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동성당 게시판

두 아내와 한 집에서 ^.^

인쇄

임용학 [yhim] 쪽지 캡슐

2000-10-13 ㅣ No.5216

†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울보 누시아의 대모님 이야기입니다.

우리 앞집으로 당시 30대 초반의 승범이네가 이사를 왔고 며칠만에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답니다.

마주보는 양쪽 집 대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아무 문이나 들어가면 밥도 먹을 수 있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도 꺼내 마실 수 있는 그런 시골 인심으로 지냈습니다.

그 집 큰 아이는 우리 동욱이가 인기스타였고, 같은 또래인 누시아와 승범이가 손잡고 유치원 가는 모습은 늘 주위 사람들을 깔깔대게 했습니다.

 

문밖으로 새 나가는 우리 집 웃음소리가 좋아 성당에 나가고 싶다고 먼저 말을 꺼낸 그분들과 이웃사촌 관계에서 발전하여 저희는 대부모가 되었고, 은영이가 유아영세를 받을 때는 승범이 엄마가 대모, 그 집 두 아이의 대부는 동욱이가 서게 되어 촌수(?)가 복잡합니다.

우리 가족이 문정동으로 피난(말못할 사정)을 와서 정을 붙이고 살 수 있었던 것도 이웃과의 따뜻한 나눔 때문이 아니었나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승범이 아빠가 처음 시작한 사업에 실패하면서 빚더미에 못 이겨 외국으로 도피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애써 장만한 집도 처분하게 되었고, 오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하루 하루가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을 때 마침 누시아 엄마가 용기있게 제안을 했습니다.

거실도 없는 방 두 개뿐인 13평 아파트, 어차피 좁은 공간인 것을 두 가족 7명이 먹고 자는데 불편함은 무슨 차이가 있겠냐고, 그냥 몸만 누이면 족한 것 아니냐

당장 짐 챙겨 애들 데려 오라고 해서 수개월을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처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도 하기 싫은 그 어려움을 알았기에 말을 건넨 아내가 사랑스러웠고, 이유를 모르는 이웃 사람들은 두 아내와 한 집에 산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가족 모두가 전혀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깡통이 꽉 차니까 소리가 나질 않은 탓이었을까요?  더 이상 찌그러질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아무 내색 없이 잘 참아 준 덕분에 그들은 이듬해 미국으로 떠나 지금은 정착하여 그런대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벌써 십년도 지난 이야기입니다.

 

새삼스럽게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이웃해 있는 문정2동 성당에서 우리 본당의 시설을 빌려 주십사고 요청이 있었기에 그분들의 딱한 사정이 오죽할까 여겨져 지난 날 기억을 되살려 보았습니다.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였습니다.

 

대희년을 선포하던 날 성문을 열고 들려준 말씀들을 되새겨 봅니다.



91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