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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6일 성 노르베르토 주교♬가톨릭성가 194번 성체 안에 계신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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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 6월 6일 성노르베르토 주교 ST. NORBERT San Norberto Vescovo Born :c.1080 (Xanten, Germania, 1080-1085 - Magdeburgo, 6 giugno 1134) Norberto = uomo illustre del settentrione, dal tedesco (illustrious man of the settentrione, from the German)
성 성 노르베르또 주교의 생애에서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독일 산튼(Xante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또는 노르베르토)는 하인리히 5세 황제의 궁전에서 하사품을 관리하는 차부제로 지내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식에 참석하고자 말을 타고 가다가 번개를 맞아 땅에 떨어졌다. 얼마 후 의식이 회복되자 방탕했던 지난 생활에 대해 깊이 통회하며 “주님,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옛날의 사도 바오로(Paulus)처럼 주님께 여쭈어 보았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그는 쾰른 근처 지그부르크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결국 주님의 뜻을 확신한 그는 쾰른 시로 나와 사제 서품을 준비하고 1115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왔으나 환영받지 못하였다. 그는 과거의 죄의 보속으로 이러한 모욕과 냉대를 참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후 그는 주임 사제직을 사임하고 소유물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뒤 보속의 길을 떠났다. 그가 북부 프랑스를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설교한 것이 큰 효과를 내게 되어 그는 매우 유명한 설교가로 변신하였다. 이윽고 포세스(Fosses)의 성 후고(Hugo, 2월 10일)가 동반자가 됨으로써 그의 능력은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1120년 1월 25일 그는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레몽트레(Premontre)에서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율수 수도회를 개혁하여 새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 수효는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프레몽트레 수도회’이다. 그는 생전에 8개의 대수도원과 2곳의 수도원을 세웠고, 교황 호노리우스 2세(Honorius II)로부터 1125년에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후 테오발드(Theobald) 백작이 입회를 요청하자 그는 입회를 거절하고 세상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따라 살도록 제3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그는 독일에 갔다가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굴복하여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하였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할 일들이 태산 같았다. 그가 임지에 갔을 때 주교관의 문지기는 그의 너무나 남루한 모습을 보고 거지로 착각하여 주교관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새 주교와 그의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갖게 된 이들도 많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방해하며 심지어 그를 처치해 버리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덕행과 온화하고 용맹한 마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였다. 1132년 그는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다가 중병에 걸려 4개월 간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그 후 교구로 돌아와 2년 간 직무를 수행하다가 1134년 54세로 선종하였다. 그는 캉브레(Cambrai)에서 이단과 싸우는 친구 성 발트만(Waltman, 4월 11일)을 도와주었으며, 성체 현존에 관한 이단을 배격하는데 공로가 컸다. 그는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672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는 전세계 교회에서 그의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참고자료
사람들이 프란치스코회(O.F.M)를 농담으로 '돈에 빠진 사람' (Out For Money)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프레몽스트라텐시안 (Premons tratensions) 수도회를 '괴물같은 허세'(Monstrous Pretensions)라는 말로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그 이름은 사실 노르베르토가 12세기에 수도원을 세운 장소인 프랑스의 프레몽트레에서 나온 것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080년 경 프러시아의 클레베스 공국 삭텐에서 젠넵의 헤리베르트 백작과 귀즈의 헤드비제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헨리 5세 황제의 궁중에서 하사품 관리자로 일하면서 생을 즐겼다. 얼마 후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게 된 그는 일어나자마자 성 바오로와 같이 "주여, 당신은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지그부륵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날을 보내며 원장과 더불어 마음의 수양에 진력했다. 그 후 그는 쾰른에 가서 사제 서품 준비를 하고 2년 후 훌륭한 자격을 갖추어 서품받았다. 고항에 다시 돌아온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신앙이 극히 두터워져 갖은 고행을 하며 종종 설교도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반대에 부딪쳤다. 특별히 옛 생활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때로는 얼굴에 침 뱉음을 받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는 이전의 죄의 보속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무엇이나 눈을 감고 끝까지 인내하며 다 받았다.그는 이곳 저곳 마을을 찾아다니며 설교했다. 가는 곳마다 박해와 냉대를 받았고 나중에는 교황 사절에게 고소까지 당했다. 노르베르트는 이에 대해 겸손되이 변명했다. 그리고 자기 소유물을 팔아, 얻은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신분이나 지위를 모두 버리고 마침 교황 젤라시오 2세가 체류 중인 프랑스 남쪽에 있는 프로방스에 갔었는데, 이미 노르베르토의 성스러운 일 상 생활을 잘 알고 있던 교황은 기꺼이 그를 맞이하며 이후 당신 곁에 머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는 교황에게 간청하여 어디서든지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우선 쾰른에 가게 되었다. 맨발로 눈 속을 걷고 야채를 먹는 것에 만족하며 가끔 밤을 새워 가며 기도했다. 