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성당 게시판

흑산도 아가씨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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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자 [stellara] 쪽지 캡슐

2002-11-27 ㅣ No.3170

 

(어린 그녀)

음력 3월의 어느날 진달래 개나리의 화사함은 남녁 해안을 물들이고 새순이 새록 새록 그 가지들에 살찌우던날. 전날 밤새 억수같이 퍼붓던 슬픈비는 그날 아침 말끔이 개었었지요. 여덟살의 그녀는 앞집 애순이라는 또래 친구와 북새통속에 울음 바다를 이루던 상여가 나가버린 텅빈 집에서 나와 머리엔 진달래 화관을 만들어 쓰고 한아름 개나리를 꺾어안고 산속을 헤메어 다니다가 곡소리 요란한 곳으로 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외할머니의 불호령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어요. 몰래 숨어서 본 그곳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례치르는 산소였던것이었어요. 가엷은 그녀는 어린것이 사나운것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집에 두고 장례치르러 가셨는데 철없는 그녀는 앞집 친구와 들놀이, 꽃놀이를 하며 아버지 산소까지 간것이지요. 지금도 그때 제 모습을 생각해 보면 눈물이 흐르곤 하지요. 일찍 부모 잃고 장례식에 철없는 어린것들을 볼때면 그때의 제 모습을 보는듯 해요.

 

(동생을 등에 없고)

아버지 돌아가신후 의지의 한국여인 울엄마는 밤낮없이 우리의 주린배를 채워주시기 위해 돌도 안된 막내 동생을 두고 돈만들러 나가셨어요. 아직도 젖먹이였던 동생은 언제나 저의 등에 단단히 업혀있었는데 내려놓으면 다시 업을수 없는 여덟살의 그녀는 종일 그아이를 업고 있다가 어느날은 엄마가 오셔야만 내려좋을수 있어어요. 그어린 동생은 거의 먹지 못해 성장이 많이 늦었었지요. 골골골 거리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40이 넘은 장년이 되어 저와 의지하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지요.  어린 그녀, 재넘고 모래길 건너 어린 걸음에 40분정도 걸리는 흑산도 초등학교에 다녔었지요. 작은 어촌 마을의 초등학교는 너무나 아름다운 작은 학교였는데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있는데 성인이 되어 한번도 가보지 못하여서 그리움의 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학교옆에 성모중학교라는 오빠가 다니는 중학교가 있었는데 이름에서 느낄수 있듯이 선교사가 세운 중학교였고 외국에서 원조를 많이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곳에는 성당이 있었는데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성모님상아래 오빠와 제가 찍은 사진이 아직까지 나에게 남아 있어 그때의 추억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그때는 저에게 신앙이 무언지도 몰랐는데 그때부터 저에게 신앙생활를 할 계기가 되었었을까요. 집에 돌아오는 길엔 모래사장에서 조개를 건지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하며 지금 생각해보면 낭만의 바다소녀가 거기 있었지요.

외할아버지가 절어주신 앙징맞은 대바구니와 불에 달구어 제 작은손에 맞는 호미를 만들어 주셨느데 가끔씩 단발머리의 어린 그녀는 앞바다 바지락밭에가서 한가득 바지락을 캐어와 노년의 할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리곤했지요.

 

(뱃사람과 뱃사람의 마누라 밖에 될것이 없다던 큰오라버니)

중학교 2학년이던 큰오빠. 수재라고 소문난 그 어린 소년은 졸지에 가장이 되어 어린 동생들을 돌보아야 할 현실에 옮겨간 학교에서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방황했었던것 같아요. 그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실땐,

"여기, 이 어촌에서 우리가 계속 머무르다간 뱃사람이되어 고기잡이로 일생을 살던가, 내누이들은 뱃사람의 아내로 살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어린 그 학생은 시시때때로 육지로 떠나갈 생각만 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다니 정말 대견하구요.

고등학교가 없어 진학을 위해 목포라는 곳으로 시험보러 갔는데 장학생으로 합격하지 못하면 진학할수 없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곳으로의 진학이 저희가 흑산도라는 섬에서 도시로의 탈출(?)할 계기가 된겄이지요. 지금도 큰 오라버니의 결단에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내 힘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초등학교 시절)

단발머리 흑산도 소녀는 도시학교에 3학년에 전학하여 새까만 피부에(아시겠지만 바다바람은 피부를 새까맣게 그을려 놓음) 커다란 눈만 꺼벅거리며 그야말로 촌뜨기가 되어 조용히 뒷자리에 앉아 있어어요. 밤이나 낮이나 일하시는 엄마는 어린 저희에게 신경이 쓸 겨를이 없으셔서 어린 소녀는 자신이 자신의 일을 처리하며 살아었지요. 어찌보면 그때부터 철이 일찍들어 지금까지 잘(?) 살아온게 아닌가 합니다. 슬프면서도 재미있는 사실 한가지, 어린 남동생은 혼자둘수 없어 학교에 데리고 가는 일도 가끔 있었는데 어느날은 교실까지 들어와 누나와 수업도 같이하고 누나의 남자친구들에게 딱지도 많이 얻어서 신바람이 나기도 했지요. 그때의 교실 풍경을 머리 속에 그려 보시면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시나요? 하지만 누구 하나 저에게 눈총 주는이가 없었답니다. 착한 그대들 지금 어디들 어찌 사나...

 

이렇게 유년 시절을 지낸 흑산도 아가씨의 다음이야기는 다음번에 쓰겠습니다.

 

11월의 깊은 겨울밤, 흑산도 아가씨 스텔라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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