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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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연 [aldus119] 쪽지 캡슐

2005-07-05 ㅣ No.457

 

어느 소설가가 일간 신문 칼럼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 작가는 언젠가 지하철에서 늙은 스님 한 분을 만났답니다. 다른 스님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덥수룩한 구레나룻에 꾀죄죄한 누더기 가사를 걸친 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은 과자봉지부터 담요와 운동화까지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 찬 배낭을 지고, 손에는 과일이며 장난감들이 가득 들어있는 보따리까지 들고서 퇴근시간이라서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한 지하철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소설가도 다른 사람들처럼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 스님을 잠시 쳐다보다가 외면해버렸답니다. 필시 승려를 가장한 걸인이거나, 시주를 빙자하여 금품이나 모으는 땡추일거라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서둘러 전동차를 빠져 나와 서둘러 계단을 오르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 소설가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이 짐 좀 들어주지 않겠나?”. 고개를 돌려보니 손목을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지하철 안에서 본 그 스님이었습니다. 소설가는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몹시 피로하고 지친 모습의 스님을 보자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지요. 짐을 들어보니 노인이 들기에는 너무 무거웠습니다. 이윽고 전철역을 나설 때 그 소설가는 스님을 향해 시큰둥하게 한 마디 내뱉었습니다. “좀 버리세요, 부처님처럼...” 욕심을 버리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버렸으니 가져가는 게야. 내가 돌보는 아이들을 도와주시는 보살님들이 계신데, 차도 없고 운전도 할 줄 모르니 이 늙은 중이 매일 이렇게 돌아다닐 수밖에”. 그 스님은 부모 없는 아이들을 사찰에서 돌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하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설가는 자신의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이 용범,「오해와 편견」, 『경향신문』, 2002, 11,16, 6면)

이 소설가는 스님을 보기는 보았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지요. 남루하고 초라한 겉만 보았지 숨겨져서 드러나지 않은 따뜻한 마음은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서야 그 스님의 설명을 듣고서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위의 사람들을 눈으로는 보지만 실상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외양에만 매달리면,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비난하기 쉽고, 이런 부정적 평가와 비난은 한 사람을 움추려들게 하거나 사납고 거칠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속마음을 본다면,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무엇을 발견하여서 그 사람을 새롭게 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긍정적 생각과 인정은 움츠려든 사람에게 활기와 힘을 북돋아 주고, 거칠고 사나운 성정을 온순하게 다듬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과 성장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도 사람의 겉이 아닌 속을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이 아닌 속을 들여다보며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께 자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영,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마음을 바르게 인도해 주시도록 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루가 복음이 전하는 예리고 맹인의 기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가 18,42)라는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손희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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