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하느님의 사랑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4/4 [영광] [divine glory] [성경용어_사랑]] [교리용어_사랑] [성경해석] 773_love 78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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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4/4 [122.128.42.*]

2011-07-21 ㅣ No.1086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사랑(love)"에 대한 글들 전부를 순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링크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oncept_of_lov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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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이 글에서는,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2009년 3월 12일자로 올려드렸던 가톨릭 계약 신학적 그리스도인의 사랑(Christian love, 아가페)의 정의(definition)에 대한 글에 이어지는,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 God's love), 혹은 그리스도의 사랑(the love of Christ)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에 대한 글입니다. 
 
하느님의 성성(sanctity, 거룩하심) 그리고 하느님의 인류 구원 의지의 드러내심과 직결된 신학적 내용을 대하여 다루고 있기에 약간 지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신앙 생활 전반에 걸쳐 요즈음의 대다수의 우리들이 잊고 지내는, 그러나 믿음(faith, 신덕)희망(hope, 망덕)이라는 두 개의 초자연적 덕들과 함께, 대단히 중요한 또 한 개의 초자연적 덕인 애덕(charity)의 이유인 선(good)의 개념을 회복하여(restore), 그리하여 신앙 생활 전반에 걸쳐, 특히 윤리적으로, 선(good)의 개념이 제대로 인식될 수 있게 하고자,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원 은총의 상태로의 회복이 각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잘 이루어지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마련한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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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이 글에서 말하는 "사랑/사랑하다(love)"는,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정의하는 문장 내에서 사용 중인 "사랑/사랑하다(love)"라는 표현의 의미를 말합니다. 즉, 다음의 요한 복음서 13,34에서의 "사랑하다"라는 표현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에 대한 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여기서 우리말로 "사랑하다"로 번역된 표현은 NAB에서 "love"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들 세 개의 "사랑하다"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는,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소위 말하는 "아가페(agap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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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 
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요한 복음서 본문 중에서, 그리스어 단어인 "agape(아가페)"가 사용된 절들과 "philia(형제애, 동포애)"가 사용된 절들을 모두 모은 것입니다. 아래의 목록에서, 괄호 안의 번호는 "새 번역 성경" 본문의 해당 절에 한 번 이상 사용되었을 때에, 그 순서를 나타냅니다.
 
 
"아가페"
요한 복음서 
3,16; 3,19; 3,358,42; 10,17; 11,5; 12,43; 13,1(1); 13,1(2); 13,23; 13,34(1); 13,34(2); 13,34(3); 13,35; 14,15; 14,21(1); 14,21(2); 14,21(3); 14,21(4); 14,23(1); 14,23(2); 14,24; 14,28; 14,31; 15,9(1); 15,9(2); 15,9(3); 15,10(1); 15,10(2); 15,12(1); 15,12(2); 15,13; 15,17; 17,23(1); 17,23(2); 17,24; 17,26(1); 17,26(2); 19,26; 21,7; 21,15(1); 21,16(1); 21,20
 
"philia"
요한 복음서 5,20; 11,3; 11,36; 12,25; 15,19; 16,27(1); 16,27(2); 20,2; 21,15(3); 21,16(2); 21,17(1); 21,17(2); 21,17(3).
 
이상, 위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직접 "사랑/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사랑/사랑하다", 요한 복음서 5,20; 21,17제외하고는 거의 예외 없이, 모두 그 어원이 "아가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여기를 클릭한 후에, 위의 목록과 비교해 보면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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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은, St. Joseph 판 NAB(New American Bible)의 부록인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사랑(love)"에 대한 설명입니다:
 
LOVE.
 
     In the Old Testament, the love of God expresses itself in his many interventions of creation (Gn 1, 3; Jb 38ff) and the history of Israel (Dt 4, 37; Ps 41, 12). It is a freely-given elective love (Dt 7, 7) working for the salvation of mankind, ever merciful in the face of human infidelity (Hos 11, 1-4).
 
사랑(LOVE).
     구약 성경에 있어, 하느님의 사랑은 그 자체를 창조물(creation)에 대한 당신의 수많은 개입 들 안에서 (창세 1,3; 욥 38 및 이어지는 몇 개의 절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표현하십니다.(*) 그것은, 심지어 인간의 불충실의 면전에서도 자비로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는(working) 어떤 자유롭게 주어지는 선택적 사랑(a freely-given elective love)입니다 (신명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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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09항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의 사랑이 영광(즉 하느님의 영광) 안에서 주어지고 있음을 여기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영광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4.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4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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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New Testament explores these first glimnerings more fully. The love of God is historical because God has not spared his own Son and has delivered him to death in order to save us (Jn 3, 16). It is also freely-given and elective by the work of Christ, which was in perfect correspondence with the will of the Father and which made the faithful the beloved ones of God (Jn 5, 20-25; Col 3, 12). Finally this love in action is merciful, as shown above all by the cross and explained in the parables (Jn 15, 13; Lk 15, 11-32).
 
