

(발췌 시작)

[12] No man has ever seen God; if we love one another, God abides in us and his love is perfected in us.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diligamus)(#1), 하느님께서 우리들 안에 머무르시고 그리하여 그분 사랑 애덕(caritas)(#2)이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완성됩니다 완미하게 됩니다(is perfecte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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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바로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the New Commandment)을 말하고, 따라서, 바로 이 사랑은 소위 말하는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2) 게시자 주: 여기서 "사랑"으로 번역되는 표현이 라틴어 "caritas"에 대응함은, 다음의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새 대중 라틴말 성경(1972년) 해당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newadvent.org/bible/1jo004.htm [주: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 1요한 4,12]

https://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nova-vulgata_nt_epist-i-ioannis_lt.html#4 [주: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1요한 4,12]

 

(#3) 게시자 주:

(1) 전통적 그리스도교 윤리 신학에 있어, 우리들의 성화(sanctification, 즉, 거룩하게 됨)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용어들인 "완전한(complete)""완미한(perfect)"의 차이점을 모를 경우에, 예를 들어,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31항에서 발췌한 다음의 문장을 읽고 그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67.HTM
(발췌 시작)
They complete and perfect the virtues of those who receive them.

(성령의 일곱 선물)은 이 선물을 받아들인 자들의 [자연적 윤리] 덕(the virtues)(*)완전하게 하며(complete) 그리고 완미하게 한다(per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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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에는, 예를 들어, 모든 자연적 윤리덕들의 주된 덕들인 정의(justicce, 의덕), 현명(prudence, 지덕), 절제(temperance, 절덕), 굳셈(fortitude, 용덕)으로 구성된, 사추덕(the four cardinal virtues)들이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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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다음은,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831항의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문인데, 위의 우리말 졸번역문과 얼마나,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라. 추가적으로, 반드시 복수로 번역되어야 하는 "virtues"가 단수 "덕"으로만 번역되었는데, 이것도 또한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츨처: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
110610121307&page=684

(발췌 시작)

성령의 선물은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덕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한다.

(이상, 발췌 끝)

 

(2) "완전(completeness)" 안에서만 오로지 "완미(perfection, 즉, 완전하고 또한 흠/결함/결여가 없음)"가 가능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들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08.htm <----- 필독 권고

 

(3) (번역 오류) 따라서,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새 번역 성경"의 요한 1서 제4장에서, 다음과 같이 교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1요한 4,12에서, 그분 사랑이 완성됩니다 -----> 그분 애덕이 완미(完美)하게 됩니다

1요한 4,17에서,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 애덕이 우리에게서 완미(完美)하게 된다는

1요한 4,18에서, 완전한 사랑은 -----> 완미(完美)한 애덕

1요한 4,18에서,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 애덕에 있어 완미(完美)하지 못한

 

바로 위의 교체들에서, 사랑이 애덕(caritas)으로 교체되어야 함은, 다음의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새 대충 라틴말 성경(1972년) 해당 본문들로부터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www.newadvent.org/bible/1jo004.htm [주: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

https://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nova-vulgata_nt_epist-i-ioannis_lt.html#4 [주: 새 대중 라틴말 성경(Nava Vulg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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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3-3: 그런데, 다음에 발췌된, 1요한 4,12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할 것입니다:

 

(발췌 시작)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diligamus), 하느님께서 우리들 안에 머무르시고 그리하여 그분 사랑 애덕(caritas)이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완성됩니다 완미하게 됩니다(is perfected).

