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집사 일을 청산/정리하게??? #<다연중25주일복음> 964_ [성경_번역오류_약은집사] [성경해석] 782_

인쇄

. [122.128.44.*]

2010-10-05 ㅣ No.964

 
게시자 주(들어가면서)
 
우리말을 사용하는, 되도록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께서 [가톨릭 신자(성직자, 수도자 포함) 및 개신교 신자 포함] 읽으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약은 집사의 비유"는 어려운 비유인데, 그 주된 이유가 당시의 팔레스티나 지역의 풍습/관습을 모르는 데에 기인하기 때문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상 가상으로, 루카 복음서 16,2의 그 부분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청산"(가톨릭측)/"정리"(개신교측)이라는 너무 추상적인 의미를 가진 한자 단어들을 사용한 것 때문에, 독자들이 영 엉뚱한 방향으로 이해를 하게 되어, 국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 보다도 훨씬 더 많이 헷갈리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점이 너무도 안타까워, 이번 글을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여 영어권 및 한국어 자료들/강론들을 살펴보면, 우리말을 사용하는 분들 사이에서 헷갈리고 있는 정도가 너무도 심각하기에, 여러분들이 납득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 자료들을 확보하느라 생각보다도 많은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들 국제화의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1990년대 이후로 당연히 많이 해소되었을 줄로 짐작할 것이나, 그러나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언어 장벽, 문화 장벽이 여전히 매우 높음을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약은 집사의 비유"에 대한 이런 저런 헷갈리는 추측들은, 우리말로 된 성경만을 읽고서 이에 근거하여, 비록 앞뒤의 문맥 안에서 그 내용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는 하나, 그러한 추측들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추측을 한 분들의 잘못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이 바로잡고 또 극복하여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
 
 
+ 찬미 예수님
 
 
다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와 ‘하느님이냐, 재물이냐’라는 소제목들을 가진, 새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서 16,1-13 전문입니다:
 
-----
 
약은 집사의 비유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마태 6,24)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0. 우선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여, 이 “약은 집사의 비유”에서 이 집사가 “탕감”을 해 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강론들을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도록 합시다:
 
(클릭하십시오) 
 
 
[또한 여기를 클릭하여, "집사 일" "정리" "루카" key words들로 찾은 구글 검색 결과들을 살펴 보도록 하십시오]
 
위의 검색 결과를 살펴보시면 상당히 많은 경우의 강론들에 있어, 이 집사가, 주인의 허락 없이, 주인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에게 탕감해 주었다, 혹은 비리를 저질렀다고 추측을 하고 있거나 혹은 이와 비슷한 추측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은, 그 근거 제시와 함께, 그러한 추측들이 사실은 거의 억측 수준의 추측임을 지적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상당히 어려운 내용들도 또한 함께 안내해 드리고 있으므로, 약간 지루하고 또 끝까지 읽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에서,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은, 바로 이 하늘 나라가 피조물들의 이성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대단히 어려운 개념이므로 대단히 어려운 비유들이라고 한다면, 이 “약은 집사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우리들에 대한 비유이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 중에서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들 다음으로 가장 어려운 비유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농사를 짓거나 혹은 물고기를 잡는 등의 1차 생산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 대다수의 도시 생활자들에게 있어, 이 비유는 바로 우리들 각자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독자들이 커다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비유일 것입니다.
 
 
1. 저 역시 위의 성경 구절들 중에서, 제2절중의 “집사 일을 청산하게”라는 표현과, 이 비유의 결론으로 보이는 제8절과의 내용 연결이 잘 되지를 않아, 지난 3주일 이상을 가톨릭 교회의 여러 자료들을 상당히 열심히 찾아 살펴보게 되었으며, 이 글은 여러분들께 보고를 드리는, 제가 찾아 본 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결과 보고서입니다.
 
 
질문 1: 제2절에서 “집사 일을 청산하게”라는 표현이 무슨 뜻일까요?
 
 
특히 한자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청산하게”가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제가 찾아 본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i) “집사 일을 청산하게”라는 표현 자체가 “집사 일을 그만 두라”는 뜻도 아니고, 그리고

(ii) “주인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에게 집사가 임의적으로, 마음대로, 빚을 탕감해 주라”는 주인의 명령도 아님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iii) 이 표현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를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비로소 바로 이어지는 제9절부터 제13절까지 5개의 각 절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제2절에서 “집사 일을 청산하게”라고 번역된 표현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2. 루카 복음서 16,1-8에 대한 다음의, 가톨릭용 프랑스어 성경인, Tob의 주석이 이 비유의 구조에 대하여 이해하는 데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 같아 먼저 말씀드립니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
 
 
 
x) Cette parabole fait souvent difficulté parce qu'elle semble donner en exemple un filou. Mais Jésus n'hésite pas, en d'autres paraboles, à comparer le jugement de Dieu à celui d'un juge sans justice (18,1-8), ni à invites ses disciples à être habiles comme les serpents (Mt 10,16); il est clair qu'il n'exhorte pas là les siens à l'injustice ou à la méchanceté. Dans la parabole présente, il prend soin de qualifier le gérant comme trompeur (v. 8). Si celui-ci est un exemple (cf. 10,30 note), ce n'est que par son habileté.
     Dans l'état actuel du texte, la parabole est suivie d'une série de sentences sur l'usage de l'argent (vv. 9-13). On hésite parfois à fixer le point où finit la parabole et où commencent les commentaires. Il semble pourtant que, dans le texte de Lc, on puisse placer ce point entre les vv.8 et 9: c'est au v. 9 en effet que Jésus intervient à la premiére personne et que l'on passe de la question de l'habileté à celle de l'argent. Ainsi le v. 8 conclut la parabole, en invitant les disciples à être aussi habiles dans le service du Royaume que les filous de ce monde dans leurs affaires malhonnêtes.
 
