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하느님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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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06-21 ㅣ No.454

 

성서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특정한 인물이나 민족을 선택하십니다. 창세기에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에 이어서 그의 아들 이사악을 선택하시고, 쌍둥이 형제 에사우와 야곱 중에서 야곱을 선택하시며,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요셉을 특별히 선택하십니다. 출애급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들 중에서 선택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이렇게 특정한 인물, 특정한 집단을 선택하셔서 특별히 돌보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선택이라고 하면 흔히 흑백의 구도로 생각합니다. 선택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은 멸망한다고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어떤 사람은 멸망받을 자로 선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자로 선정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멸망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구원에 이르를 수 없는 반면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일부러 잘못을 범하더라도 결국 구원의 길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선택이며, 누구를 멸망하기 위해서 선택하시지는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하나를 취하시고 다른 하나는 버리시려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양자택일일 경우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에서 하느님은 적자인 이사악을 택하시지만, 그렇다고 서자인 이스마엘을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이사악의 어머니 사라의 질투를 받아 이스마엘과 그 어머니인 하갈이 쫒겨나서 사막을 헤메다가 죽을 위기에 놓이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구해주시고, 이스마엘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약속까지 해주십니다(창세 21,18). 이렇게 해서 선택되지 않았다고 해서 멸망의 운명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또 하느님은 야곱을 선택하셨지만 선택에서 제외된 에사오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역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후손이 정착할 땅도 주셨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도망 나와서 에사오를 만나 자신의 재산을 선물하려고 하자, 에사오는 “야곱아! 내 살림도 넉넉하다”(창세 33,9)고 대답하는 데에서 이런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선택은 무슨 의미를 지닐까요? 하느님의 선택은 배타적이 아니라 표본적 성격을 지닙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알리기 위해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선택하셔서 표본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불신앙의 길을 가는 세상에 대해서 신앙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분명히 드러내시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 개인이나 집단의 선택은 그들을 엘리트로 만들어서 배타적으로 특별대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선택된 이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신앙과 행복의 길로 인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점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하신 말씀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창세 12,3).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선택은 전체의 구원을 위한 파견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택받은 개인이나 집단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와 은총 속에 있지만 동시에 특별한 과제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가 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 딸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구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 딸처럼 살면서 세상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과제도 부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이기심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지옥을 만들며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뜻을 따르며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며 진정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인생을 다 한 다음에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 표현대로 하면 짠 맛을 잃은 소금은 버려져서 짓밟힐 뿐입니다(마태5,13).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아들, 딸로 산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눌려서 침울하게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한편으로 자신들에게 부여된 과제와 사명이 중대함에 대해서 올바로 인식하면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너무 긴장해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면서 필요한 때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죄와 잘못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결코 자포자기하거나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용서가 많으신 분이고, 인간의 죄와 잘못에서 더 큰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일과 업적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직시하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하겠습니다. /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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