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동성당 게시판

새댁, 먼저 하고 가...

인쇄

김완섭 [wansub69] 쪽지 캡슐

2000-09-16 ㅣ No.2621

봄비가 제법 세차게 내리던 지난달 말일 은행을 찾았다. 비도 오고 은행 업무가 특히 바쁜 월말이라 나서기가 꺼려졌지만 꼭 내야 할 세금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아드니 대기인 수가 35명이나 되었다. 게다가 점심시간이라 창구에는 직원 두 명만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 차례가 오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이왕 기다리는 거 느긋하게 기다려 볼까’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좀 전에 나와 함께 은행으로 들어온 애기 엄마가 보였다. 한 아이는 등에 업고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를 앞장서 걷게 하고, 이 비에 집을 나오기가 얼마나 막막했을까 생각하니 그 젊은 엄마가 안쓰러웠다.

 

20분쯤 기다렸을까. 아기 엄마와 꼬마의 행동을 살피면서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 참이었다. 아이는 은행 안을 마구 뛰어다니며 우산대에 꽂힌 우산을 이것저것 뽑아 들고 다니다 야단 맞기를 여러 차례, 결국은 엄마에게 엉덩이를 몇 대 맞고 울음을 터뜨렸다. 형이 울자 등에 업혀 졸고 있던 동생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애기 엄마는 시끄럽게 우는 아이들을 달래려 애썼지만 작은 아이는 배가 고픈지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나와 함께 들어왔기 때문에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텐데, 어쩔 줄 몰라하는 애기 엄마보다 내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때였다. “새댁, 다음이 내 번호야. 먼저 하고 가” 하면서 번호표를 내미는 분이 있었다. 일흔이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였다. 애기 엄마가 괜찮다며 사양하자 “애가 너무 갑갑해 보여서 그래. 얼른 하고 나가 봐” 하셨다.

 

애기 엄마는 일을 마치고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은행 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꼬마를 데리고 떠났다.

 

그러고도 30분을 더 기다려서야 볼일을 마친 할머니는 우산을 쓰고 지팡이를 짚고 은행문을 나섰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그날 한 시간이 넘게 내 순서를 기다렸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건넨 그 따뜻한 말 한마디가 무엇인가를 잊고 살아가는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이다.



62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