이 비유는 가끔 어려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이것이 사기꾼을 예로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비유들에 있어, 하느님의 판결과 의로움이 없는 재판관의 판결을 비교하시는 것을(루카 복음서 18,1-8), 그리고 하느님의 판결을 당신의 제자들을 뱀처럼 영리하게 될 것을(마태오 복음서 10,16) 요청하시는 것과 비교하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시며, 그리고 그들을 거기서 불의로 혹은 불결함으로 권고하지 않으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의 비유에 있어, 이 비유는 이 집사를 속이는 자로서 묘사하는 데에 유의합니다(제8절). 이 비유가 한 개의 예(example)이라면(루카 복음서 10,30의 주를 참조하라), 이것은 오로지 바로 그의 역량(skill) 때문입니다.
     이 본문의 현재의 상황 안에서, 이 비유는 금전의 사용에 대한 일련의 문장들에 의하여 이어집니다(제9-13절). 이 비유가 어디서 끝나고 그리고 어디서 그 해설들이 시작되는지를 설정하는 것을 때로는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나, 루카의 본문에 있어, 이 지점은 제8절과 제9절 사이에 둘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제1 인칭으로 개입하시며 그리고 역량(skill)에 대한 문제가 돈의 역량에 대한 문제로 옮겨지게 되는 것은 사실상 바로 이 제9절에서 입니다. 따라서 제8절은, 이 세상의 사기꾼들이 자신들의 부정직한 사업에 있어 영리한 정도로(how) 하늘 나라(the Kingdom,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도 제자들이 또한 영리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이 비유를 끝맺습니다.
 
-----
 
 
3. 위의 Tob 주석으로부터 우리는, 요한 복음서 12,35-36, 에페소서 제5장, 테살로니카서 제5장에서도 또한 언급되고 있는, 제8절의 “빛의 자녀”들이 하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자들, 즉 “예수님의 제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2절의 “집사 일을 청산하게”에 대하여서는 Tob의 주석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질문 2: 제2절의 “집사 일을 청산하게”에 해당하는 표현인 “Rends les comptes de ta gestion,”에 대하여, Tob 주석에는 왜 아무런 설명이 주어져 있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Rends les comptes de ta gestion,”을 영어로 직역 번역하면 “Give in the account of your management” 로서, 우리말로 “자네의 관리 내역서를 제출하게” 이기 때문입니다.
 
 
4. 다른 한편으로, 이 “집사 일을 청산하게”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을 인용하고 있는 교황청 발 문헌들의 우리말 번역문들을 그 전후의 문맥 안에서 살펴봄으로써, “집사 일을 청산하게”로 번역된 표현의 애초의 의미를 나름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에, 다음의 두 개의 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 사항 1: 교황청 제공의 어떤 교회의 문헌/자료를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에, 그 문헌/자료의 본문 중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용어들 및 구절들 혹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등의 교회의 핵심 문헌의 용어들 및 구절들은, 이미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 성경 혹은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해당 용어들 및 구절들을 최대한 그대로 사용하면서, 번역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한 교회의 문헌/자료들의 경우에 있어 그동안 이렇게 번역을 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경 혹은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어떤 용어들 혹은 구절들의 우리말 번역 자체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하위의 다른 문헌들을 우리말로 번역을 할 때에, 상위의 문헌들에 있는 번역 오류가 거의 자동으로 퍼져나가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예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인류의 빛” 본문에서의 “the order of grace"에 해당하는 표현을 ”은총의 세계“ 등으로 잘못 번역을 한 것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에 그대로 퍼져나간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 사항 2:
각 교구의 주교들은 주교 서품 이후 매 5년마다 교황청을 방문하여 로마에서 순교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무덤들을 참례하며,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알현하고, 그리고 자신의 교구에 대한 보고를 교황님께 드리도록 교회법상으로 규정되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사도좌 정기방문, visit ad Limina Apostolorum, 즉 visit ad Limina).
 
 
4-1. 다음은 이 visit ad Limina(사도좌 정기방문)로 교황청을 방문한 Namibia의 주교들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97년 6월 14일자로 하셨던 연설문(Address)의 제1항의 전반부를 발췌한 것이며,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질문 3: 아래의 영어 연설문(Address)에서 루카 복음서 16,2를 참조하라는 부분, 즉 to give an account of your stewardship을, 이에 대응하는 새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서 16,2에서의 번역된 표현인 “집사 일을 청산하기 위하여”로 대입하면서 이 영어 Address를 우리말로 번역을 하였는데, 이렇게 번역된 우리말 번역문을 읽었을 때에 전후의 문맥 안에서 이해가 제대로 되는지요? 
 