     신약 성경은 이들 첫 깜빡이는 빛들을 더 충만하게 탐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역사적인데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하기(save) 위하여 당신의 아드님을 아끼지 않으셨으며 그리하여 그분을 죽음에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3,16). 이 사랑은 또한 그리스도의 위업에 의하여 자유롭게 주어지며 그리고 선택적인데(freely-given and elective), 이 사랑 성부의 뜻/의지(the will of the Father) 완미(完美)한 대응(perfect correspondence with)에 있었으며 그리고 이 사랑은 열심 신자들을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들로 만들었습니다 (요한 5,20-25; 콜로새 3,12). 끝으로 활동 중인 바로 이 사랑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의하여 보여졌듯이 그리고 비유(parables)들로 설명되었듯이, 자비롭습니다 (요한 15,13; 루카 15,11-32).
 
     The love of man for God is thus a love which is returned. It must be sealed by a total obedience to the Commandments, a fidelity to the covenent. In the New Testament it must respond without limit to the prior love of God and Christ (1 Jn 3, 1-16; 4, 10-19). For the love of one's neighbor, see NEIGHBOR.
 
     따라서 하느님을 위한(for) 사람의 사랑은 되돌려드리게 되는 어떤 사랑입니다. 이 사랑[새] 계약(the covenant)에 대한 충실인, [그리스도의] 계명들에 대한 어떤 전적인 복종(a total obedience)에 의하여 보증되여져야만 합니다. 신약 성경에 있어 이 사랑은 앞서의 하느님의 및 그리스도의 사랑에 아무런 제한 없이 응답하여야만 합니다(1요한 3,1-16; 4,10-19). 자신의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웃(NEIGHBOR)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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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3: 그런데 위의 설명은,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 하느님의 사랑의 궁긍적 목표 및 결과들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부터,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질문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사랑하다"에서의 "사랑/사랑하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문제점: 이에 대한 답변으로, "아무런 조건없이 제공하는, 필요하면 희생도 감수하는 사랑" 등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답변은 답변 자체 내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으면서 질문의 대상인 "사랑"이라는 단어를 또다시 사용하고 있기에, 사실은 답변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지요?
 
참고 4: 논리학에서 이런 종류의 순환을 두고서 악순환(vicious cycle, 혹은 vicious cicle)이라고 부르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다음은, 세속의 표준 국어 대사전에 실린 "아가페" 단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가페
 
「명사」『기독교』
종교적인 무조건적 사랑.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나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실현되는, 인간의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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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표준 국어 대사전에 실린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
 
「명사」
「1」상대에게 성적으로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
¶ 사랑에 눈멀다/사랑에 빠지다/사랑을 고백하다/사랑이 깨지다/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두 남녀가 공원 벤치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2」부모가 자식을, 스승이 제자를, 신이 인간을 아끼는 것처럼 상위 존재가 하위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 어머니의 사랑/사랑의 매/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다/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신의 은총과 사랑이 충만하길 빕니다.
「3」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냅시다./그 수녀님은 온 인류에게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일깨워 주셨다.
「4」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 자연에 대한 사랑/그는 음악에 각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5」열렬히 좋아하는 상대.
¶ 그녀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그를 내 사랑으로 만들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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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2: 여러분들 생각에, 위의 표준 국어 대사전에 실린 "사랑"이라는 단어의 설명에 근거하여, 신약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사랑/사랑하다" 의 의미, 즉 "아가페(agape)"로 통상적으로 불리는 "사랑/사랑하다"의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힙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공생활 기간 중에 바로 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의한, "그리스도의 사랑(the love of Christ)"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요한 복음서 21,17에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잘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4.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Christian love"에 대한 설명입니다:
 
CHRISTIAN LOVE

The law of selfless love, which Christ said was a new commandment, by which those who are truly Christian would be recognized. He told his followers,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John 13:34). This law is new because commanded by God himself in human form; because it is to be a mutual love, given and received, as the foundation of a new reality, i.e., the Christian community, and because its norm or measure is essentially higher than self-love (Leviticus 19:18), since it is to be patterned after the manner that Christ, who is God, loved the human race even to dying for his enemies. In practice, this means that we are to love by wishing only well to one another, by praying for one another, and by never thinking, saying, or doing anything to injure one another.
 
