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 공현 대축일(나해) 마태 2,1-12; ’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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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12-22 ㅣ No.5626

주님 공현 대축일(나해) 마태 2,1-12; ’24/01/07

 

  

 

  

언젠가 한 번 신자 한 분이 오셔서 여쭈셨습니다.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다 제게는 좋은 분들이셨는데, 세례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조상님들도 천주교를 알지 못하던 시대에 태어나 사셔서 그런지 세례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그분들은 다 지옥에 가셨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 조상님들, 그리고 아직도 가족 중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이가 있는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구원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가끔은 많은 이들이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하느님을 믿는 우리 신앙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전혀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거나 안 믿거나 현실을 살아가는데 특별한 손해나 이득이 되지 않으며, 실제로 내적 믿음을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특별히 다른 이들과 달리 더 거룩해 보이지도 않는 신앙을 왜 가져야만 하는지, 의문과 반감을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표현하는 예수님에 대한 안내와 증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현이겠습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간디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믿고 따를 만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의 말과 행동은 싫다는 입장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도인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영국인 신자들은 만민의 평등과 박애와 구원을 주창합니다. 실제로는 다른 나라를 강제로 침범하고 통치하며, 식민지 백성들을 압박하고 차별하며 수탈해가는 모습이 그들이 믿고 표방하는 교회의 가르침과는 너무나도 다르다고 느꼈기에, 그렇게 반발했으리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그러자 헤로데 임금과 예루살렘이 술렁거립니다. 헤로데는 학자들에게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나기로 기록되어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의 비중이나 그들이 찾아왔다고 하는 아기, 그래서 헤로데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술렁거릴 정도로 받아들인 아기의 탄생이, 그냥 여염집 아기가 아니라 메시아의 탄생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학자들은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미카 5,1; 2사무 5,2) 라는 예언을 찾아내 보고합니다.

 

그래도 헤로데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메시아가 태어났고 그 장소도 드러났건만, 그들은 진정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인지에 대한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는지,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7) 즉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겉으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8) 라고만 말합니다.

 

박사들은 헤로데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납니다. 박사들은 이 시대에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감을 잡아서, 자신들이 이스라엘까지 오도록 했던 표징을 다시 한번 자기들 나름대로 확인하게 되어 기뻐합니다. 복음서에는 동방박사들이 감잡은 표징이 메시아 별이라고 기록합니다. 박사들은 왕에게 바치는 황금과 하늘에 바치는 예배의 분향제로 쓰는 유향과 죽을 때 사체에 바르는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11절 참조). 이 선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예수 아기의 미래를 미리 엿보게 해줍니다. 곧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사의 제물로 탄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왕 그리스도.

 

헤로데는 학자들을 동원하면서까지 알아낸 메시아 탄생지를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뒤로는 박사들에게 메시아의 표징이 나타난 시간을 몰래 캐물어 알아내고는 경배가 아니라 제거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우리는 매년 1228, 성탄 8부 축제 중 제4일에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봉헌합니다. 메시아가 될 수 있을 만한 아기들이 죽어간 날을 기억합니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그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제거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를, 태어나자마자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12)

 

우리는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 박사들이 굳이 찾아와서까지 묻는 메시아의 탄생 내용을 이스라엘은 몰라서 경배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알면서도 실제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으면서도 실제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처절한 현세를 살면서,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있어 희망은 죽어서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 뿐, 현실에서는 그냥 돈과 권력과 명예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요 행복의 지표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박물관이나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살아있지 않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대교의 삶이었으니, 아무도 유대교가 표방하는 믿음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보다는 로마의 식민지가 된 후,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에 이해득실이 확실히 드러났을 때, 믿음이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챙겨주는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을 지언정, 하느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믿음의 핵심은 안중에 없는 삶이었습니다.

 

1800년대를 살다 간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회 신자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누군가 내 앞에서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겠다.” 라는 말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리타분하게(?) 신앙을 증거한 그가 쓴 소설 중에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당대 사회에 또 다시 재림하니까 그분을 맞이하는 종교인들이 예수님 없이도 저희가 다 알아서 잘하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또 오셨습니까?” 하면서, 예수님께 그만 돌아가시라!”라고 했다는 장면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향한 19세기 작가의 지적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향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진정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일러주시고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믿고, 추구하고 있는지?  

혹여, 자신의 신앙생활 방식은 고수하면서, 다른 성령의 움직임은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단죄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우리 현실의 심리적인 위로나 안식을 찾고, 속으로는 분노와 갈등과 긴장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임시적이며 표면적이며 허구적인 평화를 갈구하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락과 평안과 안위를 얻고, 또 유지하기 위하여 주님 대전에 다다르고 있는지?

 

구세주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혜택이 비단 세례를 받은 이에게 그치지 않고, 인류 모두에게 확산되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믿는 믿음을 우리의 일상에서 실현하기로 합시다. 우리의 꿈과 희망이 박물관과 책의 기록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내세의 구원을 향한 우리의 현세적인 행복추구가 이율배반으로 깨지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다같이 기뻐하며 희망할 수 있는 공동체 전체의 온전한 구원이기를 빕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라는 다음 주 독서의 말씀이 기다려집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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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5&id=194340&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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