 
전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주교님들께서는, 집사 일을 청산하기 위하여 교황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설명/보고를 드리기 위하여 (to give an account of your stewardship) 교황님을 뵙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In the love of the Saviour, I cordially greet the whole Church of God in Namibia, and I welcome you, the Pastors of the Archdiocese of Windhoek, the Diocese of Keetmanshoop and the Apostolic Vicariate of Rundu. As an Episcopal Conference, this is first time that you have come to Rome on your visit ad Limina Apostolorum: to venerate the tombs of the blessed Martyrs, Peter and Paul, whose blood sealed the unique service of this "greatest and most ancient Church" (St Irenaeus, Adv. Haer. 3.3.2); to "see Peter" (cf. Gal 1:18) in the person of his Successor and to give an account of your stewardship (cf. Lk 16:2). Together, we can rejoice that the good seed of the Gospel is bearing a rich harvest in your country, so promising in its youthful vigour. The setting up of the Hierarchy in 1994,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Namibia and the Holy See in 1996, and the recent formation of the Namibian Catholic Bishops' Conference are positive signs that the Lord who began his good work in you will bring it to completion (cf. Phil 1:6).
 
구세주의 사랑 안에서, 저는 Namibia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 전체에 진심으로 인사드리며, 그리고 저는, Windhoek 대교구, Keetmanshoop 교구 그리고 Rundu 대목구(代牧區)의 목자(Pastors)들인,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한 개의 주교 협의회(an Episcopal Conference)로서, 그들의 피가 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오래된 교회”의 유일한 봉사를 보증하였던(St Irenaeus, Adv. Haer. 3.3.2), 복받은 순교자들인 베드로와 바오로의 무덤들을 공경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후계자의 역으로 있는 “베드로를 면회하기 위하여”(cf. 갈라티아 1,18) 그리고 집사 일을 청산하기 위하여(cf. 루카 복음서 16,2),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ad Limina Apostolorum 방문으로 로마로 오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하, 번역 생략)
...
(이하 생략).
 
-----
 
 
4-2. 다음은 이 visit ad Limina(사도좌 정기방문)로 교황청을 방문한 Brazil의 주교들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2002년 8월 31일자로 하셨던 Address의 제4항의 마지막 부분을 발췌한 것이며,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질문 4: 아래의 영어 Address에서 루카 복음서 16,2를 참조하라는 부분, 즉 괄호 안의 give an account of your stewardship을, 이에 대응하는 새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서 16,2에서의 번역된 표현인 “집사 일을 청산하게”로 대입하면서, 이 영어 Address를 우리말로 번역을 하였는데, 이렇게 번역된 우리말 번역문을 읽었을 때에 전후의 문맥 안에서 이해가 제대로 되는지요?
 
전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주교님들께서는, 집사 일을 청산하기 위하여 교황님을 뵙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설명/보고를 드리기 위하여 (to give an account of your stewardship) 교황님을 뵙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전 생략)
 
 
Every five years the Bishops come to Rome, not just for routine administration, that is, to present a report on the state of their diocese. After all, they need to confront the condition of their souls, and, what is called for, their own personal holiness and that of their flock. No Bishop can avoid the divine requirement "redde rationem villicationis tuae" (give an account of your stewardship): give an account of your ministry and of the souls entrusted to you (cf. Lk 16,2). Thus you must entrust your fidelity to your obligations, your resolutions and the experiences you have had at the Apostolic See to the Divine Consoler, so that in the future they may fortify the soul of the entire diocese bringing it ever closer to our heavenly home.
 
 
매 5년마다 주교들은, 단순히 틀에 박힌 관리 때문에, 즉 자신들의 교구의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하여, 로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에,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들의 상태에 직면하여야(confront) 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요청되는 바인, 자신들 고유의 인격적 거룩함 및 자신들의 양떼들의 인격적 거룩함에 대면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떠한 주교도 하느님의 요구인, 다음과 같은,  "redde rationem villicationis tuae" (집사 일을 청산하게)를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사역에 대한 그리고 그대에게 맡겨진 영혼들에 대한 설명/보고를 드리기 위하여(cf. 루카 복음서 16,2).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신의를 자신의 의무들에, 자신의 결심들에, 그리고 여러분이 사도좌에서 거룩한 위로자(Divine Consoler)에게 이미 하였던 바로 그 경험들에, 맡기셔야만 하며, 그리하여 그 결과로 미래에 그들이 전체 교구의 영혼을 우리의 천상 본향Iheavenly home)에 어느 때 보다 더(ever) 가까이 데려감으로써 강화할 것입니다.
 
 
(이하 생략)
-----
 
 
5. 위의 제4항에서 살펴 본 용례로부터, 우리는 혹시 루카 복음서 16,2에서 “집사 일을 청산하게” 라는 표현으로 번역을 한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우리말로 번역시에 의역 번역을 하다 혹시 번역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참고 사항 3: 이어지는 내용의 이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15-119항들을 학습하도록 합시다.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영어 CCC와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1: http://ch.catholic.or.kr/pundang/4/c115.htm (우리말 CCC 제115항)
출처2:
http://ch.catholic.or.kr/pundang/4/va_c115.htm (영어 CCC 제115항)
 
 
 
The senses of Scripture
성경의 의미
  
115 According to an ancient tradition, one can distinguish between two senses of Scripture: the literal and the spiritual, the latter being subdivided into the allegorical, moral and anagogical senses. the profound concordance of the four senses guarantees all its richness to the living reading of Scripture in the Church.
 
115 성경의 의미는 오랜 전통에 따라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후자는 우의적(寓意的)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로 다시 세분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읽기는 이 네 가지 의미들의 심오한 조화로써 더욱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진다.
 
116 The literal sense is the meaning conveyed by the words of Scripture and discovered by exegesis, following the rules of sound interpretation: "All other senses of Sacred Scripture are based on the literal."83
 
116 자구적 의미
자구적 의미는 성경의 말씀으로 나타내고, 올바른 해석 원칙에 따른 주석으로 밝혀 낸다. “성경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 90)
 
117 The spiritual sense. Thanks to the unity of God's plan, not only the text of Scripture but also the realities and events about which it speaks can be signs.
 