(이상, 발췌 끝)

 

바로 위에 발췌된 1요한 4,12는 다음을 말합니다: 즉,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러나 피조물들인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하느님이 한 말단을 구성하는 3들 사이의 한 관계의 상태(a relationship)를 말하는 신성적 사랑(divine love)(#1)을 생각함과 함께 이 사랑을 실천하면, 왜냐하면 이 사랑이 하느님을 위한(for), 따라서 그분을 지속적으로 지극히 생각하면서 그분을 내 안에 품어야(cherish) 하는, 사랑(love for God)이기 때문에, 신성적 사랑을 하는 당사자의 심장(heart) 안쪽으로, 성부 하느님의 말씀(Verbun)/내상(內像, 속모상)/내언(內言, 속말)인, 성자(즉,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식(認識)되어(is recognized) 머무르시고, 그리하여 그 결과로, 성자께서 몸소/친히, 3자로 구성되는 사고의 틀(the frame of thought) 혹은 마음의 틀(the frame of mind)의 한 말단이면서 또한 신성적 사랑을 하는 당사자의 심장(heart) 안쪽에 머무르시면서, 신성적 사랑을 하는 피조물인 당사자와 함께, 당신의 애덕(caritas)를 몸소/친히 실천하시므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하느님의 애덕(caritas)이 신성적 사랑을 하는 당사자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완미하게 된다(is perfected)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성자(하느님의 아드님)이란, 바로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형이상학적으로, 성부 하느님의 경우에서처럼, 또한 유비에 의하여(by analogy),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에, 하느님과의 유일한 접촉점인 우리의 심장(heart)(#2) 안에 떠오르는, 바로 그것, 즉, 성부 하느님의 말씀(Verbun)/내상(內像, 속모상)/내언(內言, 속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3)

 

-----

(#1) 게시자 주: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 주어진,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3.htm <----- 필독권고 

 

(#2)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1.htm <----- 필독권고

 

(#3) 게시자 주: 다음을 참조하라: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74-1659_엠마누엘_주니오르_디아스/1636_천주강생성경직해.htm

(발췌 시작)

권9_15_오주야소성탄첨례_126-145 [자시지경: 루카 복음서 2,1-14(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예수 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복음 말씀); 매상지경: 루카 복음서 2,15-20(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예수 성탄 대축일 새벽 미사 복음 말씀); 천명지경: 요한 복음서 1,1-14(1969년에 개정된 지금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복음 말씀)] [(2016년 7월 17일) 주: 천명지경: 요한 복음서 1,1에 대한 각주에서 "말씀(the Word)"으로 번역되는 용어가 "물이붕"(라틴어 Verbum의 음역(transliteration)이라는 생각이며, 이 음역 단어의 의미는 "그대의 벗"임)으로 음역되었는데, 이 "말씀"은 "내언", "내상"을 말한다는 설명과 함께, 이 "말씀"이 곧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를 말한다는 설명이 주어져 있고, 그리고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국립중앙도서관 국가전자도서관" 화면 제공의 우리말본 "성경직해"(1938년 출판) 자료에서, 원문 보기 > vol : 권 1, 본문 제85쪽에서부터 시작하는, "천명성경"에서, "내언(內言)"은 "속말"로 번역되었고 그리고 "내상(內像)"은 "속모상"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설명은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 의하여 제시된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있는 졸글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43.htm (<--- 필독 권고)

(이상, 발췌 끝)

(이상, 게시자 주 3-3 끝)

 

3-3. 또한, 그 해설이 바로 위의 제3-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의 경우에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마태오 복음서 18,19-20를 통하여, 1요한 4,12이, "Ubi caritas est vera, Deus ibi est", 즉, "애덕이 충만하게(fully) 구현(具現)된/실재(實在)하게 된(vera, true)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나이다"의 성경 근거임을 나바르 성경 주석서가 설명하고 있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그런데 이 지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위 말하는, "act of charity(애덕의 행위)"의 한 종류인 "애덕송(愛德誦)"으로 불리는 기도에 대하여 이해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9.htm <----- 클릭 후 제3-2항 필독 권고

 

3-4. (이 글의 첫 번째 결론) 바로 위의 제3-3항에서 말씀드린 바가 무슨 말씀인고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애덕송(愛德誦)"을 공동체 기도(communal prayer)로서 함께 바치면, 마태오 복음서 18,19-20에 의하여, 신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공동체 안에 함께 계실뿐만이 아니라, 또한 더 나아가, 1요한 4,12ㄴ의 가정(hypothesis), 즉,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the New Commandment)을 만족시키므로, 따라서, 바로 그러한 기도를 바치는 공동체 구성원들 안에 하느님[인 예수님께서]께서 계시고 그리하여 그분 애덕이 공동체 구성원들 안에서 [하느님[인 예수님]에 의하여] 완미하게 됩니다(is perfected), 즉, 충만하게 실재하게 됩니다(is fully realized).