프랑스의 바란시안누에 도달했을 때 민중의 간청에 못 이겨 일장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는 불어를 조금 밖에 알지 못했지만 청중은 모든것에 대해 그가 말하려고 하는 점을 깨닫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에서의 성령 강림 날에 사도들 위에 일어난 것과 같은 감탄할 만한 성령의 특별한 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설교하고 싶었으나 동행했던 3사람의 동료가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젊은 성직자가 그에게 와서 동행하기를 간청해 노르베르토는 그 사람과 같이 간부레의 주교 불갈도를 방문하고 부근 일대에서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활동에 풍부한 축복을 내려 주셔서 그 성과가 아주 컸다. 그러므로 라온의 주교 발델미이는 교황의 추천에 따라 대우를 극진히 하며 그를 자기교구에 초빙했다. 노르베르토는 그 청을 받아들여 주교로부터 프레몽트레의 계곡에 있는 소성당을 받았다. 그는 예전부터 기도와 고신극기를 할 수 있는 수도원 창립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프레몽트레에서 한 무리의 백의의 수도자들이 손에 십자가의 횃불을 들고 행렬하는 꿈을 꾸었다. 1120년 1월 25일, 그가 갈망하던 프레몽트레 수도회가 창립되어 주교는 그에게 흰옷을 주었는데 이것은 그 후 오랫동안 그 회의 수도복이 되었다. 그는 즉시 부근 일대를 다니면서 설교했다. 이에 감동된 사람들이 입회해 곧 35명의 수련자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사제품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노르베르토는 그들에게 수도회의 정신을 가르쳤다. 특별히 모든 성체 성사에 관계되는 사물, 즉 미사 성제와 기타 모든 공경 예식에 대한 존경과 신심을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했다. 교회의 용무를 띠고 독일의 슈파이에르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못 이겨 드디어 막드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했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가 임지에 갔을 때에 대주교관의 문지기는 그이 너무나도 남루한 의복을 보고 거지로 잘못 생각해 그를 주교관에 들여보내지를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주교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매사에 방해하며 심지어는 그를 없애버리려고 까지 했다. 실제로 악한이 칼을 들고 덤볐을 때 다행히 그 위기를 모면하고 아무 상처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깆거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주교의 덕행과 온화하고도 용맹한 마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132년 노르페르토는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을 때 뜻밖에 중병에 걸려 4개월간 병상에 눕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간신히 막드부르크에 돌아와 2년간이나 더 직무를 보다가 마침내 1134년 6월 6일, 54세로 선종했고, 1582년에 시성되었다.
♬가톨릭성가 194번 성체 안에 계신 예수 Ave Verum
San Norberto è il fondatore, nel 1121, di un antico ordine monastico, che però si dedicò anche all'evangelizzazione "ad extra", anticipando così l'avvento degli ordini mendicanti: i Premostratensi. Il nome viene dalla valle francese di Prémontré, nei pressi di Laon, dove il santo si era fermato insieme ad alcuni compagni. Norberto era nato a Xanten, in Germania, tra il 1080 e il 1085. Fece vita mondana, ma poi un evento lo sconvolse e lo indusse a cambiare. Un fulmine gli cadde vicino, per fortuna solo tramortendolo. Divenne prete, fondò l'ordine - che presto si diffuse in Europa e anche in Palestina - dal 1126 fu vescovo di Magdeburgo. Morì nel 1134 ed è santo dal 1582. (Avvenire) Etimologia:Norberto = uomo illustre del settentrione, dal tedesco E' presente nel Martirologio Romano. San Norberto, vescovo, che, uomo di austeri costumi e tutto dedito all’unione con Dio e alla predicazione del Vangelo, vicino a Laon in Francia istituì l’Ordine dei Canonici regolari Premostratensi; divenuto poi vescovo di Magdeburgo in Sassonia, in Germania, rinnovò la vita cristiana e si adoperò per diffondere la fede tra le popolazioni vicine. Arriva a essere suddiacono, e lì si ferma. Sta un po’ al servizio dell’arcivescovo di Colonia, poi va al seguito dell’imperatore Enrico V. E non si rovina con le penitenze. Più feste che preghiere, più banchetti che digiuni. Chiaro esempio di come dev’essere un ecclesiastico. E all’epoca non è il solo, malgrado ogni sforzo di papi e vescovi riformatori. Ma nel 1115, mentre è in viaggio, un fulmine lo sfiora, lo tramortisce, e lui non ha dubbi: questo è un segnale, forse un ultimo avviso. Ripresi allora gli studi, è ordinato sacerdote e comincia a viaggiare; sempre a piedi nudi. Predica ai cristiani, ma soprattutto ai preti: prima del gregge, bisogna raddrizzare i pastori.
Norbert Tried to reform his order's local house, then became a wandering preacher. Founded a community of Augustinian canons at Premontre, France; they became known as the Norbertines or Premonstratensians, and started a reform movement that swept through European monastic houses. Friend of Blessed Godfrey of Cappenberg. Archbishop of Magdeburg, Germany. Reformed the clergy in his see, using force when necessary. Worked with Saint Bernard and Saint Hugh of Grenoble to heal the schism caused by the death of Pope Honorius II. Opposed heresy in Cambrai with the help of Saint Waltmann.
The priests lived in community, where they continued the work of the apostles. When Norbert was appointed as archbishop, he urged his brothers to carry the faith to the lands of the Wends. Faith was the outstanding virtue of Norbert's life, as charity had been the hallmark of Bernard of Clairvaux. Affable and charming, amiable to one and all, he was at ease in the company of the humble and the great alike. Finally, he was a most eloquent preacher; after long meditation he would preach the word of God and with his fiery eloquence purged vices, refined virtues and filled souls of good will with the warmth of wisdom. from the life of Saint Nor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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