1. the allegorical sense. We can acquire a more profound understanding of events by recognizing their significance in Christ; thus the crossing of the Red Sea is a sign or type of Christ's victory and also of Christian Baptism.84
 
2. the moral sense. the events reported in Scripture ought to lead us to act justly. As St. Paul says, they were written "for our instruction".85
 
3. the anagogical sense (Greek: anagoge, "leading"). We can view realities and events in terms of their eternal significance, leading us toward our true homeland: thus the Church on earth is a sign of the heavenly Jerusalem.86
 
117 영성적 의미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성경 본문뿐 아니라, 그 본문이 말하는 실재와 사건들도 표징이 될 수 있다.
 
1. 우의적 의미. 사건들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으로써 더욱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홍해를 건넌 일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징이며, 그로 말미암아 세례의 표징이 된다. 91)
 
2. 도덕적 의미. 성경이 전하는 사건들은 우리를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이 사건들은‘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1코린 10,11 참조) 기록된 것이다. 92)
 
3. 신비적 의미(anagogia).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는(그리스 말 anagoge는‘위로’ 라는 뜻의 ana와, ‘인도하다’ 는 뜻의 agoge의 합성어이다.) 영원의 의미에서 실재와 사건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예컨대, 지상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징이다. 93)
 
118 A medieval couplet summarizes the significance of the four senses:
 
The Letter speaks of deeds; Allegory to faith;
The Moral how to act; Anagogy our destiny.87
 
118 중세의 한 이행시(二行詩)는 이러한 네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글자는 행한 것을 가르치고, 우의는 믿을 것을 가르치며,
도덕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신비는 향할 것을 가르친다. 94)
 
119 "It is the task of exegetes to work, according to these rules, towards a better understanding and explanation of the meaning of Sacred Scripture in order that their research may help the Church to form a firmer judgement. For, of course, all that has been said about the manner of interpreting Scripture is ultimately subject to the judgement of the Church which exercises the divinely conferred commission and ministry of watching over and interpreting the Word of God."88
 
But I would not believe in the Gospel,
had not the authority of the Catholic Church already moved me.89
 
119 “성경 해석자들의 임무는 이러한 규범에 따라 성경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준비의 역할을 하는 연구로써 교회의 판단은 성숙하게 된다. 성경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 95)
 
만일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96)
 
-----
83 St. Thomas Aquinas, S Th I, 1, 10, ad I.
84 Cf. I Cor 10:2.
85 I Cor 10:11; cf. ⇒ Heb 3:1 - ⇒ 4:11.
86 Cf. ⇒ Rev 21:1 - ⇒ 22:5.
87 Lettera gesta docet, quid credas allegoria, moralis quid agas, quo
   tendas anagogia.
88 DV 12 # 3.
89 St. Augustine, Contra epistolam Manichaei 5, 6: PL 42, 176.
9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 , 1, q. 1, a. 10, ad 1: Ed. Leon. 4, 25.
91). 1코린 10,2 참조.
92). 히브 3,1`─`4,11 참조.
93). 묵시 21,1`─`22,5 참조.
94). 다키아의 아우구스티노, Rotulus  pugillaris,  I:  A.  Walz  편: Angelicum 6(1929), 256.
95). 계시 헌장, 12항.
96). 성 아우구스티노, 「마니교도 서간 반박」 , 5, 6: CSEL 25, 197(PL 42, 176).
-----
 
건의 사항: 위에 나열한 3가지의 영성적 의미(영성적 어의)들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도덕적 의미” 대신에 “윤리적 어의”, “신비적 의미” 대신에 “종말론적/신비적 어의”.
 
특히 다음의 Merriam-Webster's Unabridged Dictionary에 주어진 anagogical 단어의 설명 및 다음의 Henri de Lubac 추기경의 가르침을 담은 저서에 주어진 anagogical sense의 설명에 의하면, “anagogical sense”를 “종말론적/신비적 어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는 “anagogical sense"이 관점에 따라 주관적인 입장에서의 “신비적 의미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종말론적 의미 둘 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 of, exemplifying, or based on anagoge ; specifically : having a spiritual meaning or a sense referring to the heavenly life
 
 
(클릭하십시오, 필독 권유) 
 
 
참고 사항 4: 사실 Henri de Lubac 추기경은, 20세기 중반에, 가톨릭 계약 신학을 재 발굴한 신학자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4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적 헌장, "하느님 말씀(Dei Verbum)",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에 있어, 성경에 대한 섹션(CCC 제101-141항)을 통합한(consolidated) 가톨릭 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항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 해당 구절의 인터넷 주소입니다. 영어로 번역된 신학대전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Reply to Objection 1. The multiplicity of these senses does not produce equivocation or any other kind of multiplicity, seeing that these senses are not multiplied because one word signifies several things, but because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can be themselves types of other things. Thus in Holy Writ no confusion results, for all the senses are founded on one — the literal — from which alone can any argument be drawn, and not from those intended in allegory, as Augustine says (Epis. 48). Nevertheless, nothing of Holy Scripture perishes on account of this, since nothing necessary to faith is contained under the spiritual sense which is not elsewhere put forward by the Scripture in its literal sense.
 