 

달리 말하여, 애덕(caritas)은 신성적 사랑(divine love)에 포함되므로(*), 즉, 애덕의 행위를 하는 자들은 신성적 사랑의 행위를 하는 자들에 포함되므로, 따라서 1요한 4,12ㄴ에 의하여, 그러한 자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리하여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 안에서 그분 애덕이 [하느님에 의하여] 완미하게 됩니다, 즉, 충만하게 실재하게 됩니다(is fully realized).

 

-----

(*) 게시자 주: 이것은 다음의 글에서 이미 다루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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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신성적 사랑을 행하는 자들이란, 곧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말하므로,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말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1요한 4,12ㄴ의 가정(hypothesis)을 자동으로(automatically) 만족시키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 안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그리하여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 안에서 [그분] 애덕이 [하느님에 의하여] 완미하게 됩니다, 즉, 충만하게 실재하게 됩니다(is fully realized).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공동체 안에서 애덕이 충만하게 실재하게 되고 그리고 바로 그러한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단락 A).

 

따라서, 교회 안에서 애덕이 충만하게 실재하게 되고 그리고 바로 이 교회 안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단락 B).

 

그런데, 교회 안에서 바로 위의 단락 B공동체 기도(communal prayer)로서 노래 할 때에,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바로 위의 단락 A공동체 기도(communal prayer)로서 노래 할 때에, "교회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라는 표현은 당연히 만족하게 되어, 따라서 이 표현을 굳이 말할/언급할 필요가 없으므로, 드디어,

 

(i) "애덕이 충만하게 실재하게 되는(vera, true)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즉, "Ubi caritas est vera, Deus ibi est"라는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참(true)인 기도문이 마련되었을 것임을 이 글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추론 과정을 거쳐,

 

(ii) "애덕(caritas)사랑(love)이 있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옵니다", 즉,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라는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참(true)인 기도문이 마련되었을 것임을 이 글의 첫 번째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즉, 논리적으로, 마태오 복음서 18,19-20공동체 기도(communal prayer)로서 함께 바치는 "애덕송(愛德誦)"이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유의미한 성경 근거이고, 그리고 바로 이 "애덕송(愛德誦)" 기도에서 행하고/실천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신성적 사랑(amour divin, divine love)의 행위1요한 4,12ㄴ의 가정(hypothesis)을 만족시키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i) "애덕이 충만하게 실재하게 되는(vera, true)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즉, "Ubi caritas est vera, Deus ibi est"라는 공동체 기도문(communal prayer) 그리고 (ii) "애덕(caritas)사랑(love)이 있는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계시옵니다", 즉, "Ubi caritas et amor, Deus ibi est"라는 공동체 기도문(communal prayer), 이들 둘 다가,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참(true)임을 이번 글에서,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하였습니다.

 

3-5.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전례사전"에 제시된 "애덕송(愛德誦)" 기도문을 접할 수 있는데, 

http://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7827

 

이보다는, 바로 위의 제3-4항에서 이 글의 결론으로서 말씀드리고 있는 바를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위의 제3-3항에 안내된 주소에 있는 "애덕송(愛德誦)" 기도문과 그 앞에 주어진 설명을 되도록 많은 분들께서 읽도록 하십시오.

