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약현성당 게시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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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pious] 쪽지 캡슐

2002-12-25 ㅣ No.1122

올해는 성탄이 어떻게 왔는지, 정신이 없이 지나갔습니다.

본당에서 판공성사에 치여 지내던 때가 언제인지 까마득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온 성탄에 기쁨도 고단함도 없이 무던했던가 봅니다.

 

성탄절 밤미사를 어느 수녀원에서 지냈습니다. 바글바글하던 성탄절과는 또다른 감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가출 소녀들이 사는 집에서 함께 하게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강론을 준비해갔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천주교가 무엇인지 신부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수녀님들과 함께 사니 또 거기다 성탄절이라고 하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사에 끌려온 듯 했습니다.

 

어색하고 쑥스러운 미사. 군대에서의 미사 이후에 오랫만에 느끼던 낯설음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신부들이 느낀다는 그런 마음을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해야 하나? 교실에 들어가면 고개를 푹 숙이고 딴 생각을 하거나, 자거나, 만화책을 읽기까지 하는 아이들의 모습. 성당에 들어가면 그냥 무기력해지고 머릿속은 다른 세상을 헤매이고, 고개를 숙이고 앞을 쳐다보지 않는 그런 분위기. 바로 이런 것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하나봅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최대한 미사를 짧게 했습니다. 미사가 끝난후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짧은 성탄 미사는 평생 처음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수녀님들과 함께 다과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는 분위기가 그래도 조금 시끌해지고 밝아졌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그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친해졌다고 웃으며 대하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는데 그중에서 내년에 고등학교에 간다는 아이가 큰 소리로 수녀님들 틈에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새해엔 좋은 여자 만나세요!"

 

순간 수녀님들의 박장대소. 그렇게 크게 웃는 수녀님들의 웃음소리는 아직까지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한 아이의 인사가 이렇게 분위기를 띠우다니.

 

홍당무가 된 저는 뒤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래 니가 빨리 좋은 여자 되서 찾아와라."

 

새롭게 느낀 메리 크리스마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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