 

[내용 추가 일자: 2011년 7월 13일]

반대 1에 대한 답변. 이들 어의들의 다중성(multiplicity)은, 이들 어의들이 한 개의 단어가 여러 개의 사물들을 나타내기 때문에 증식되는(are multiplied) 것이 아니라, 이 단어들에 의하여 나타내어지는 사물들 그 자체들이 다른 사물들의 종류들일 수 있기 때문에 증식되므로, 다의(多義)의 허위(equivocation) 혹은 어떤 다른 종류의 다중성을 산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있어 어떠한 혼란도 야기되지 않는데, 이는 이 어의들 모두가, 아우구스티노(Augustine)가 말하듯이(Epis. 48), 우의/풍유(allegory) 안에서 의도된 것들로부터가 아니라, 거기로부터만이 어떤 논증이 도출될 수 있는, 한 개 - 자구적 어의(the literal) - 위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어떠한 것도 이것 때문에 소멸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믿음(faith)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necessary to) 어떠한 것도, 그 자구적 어의에 있어 성경에 의하여 다른 장소에서 두드러지게 되지 않는, 영성적 어의 아래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
 
 
그리고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 해석에 대한 관점을 다루고 있는 개괄 논문(survey paper)(저자: John F. Boyle)입니다. 이 논문은 성경의 의미를 위에서처럼 네 가지로 나눈 신학자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6. 따라서, 이어지는 세 가지의 영성적 의미(영성적 어의)들을 바로 이 자구적 어의(자구적 의미)로부터 해석과 묵상 등을 통하여 도출하고자 함에 있어, 만약에 이 자구적 의미(자구적 어의)의 이해에 있어, 자국어로의 번역 과정에서의 어떤 잘못 때문에 독자의 개인적 판단에 근거한 자의적/임의적 해석이 독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될 여지가 있게 되면, 영 엉뚱한 해석을 하는 등의 매우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기에,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항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 를 언급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매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할 때에 직역 번역을 하여야 하는 주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단, 여기서 말하는 직역 번역은 원 언어로 역번역을 하였을 때에, 문장의 구조를 포함하여, 원문에 매우 충실한 번역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15항의 가르침처럼, 자국어로 번역시에, 원 언어로 파악되어지는 올바른 자구적 의미의 범주 내에서, 직역 번역 작업이 진행되어야만, 비로소 이어지는 3가지의 영성적 어의(영성적 의미, spiritual senses)들을 자국어로 제대로 해석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여, 번역자가, 원 언어로 쓰인 문장에서 사용 중인 용어들의 개념(idea, concept)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자국어로의 번역을 하게 되면, 원 언어로 된 용어들의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번역을 하게 되므로, 기껏해야 그리고 잘해야, 의역 번역 밖에 될 수가 없으며, 그리하여 위의 루카 복음서 16,2를 인용하고 있는 교황님의 Address들에서 단적으로 살펴보았듯이, 번역자의 의도와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자국어를 사용하는 분들의 사고에 혼란을 야기하여, 그 결과 이들 영성적 어의들에 있어, 원 언어로 기록된 표현에서는 불가능한, 대단히 엉뚱한 주장을 도출할 수도 있게 되기에, 바로 이런 점에 대하여 아무런 지적 없이 그냥 지나기에는 곤란한 “번역 오류의 문제”가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문법(grammar)"보다는 "언어(language)"가 먼저이며,
"언어"보다는 "개념(idea, concept)"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7. 이상 살펴 본 바로부터, “집사 일을 청산하게”로 번역된 것이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이 표현에 대응하는 영어 성경들(개신교측 성경들 포함) 및 가톨릭용 프랑스어 성경인 Tob에서의 번역들입니다. 모두가 같은 내용을 나타내는 표현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 새 번역 성경의 루카 복음서 16,2에서 '집사 일을 청산하게.' 로 번역한 표현을, RSV와 NAB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는데, 이들 영어 성경들의 번역에 의하면, 이 요구는 (업무의 인수/인계를 위한) 집사 일에 대한 회계 보고서를 주인에게 제출하라는 명령이지, 채무자들이 주인에게 진 빚을 집사가 주인 대신에 청산/탕감해 주라는 명령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동번역성서 및 새 번역 성서의 이 절에 대한 우리말 번역에서 '청산'이라는 매우 어려운 한자단어를 사용하여 독자들의 자의적/임의적 자구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여 그 결과 이 절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제공하고 있기에, 이러한 번역은 '잘못된 의역 번역' 혹은 '번역 오류'라는 생각이다. 다음의 루카 복음서 16,2의 일부 혹은 전부에 대한 인용들에서 우리말 번역은 엮은이가 하였다:
 
(RSV) Turn in the account of your stewardship 
(졸번역: 그대의 집사 일에 대한 출납 보고서를 제출하게),
 
(NAB) Prepare a full account of your stweardship, because you can no longer be my steward.
(졸번역: 그대의 집사 일에 대한 전체 출납 보고서를 준비하게, 자네는 더 이상 나의 집사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네),
 
다음은 라틴어본 성경, 여러 영어본 성경들, 그리고 프랑스어본 성경(Tob)에 있어서의 루카 복음서 16,2의 자국어 번역문들이다. 지금 지적하고 있는 우리말로의 번역 오류와 관련하여 또한 참고하라:
 
(Vulgate)  Et vocavit illum et ait illi: “Quid hoc audio de te? Redde rationem vilicationis tuae; iam enim non poteris vilicare”.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ulgata/nova_vulgata_luke16.htm

(DRB)  And he called him and said to him: How is it that I hear this of thee? Give an account of thy stewardship: for now thou canst be steward no longer.
 