 

 

4. 애덕의 완미(完美)(perfection of charity)필요충분조건들에 대하여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애덕의_완미(完美)(perfection_of_charity)의_필요충분조건들_1704.htm (클릭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위의 제3항에서 고찰한 바를 잘 들여다 보면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4-1. 왜냐하면 애덕이 신성적 사랑에 포함되므로, 신성적 사랑을 행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애덕을 실천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 신성적 사랑을 행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당사자의 심장 안이 애덕으로 완미하게 채워질 수 있다.

 

따라서, 신성적 사랑을 완미하게 행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당사자의 심장 안이 애덕으로 완미하게 채워질 수 있다, 즉, 아무런 결함 없이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다.

 

4-2. 역으로(conversely), 1요한 4,12ㄴ에 의하여, 신성적 사랑을 행하면, 당사자의 심장 안의 애덕이 완미하게 된다.

 

4-3. (이 글의 두 번째 결론) 따라서, 바로 위의 제4-1항제4-2항에 의하여,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사자의 심장(heart)이 애덕의 완미(完美)(perfection of charity)에 도달하게 됨필요충분조건

신성적 사랑의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의 완미(perfection)이다,

즉, 예수님의 새 계명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하는 것이다,

 

5.

5-1. 다른 한편으로, 한 사람의 거룩함(holiness, 聖性)이란 곧 그 사람의 애덕의 완미(完美)를 말함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의 제7항에서 이미 함께 고찰하였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33.htm <----- 클릭 후 제7항 필독 권고

 

또한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들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9.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1.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93.htm <----- 필독 권고

 

5-2. (이 글의 세 번째 결론) 따라서,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됨(holiness, 聖性),

즉, 당사자의 심장(heart)이 애덕의 완미(perfection of charity)에 도달하게 됨
[주: 이를 위한 충분조건 한 개가 1요한 4,12에 제시되어 있음]

필요충분조건

신성적 사랑의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의 완미(perfectiion),

즉, 예수님의 새 계명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함

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1월 4일]

5-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예수님의 새 계명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하는 자들[주: 한 개의 실천 원리] 중에서만 오로지 예수님을 [완미하게(perfectly)] 사랑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love_commandments_communion_2487.htm <----- 필청/필독 권고


그리고 역으로, 왜냐하면 예수님을 [완미하게(perfectly] 사랑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실천하셨던 바로 그 신성적 사랑을 자신들의 심장(heart) 안에 완미하게(perfectly) 품어(cherish), 그리하여 그 결과,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의지(will)가 바로 이 신성적 사랑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님을 [완미하게(perfectly] 사랑함신성적 사랑의 행위의 완미(perfection)를 의미합니다.

 

(이 글의 네 번째 결론) 그러므로,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holiness, 聖性)에 도달하게 됨,

즉, 당사자의 심장(heart)이 애덕의 완미(perfection of charity)에 도달하게 됨
[주: 이를 위한 충분조건 한 개가 1요한 4,12에 제시되어 있음]

필요충분조건

신성적 사랑의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의 완미(perfectiion),

즉, 예수님의 새 계명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함,

즉, 예수님을 완미하게(perfectly) 사랑함

이다,  

 

5-4. (이 글의 다섯 번째 결론)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서 도출된 결과들에 의하여,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55.htm <----- 필독 권고

 

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holiness, 聖性)하게 됨,

즉, 당사자의 심장(heart)이 애덕의 완미(perfection of charity)에 도달하게 됨
[주: 이를 위한 충분조건 한 개가 1요한 4,12에 제시되어 있음]

필요충분조건

신성적 사랑의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의 완미(perfectiion),

즉, 예수님의 새 계명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함,

즉, 예수님을 완미하게(perfectly) 사랑함,

즉, 예수님의 계명들을 완미하게(perfectly) 지킴,

즉, 예수님과의 완미한(perfect) 통공의 상태에 머무름

이다,  

[이상, 2022년 1월 4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4-05-10]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이 글의 다섯 번째 결론)에 이어지는 결론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예수님_안에_머무르다의_의미_2212.htm <----- 꼭 필독 권고 

[이상, 2024-05-10일자 내용 추가 끝]

 

이것으로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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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2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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