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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13: 사순 제4주일 - 자비로우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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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3-09 ㅣ No.92

[전례력에 따른 가톨릭교회교리서 공부합시다]
(13) 사순 제4주일 - 천주 성부, 자비로우신 아버지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근원, 하느님 아버지





- 하느님은 무한히 용서하시고 자비로우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시다. 그림은 '돌아온 탕자'(뉴욕 박물관, 작자 미상). [CNS]


사순시기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회개와 속죄의 생활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깊이 깨닫고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 곧 천주 성부의 마음입니다.


◇ 살펴봅시다


㉠ 한 분이신 하느님(198~231항) : 우리가 신앙고백 때 바치는 신경 가운데 하나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고백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고백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200항).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 당신께서 유일하신 분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유일하신 하느님은 살아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탈출 3,6). 이 말씀은 지금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느님이 바로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곧 언제나 한결 같으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어서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직접 알려 주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나는 있는 나다"라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이름 '야훼'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깨닫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206항) 신비로운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 하느님은 "숨어 계신 하느님"이며 또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있는 나다"라는 하느님 이름은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곁에 늘 계시는 하느님"(207항),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은 또한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을 용서한다"(탈출 34,6).

이 하느님은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말씀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215항). 그뿐 아니라 당신을 계시하실 때도 하느님께서는 진실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르침은 그 자체가 참된 법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것도,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죄를 용서하신 것도 모두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이 사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비유됩니다.
 
㉡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 : 많은 종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 권위를 지니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자녀들을 대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238~239항 참조).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의미에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240항)시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이십니다(마태 6,32 참조).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한결 같으신 아버지이십니다(마태 5,45 참조).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보듯이 인내하시고 용서하시고 무한히 자비로우신 아버지십니다. "모든 용서의 근원"이십니다(1439, 1449항).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은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사랑에 힘입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됐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넣어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742항 참조).


◇ 알아둡시다

전능하신 하느님(268~278) :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모두 하느님 아버지를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이 "우주적"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전능은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우주적 전능에 대해 여러 번 고백합니다. 그분은 "만군의 주님"(시편 24,10)이시며,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이루시는 분(시편 135,6)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주님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무한한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아버지로서의 전능을 보여주십니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시라면 왜 세상에는 악이나 고통이 있는지요? 왜 때로는 하느님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지요?

교회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의 자기 낮춤과 부활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신비하게 드러내시고 그 낮춤과 부활을 통해 악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시다"(272항).

우리는 오직 신앙으로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 신비한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동정 마리아는 이 신앙의 가장 탁월한 모범이십니다.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우리 영혼에 깊이 새겨진 이 확신보다 우리의 신앙과 희망을 더 굳게 해주는 것은 없다"(274항).

[평화신문, 2013년 3월 10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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