(KJV-1611)  And hee called him, and said vnto him, How is it that I heare this of thee? Giue an accompt of thy stewardship: for thou mayest bee no longer Steward.
 
(KJVA)  And he called him, and said unto him, How is it that I hear this of thee? Give an account of thy stewardship; for thou mayest be no longer steward.
 
(KKJV) (개신교)  이에 부자가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듣는 이 말이 어찌된 일이냐? 네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라. 네가 더 이상 청지기가 되지 못하리라, 하니
 
(GNB)  so he called him in and said, 'What is this I hear about you? Turn in a complete account of your handling of my property, because you cannot be my manager any longer.'
 
(CEV)  So the rich man called him in and said, "What is this I hear about you? Tell me what you have done! You are no longer going to work for me."
 
(ESV)  And he called him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that I hear about you? Turn in the account of your management, for you can no longer be manager.'
 
(WEB)  He called him,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that I hear about you? Give an accounting of your management, for you can no longer be manager.'
 
(NIV) So he called him in and asked him, 'what is this I hear about you? Give an account of your management, because you cannot be manager any longer.'
 
(공동번역성서) 청지기를 불러다가 말했다. '자네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
 
(Tob) Il le fit appeler et lui dit: "Qu'est-ce que j'entends dire de toi? Rends les comptes de ta gestion, car désormais tu ne pourras plus gérer mes affaires."
 
 
-----
 
[내용 추가일: 2010년 10월 8일]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직접 읽을 수 있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중국어 루카 복음서 전문에서 발췌한 루카 복음서 16,2의 후반부로서, 새 번역 성경에서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로 번역한 부분에 해당하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중국어 번역문입니다:

"把?管理家務的帳目交出來,因??不能再作管家了。"

상당히 오랫만에 한문 문장을 들여다 봅니다만, 아무리 눈을 닦고 이 파란색칠의 한문 문장을 여러 번 들여다 보아도, 

집사더러
"자네의 집안일 관리에 대한(?管理家務的) 장부의 항목(帳目)들을 (즉, 회계 보고서를) 제출하게(交出)" 라는 뜻의 중국어 표현으로 번역을 하였지, 

결코 새 번역 성경에서처럼, "집사 일을 청산하게", 혹은 "집사 일을 정리하게"(국내의 개신교측 일부 성경에서의 번역) 의 뜻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

 
 
8. 따라서, “집사 일을 청산하게”로 번역된 표현은 사실은 업무의 인수/인계를 위하여 “그동안의 집사로서의 업무 보고서(혹은 출납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의 표현으로 바로잡아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 본문의 우리말 번역을 바로 잡더라도, 여전히 이 정정된 표현이 유의미한 이유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NAB의 루카 복음서 16,1-8a에 대한 주석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의 NAB 주석을 함께 읽도록 합시다. 우리말 번역은 제가 한 것입니다:
 
 
 
16,1-8a The parable of dishonest steward has to be understood in the light of the Palestinian custom of agents acting on behalf of their master and the usurious practices common to such agents. The dishonesty of the steward consisted in the squandering of his master's property (1) and not in any subsequent graft. The master commends the dishonest steward who has forgone his own usurious commission on the business transaction by having the debtors write new notes that reflected only the real amount owed the master (i.e., minus the steward's profit). The dishonest steward acts in this way in order to ingratiate himself with the debtors because he knows he is being dismissed from his position (3). The parable, then, teaches the prudent use of one's material goods in light of an imminent crisis.
 
16,1-8ㄴ 부정직한 집사의 비유는 대리인(agents)들이 자신의 주인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는(acting) 팔레스티나 지역의 관습(custom) 및 그러한 대리인들에게 일반적이었던 고리대금 관례(usurious practices)들에 비추어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이 집사의 부정직은 자신의 주인의 재산의 낭비(squandering)에 있었던 것이지(제1절) 그리하여 결과로서 발생하는 어떠한 부정 이득(graft, 독직)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채무자들에게 오로지 주인에게 실제로 빚을 진 (즉, 집사의 이윤을 뺀) 액수만을 반영하는 새로운 빚 문서들을 작성하게 함으로써, 업무 처리상의 자신 고유의 고리의 수수료(usurious commission)를 이미 포기한 이 집사를 칭찬합니다. 이 부정직한 집사는 채무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데 이는 자신의 지위로부터 자신이 조만간 해고당할 것임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제3절). 그러고 나서 이 비유는 임박한 위기에 비추어 자신의 물질적 재화들의 분별 있는 사용(prudent use)을 가르칩니다(엮은이 번역).
 
참고: NAB에서의 16,1-8a는 새 번역 성경에서 16,1-8ㄴ에 해당하는데, 이는 NAB 루카 복음서 16,8의 첫 문장을 새 번역 성경에서 두 개의 문장으로 나누어 번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성서에서뿐만이 아니라 위에서 인용한 영어본 성경들에서도 한 문장으로 번역한 표현을, 새 번역 성경에서 굳이 이렇게 두 문장들로 나누어 번역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은 각각 RSV 및 NAB의 루카 복음서 16,8 전문입니다:
 
(RSV) [8] The master commended the dishonest steward for his shrewdness; for the sons of this world are more shrewd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the sons of light.
 
(NAB) 8 And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Application of the Parable
"For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prudent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are the children of light.

