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동성당 게시판

[Re:3723] 아빠가 들려준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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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영 [miso] 쪽지 캡슐

2000-03-08 ㅣ No.3754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야고버 아저씨, 전 미소예요, 아빠 친구분이시죠? 수서성당에 계시는군요

저도 못 본 글인데 아빠 파일을 뒤적거려 찾았는데 이글이 있더군요. 우리 본당 교우분들에게 알려드려도 좋겠다 싶네요.

행복하세요

 

 

                  이마에 혹 달린 신부님들

                                                                                                 임용학 (스다니슬라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 본당에는 제법 큰 공소가 하나 있었다.

훨씬 전에는 그곳이 본당이었던 곳인데 워낙 바닷가 벽촌이라서 교통이 좋은 읍내로 본당이 옮겨진 후로는 주일 미사도 제대로 드릴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하루 세 번 어김없이 녹슨 종탑의 삼종소리가 마을을 깨웠고, 비록 낡은 목조 건물이지만 100여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대와 감실, 풍금과 제의실, 14처가 엄연히 갖추어진 성당이었다.

또 첨례날은 초가지붕으로 된 아래채에서 모처럼 구수한 음식 냄새가 나기도 했는데, 사제관이었다가 노인들의 모임장소로 쓰이곤 했다.

  한 번은 이 곳에서 주일 미사의 복사를 맡게 됐을 때의 일이다,

약간 낯설기는 했지만 평소와 같이 제의실에서 신부님과 모든 준비를 끝내고 미사에 굶주려 있는 이들이 부르는 입당성가에 맞춰 신부님 앞에서 제대를 향해 엄숙하게 걸어 나갔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몸을 돌려 제대에 절을 하려는데 이게 웬 실수, 신부님이 뒤따라 나오시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 황당하여 제의실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이건 또 웬 날벼락, 신부님께서 문 저편에 뒤로 벌러덩 나자빠져 계시는 게 아닌가. 후닥닥 달려가 보았더니 신부님 이마에 혹이 툭하니 부풀어 있었다. 웃어야할 지, 발을 굴러야 할지 황당한 순간에 신부님께서 괜찮다고 다시 나가자고 하여 미사를 간신히 끝냈지만 미사시간 내내 신부님의 아픈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기가 여간 딱하지 않았다.

나는 긴장했던 탓인지 "쿵"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제대 앞에 앉아있던 신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졌을 게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제의실 문은 어른이면 누구나 고개를 깊이 숙여야만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낮은 문이었던 것인데 뒤따르던 신부님께서 그만 깜빡 잊으신 모양이었다.

미사후 호기심으로 그 곳을 눈여겨보았더니 "머리 조심"이라는 커다란 글자와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좁은 문으로 가시오"(마태 7;13)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여기에 처음 교회를 연 외국인 신부님께서 건물을 지으실 때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당시 이곳의 환경이 너무 달라 자신의 생활습관을 이곳에 맞추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는 하나 숨은 뜻은 알 길이 없다.

그 신부님께서는 매일 아침 미사를 봉헌하러 제의실을 나설 때마다 예수님께서 친히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 멸시받고 외면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는 참 목자의 삶을 따르기로  한국의 낮은 가옥 구조에 맞춰 허리를 굽혀 입당하는 방법을 택하셨으리라 추측해 본다.  

당시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 성당이었고 또 유일한 기와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초가삼간 오두막집에서 기거하는 대다수의 민초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본보기가 아닐까?

요즘 신설되는 본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대형 성당 건물로 오히려 주위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일면을 보게 된다.  

  그 후 여러 신부님께서 사목하실 때에도 번번이 그 문을 바꾸자는 얘기가 논의되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그 때마다 신부님들께서 불편을 무릅쓰고 그냥 그대로 놔두자고 하셨다는 것도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좁은 문"

어른들에게 좁은 문은 아이들에겐 넓은 문일 수 있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대궐에 사는 사람들이 오두막집에서 새어 나오는 아픔을 찾아 나서며,

백성을 다스리는 이들도 스스로 백성들 속에서 뒹굴며,

선생님이 학생들의 눈 높이로 가르칠 수는 없을까?

봄이 겨울을 찾아오듯 주일에라도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분이 계신 곳, 좁은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면 좋겠다.

하느님께서도 몸소 인간의 길을 걸으셨는데......

그 때 이마를 부딪힌 신부님께서는 은퇴하실 나이임에도 본당의 딱한 이들을 위해 손수 멸치 장사까지 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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