-----
 
 
9. 다음은 저의 졸저서인“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I 연중 제25주일 복음 말씀(루카 복음서 16,1-13)의 제1절에 대한 해설입니다. 위의 제8항에서 말씀드린 NAB의 주석과 같은 선상의 설명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부자는 부재 지주(an absentee landlord)였다. 집사(steward)는 보통 그 가정에서 태어난 노예였으며 커다란 권한과 모든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세리(tax collector)처럼, 집사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이익을 내야하나, 그러나 그는 또한 노련한 대출들과 지나친 이자로써 개인적 이득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비유에 의하여 추정되는(presupposed) 법률 제도(legal system)는 널리 입증되는 제도이나 그러나 고리대금업(usury)에 대한 구약 성경의 금지에 반하고 있다. 집사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계약(binding contracts)317)들을 맺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 고리대금업적 이자(usurious interest)는 계약서에 별도로 나열되지 않을 것이나, 그러나 계약서에 언급되는 한 개의 일시불(one lump sum)에는 포함될 것이다. 100% 이자에 밀 오십 부셸(fifty bushels of wheat)은 계약서에 밀 백 부셸의 빚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 
 
 
10. 제8항 및 9항에서 다룬 이 NAB의 주석 및 저의 졸저서에 주어진 해설에 따르면, 우리는 왜 주인이, 제8절에서, 집사의 이러한 기민한 대응을 칭찬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집사는 평소에 자신의 주인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집사라는 업무의 수수료로서 자신의 몫으로 부과하였던, 고리의 수수료를 챙기는 “물신(mammon) 섬기기”를 또한 열심히 해 왔던 것인데, 즉 그동안 두 주인을 섬겨 왔던 것인데, 그러나 제2절에서와 같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미 당시의 그 사회의 풍습/관습이 되어 있었기에 집사가 행하여 왔던 (그러나 이러한 집사에 의한 고리 대금업 관습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당신의 비유를 듣는 이들이 알아듣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셨을), 그동안의 고리의 수수료를 챙기는 “물신 섬기기”라는 자신의 잘못된 행위들을, 구체적인 행동으로써, 기민하게 즉각 바로 잡았기 때문에, “자신의 허물에 대하여 실천한 즉각적인 바로잡음의 행위에 대하여”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입니다.
 
 
즉, 비록 과거에 부정직한 행위를 하였던 집사이기는 하나, 그러나 주인의 개입이 있자마자, 이 집사가 자신의 허물을 바로 잡는 데에 더디지 않았기에, 즉 인색(吝嗇)하지 않았기에, 주인이 집사를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어 성경들의 루카 복음서 16,8 후반부의 표현에서 ‘can’ 이라는 조동사를 사용한 점을 고려할 때에, 주인의 이러한 칭찬은, 집사가 제출한 회계 보고서를 검토한 후에, 주인이 이 집사를 실제로 해고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음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누구일까요? 다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
 
참고:하느님께 인색하지 말라”(루카 복음서 12,21 참조)에서 말하는 인색(吝嗇)의 의미는 다음의 글에 있으니 꼭 읽어보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629.htm (클릭하십시오, 필독 권유)
 
-----
 
 
그리고, 새 번역 성경과는 달리, St. Joseph Version의 NAB 루카 복음서의 소제목에 의한 내용 분류에 의하면, 여기까지가 “약은 집사의 비유”의 끝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을 서로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
(새 번역 성경 루카 16, 8-9)
...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
 
 
(St. Joseph Version NAB Luke 16,8-9)
...
8 And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Application of the Parable
"For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prudent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are the children of light. 9 I tell you, make friends for yourselves with dishonest wealth, so that when it fails,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dwellings.
...
 
-----
 
 
NAB에서 이렇게 구분하여 소제목 붙인 것은, 앞뒤의 문맥 안에서 살펴 볼 때에, 가톨릭용 프랑스어 Tob 성경을 따르고 있는 듯한 새 번역 성경의 구분 및 소제목 붙이기보다, “약은 집사의 비유”의 결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므로, 더 나은 구분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07년 9월 23일, 다해 연중 제25주일 강론 말씀에서도 이 비유의 결론도 지금 말씀드린 NAB에서의 이 비유의 결론과 동일합니다:
 
 
 
사실 이 짧은 비유는 다음의 표현들과 함께 끝납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복음서 16,8).
 
-----
 
 
 
11. 이와 같이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한 이유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집사의 인색하지 않은 처신에 있음을 이제 이해를 하였기에, 예를 들어, 우리는 이 비유의 적용으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인 제12절 및 13절도 별다른 추가 묵상 없이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마태 6,24)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12. 이제 남은 부분은 다음의 절들입니다:
 
-----
8ㄷ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재물을 올바르게 이용하여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
 
 
12-1. 루카 복음서 16,8ㄷ에 대한 Tob의 주석 및 저의 졸저서인 "... 성경공부 해설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Tob) 이 세상의 사기꾼들이 자신들의 부정직한 사업에 있어 영리한 정도로(how) 하늘 나라(the Kingdom,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도 제자들이 또한 영리할 것을 요청합니다.
 
(졸저서) 이 집사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서로 거래를 할 때에 보이는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Jesus' kingdom)에 대한 제자들의 활기 없는 반응과는 크게 대조를 이루는, 열렬한 반응을 나타낸다.
 
12-2. 제10절은, “의로움(정의, justice, righteousness)의 정의(definition)“를 이해하고 계신 분들께는, 별도의 추가 설명이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에 있는 ”의로움(정의, justice, righteousness)“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다음의 저의 졸글 및 이 졸글에서 안내하고 있는 글들을 꼭 읽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38.htm (클릭하십시오, 필독 권유)
 
 
12-3. 마지막으로, 제9절과 제11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불의한 재물(dishonest wealth)”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i) 저의 졸저서인 “...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I 연중 제25주일 해당 절에 대한 다음의 해설:
 
여기서 ‘불의한 재물’로 번역한 표현을 NAB에서는 ‘dishonest wealth’로 번역하였다. ‘불의한 재물(dishonest wealth)’이란 글자 그대로 ‘mammon of iniquity(부당에 기인하는 부/물신)’를 말한다. 맘몬(mammon)은 ‘사람이 신뢰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통 설명이 되는 아람어 혹은 히브리어 단어의 그리스어 음역(Greek transliteration)이다.
 
 
 
(ii)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일반 알현 교리교육 강론 말씀 중에 인용하고 있는, 다음에 있는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의 해설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2-3-1. 다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이 비유의 적용'(루카 복음서 16,1-13)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한 2005년 11월 2일자 일반 알현 교리 교육 강론 말씀(제목: 시편 112)에서 발췌한 것이니, 읽고 묵상하도록 하라:
 
 
 
 
우리는 "관대한,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충실한 자의 고요한 얼굴을  응시하며, 그리고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님의 확언에 대하여 주석을 하였던 3세기의 교부인,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St. Clement of Alexandria, 150-215년)의 표현들에 귀를 기울입니다. '약은 집사에 대한 비유'에서, 이 표현이 나타나는데 이 표현에 따라 우리는 "불의한 돈(unjust money)"으로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거기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일어납니다: 돈과 부는 그 자체로 불의한 것인가, 혹은 주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자신의 강론 "What rich man can be saved?"에서 이 비유를 매우 잘 설명하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어떤 자가 자신 고유의 선(good)으로서 자신을 위하여 가지고 있는 그러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접근 가능하도록(available) 하지 않는 모든 소유(possession)를 불의하다(unjust)고 선언하시며, 대신에 당신께서는, 성부 가까이에 영원한 거처를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작은 이들 중의 한 사람에게 구제(relief)를 제공함으로써, 바로 이 불의로부터  정의롭고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성취할 가능성이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 10,42; 18,10을 참조하라)" [31, 6; Collana di Testi Patristici,  CXLVIII, Rome, 1999, pp. 56-57]. [Collection of Patristic Texts](*)
 
-----
(*) 번역자 주: 다음의 영어 번역본에서 XXXI을 또한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t/Clement_of_Alexandria-richman.htm
-----
 
 
독자들에게 설교하면서, 클레멘트는 다음과 같이 주의를 줍니다: "당신께서는 그대에게 요청할 것을 명령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요청을 받고자 기다릴 것을 명령하셨던 것이 아니고, 대신에, 그들이 구세주(Saviour)의 제자들인 한, 듣게 되는 것이 가치가 있는 자들을 그대 몸소 찾아 나설 것을 명령하셨음을 우선적으로 알도록 하십시오" [31, 7: ibid., p. 57].
 
그러고 나서, 성경의 다른 본문을 인용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토 9,7) 라는 이 사도의 말은 아름다운데, 기쁘게 주는 이는 주는 것을 즐기나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수확하기 위하여, 인색하게 씨를 뿌리지 않으며, 그보다는(instead), 세분화(ramifications)들과 차별(distinctions)들 그리고 후회(sorrow) 없이 그는 함께 합니다(shares):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함에 있어 진정한 것입니다" [31, 8: ibid.].
 
 
12-3-2. 제10-13절에 대한 이해는, 또한 다음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07년 9월 23일, 다해 연중 제25주일 강론 말씀이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다음의 출처를 클릭하여 또한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3. “약은 집사의 비유“에 대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약은 집사의 비유" 혹은 "부정직한 집사의 비유"로 구글 검색을 해보면, 이 집사가 채무자들이 주인에게 진 빚을 탕감해 준다고 이해하고 있는 강론/묵상 글들을 많이 읽을 수 있는데, 위의 글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그 당시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의 풍습을 고려할 때에, 이러한 해석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아니, 주인에게 빚을 진 채무자들을 탕감해 주는 집사를 두고서, 도대체 어느 주인이 오히려 칭찬을 할까요??? 
 
당시의 팔레스티나 지역의 풍습에 따르면,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와 비슷하게, 집사 자신이 "업무 수수료"로서 자신의 몫으로 받기로 하였던 고리의 수수료를 채무자들에게 면제해 주었던 것인데, 가톨릭측 혹은 개신교측 모두에서, 대부분의 우리말로 된 국내의 강론/설교/묵상 글들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결론으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정작에 이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이 표현" 즉, “집사 일을 청산하게”라고 번역한 표현의 실제 의미에 대하여 침묵 혹은 크게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너무 안타까워, 상당한 시간을 들여, 다들 충분히 이해할 만한 확실한 근거 자료들과 함께 이번의 글을 작성하여 올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해석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 및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료들에 대하여서도 널리 알고 계셔야 할 내용들이기에, 또한 말씀드렸습니다.
 
 
참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접속하시면, 이글을 작성하는 데에 참고하였던 자료들 모두를 접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update/c_ot_25.htm (클릭하십시오, 필독 권유)
 
 
이 글이 강론 혹은 묵상 글을 작성하시는 분들께 약간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다루는 내용이 내용인지라, 상당히 긴 글이 되었습니다.
 
 
----------
작성자: 소순태 마태오 교수
인용/참고 자료들에 대한 조사 및 위의 본글의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 100시간
  


2,711 9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