그리스도인의 사랑(CHRISTIAN LOVE)
 
이기심이 없는 사랑(selfless love)의 법을 말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새 계명으로 말씀하셨으며, 이 새 계명에 의하여 진실로 그리스도인(Christian)인 자들이 인정될(be recognized)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3,34)라고 당신의 제자(followers)들께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은 새로운데, 왜냐하면 인간의 모습으로 계시는(in human form) 하느님 당신 자신에 의하여 명해졌기 때문이며, 그리고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한 개의 새로운 실체(a new reality)의 기초로서, 주어지고 그리고 받게 되는(given and received), 어떤 상호 사랑(a mutual love)이어야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왜냐하면 그 기준 혹은 척도가 자기애(self-love)보다 본질적으로 더 높기 때문인데 (레위기 19,18), 이는 이것이,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심지어 자신의 원수들을 위하여 죽으심에까지 인류를 사랑하셨던 바로 그 방식(the manner)을 본받아 양식이 형성되어야 하기(to be patterned)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이 사랑의 법은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오로지 행복을 빎으로써, 서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서로를 해치는 어떠한 것도 결코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혹은 행하지도 않음으로써, 사랑하여야(love) 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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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이런 안내의 글까지도 제가 우리말로 번역까지 하면서 마련해 드려야 하는 현실이, 저에게는 참으로 큰 고통이며 그리고 커다란 슬픔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이, 가톨릭 신학적으로 확실히 신뢰할 수 있는 영문 문헌/자료들에 근거하여 그리고 그 출처들을 다 밝히면서 제가 마련해드려 왔던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들에 대한 단순 전달성 글/정보들"에 대하여, "그 정보의 신뢰성은 누가 보증할 수 있는지요?" 하면서, 납득할 수 없는, 강한 의심을 하더군요.
 
예를 들어, 다음은 이 글의 본문에서 발췌 인용하고 있는, Modern Catholic Dictionary 및 그 저자에 대한 안내입니다: 
 
(A) 위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 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술들, 특히 신학 대전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용어들에 대한 설명들이 주어진, 대단히 우수한 영어 가톨릭 용어 사전 입니다.
 

이에 관하여서는, 여기를 클릭하여, 이 용어 사전의  Guide를, 특히 제일 마지막 부분에 주어진, 다음의 설명을 참고하십시오:

 

(발췌 시작)
Scholastic Philosophy and Theology

Special attention was paid to certain basic terms from scholastic philosophy and theology. These terms are the backbone, as it were, of the Church’s official teaching of faith and morals.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the Catholic church in her own deepest understanding of herself without some familiarity with this language of scholastic thought.

 

스콜라 철학 및 신학

 

특별한 배려가 스콜라 철학 및 신학에서 유래하는 다소의(certain) 기본적 용어들에 기울여졌습니다. 이들 용어들은, 말하자면, 신앙(faith)과 윤리(morals)들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의 중추(中樞, backbone)입니다. 스콜라 철학적 사고(scholastic thought)에 기인하는 이러한 언어와의 상당한(some) 친숙 없이 교회 자신에 대한 교회 고유의 가장 깊은 이해 안에서 가톨릭 교회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상, 발췌 끝).

(B) Modern Catholic Dictionary는 예수회 소속 신부이며, 신학자, 저술가, 하느님의 종인, John A. S. A. Hardon, S.J., Ph.D. (1914-2000년)에 의하여 마련된 현대 가톨릭 용어 사전입니다. 다음은, 이 신부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의 글입니다:
 
 
Father Hardon was a very prominent member of the Jesuit community, which is known for its academic rigor, and wrote dozens of books on religion and theology, including: The Catholic Catechism (1975), a defining volume of Catholic orthodoxy; and the Modern Catholic Dictionary(1980), the first major Catholic reference dictionary published after the Second Vatican Council (1962–1965). Hardon was also a major contributor to Catholic newspapers and magazines and was executive editor of The Catholic Faith magazine. Hardon had a close working relationship with Pope Paul VI, engaging in several initiatives at the Pope's request, including his authoring of The Catholic Catechism.
 
Hardon 신부는, 그 학문적 엄격함으로 알려진, 예수회 공동체의 매우 저명한 구성원이었으며, 그리고, 다음의 책들을 포함하여, 종교와 신학에 대한 수십 권의 책들을 저술하였다: 가톨릭 정통성을 정의하는 책인 가톨릭 교리서(The Catholic Catechism, 1975),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에 출판된 첫 번째 주된 가톨릭 참고 사전인 현대 가톨릭 사전(Modern Catholic Dictionary, 1980). Hardon 신부는 또한 가톨릭 신문들 및 잡지들에 주된 기고자였으며 그리고 The Catholic Faith 잡지(주: 클릭하여 또한 이 잡지에 대한 안내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의 주필(executive editor)이었다. Hardon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와 가까운 실무적 관계를 가졌는데, 그리하여 그는, 그의 가톨릭 교리서(The Catholic Catechism)의 저술 작업을 포함하여, 이 교황의 요청에 따른 여러가지 계획들에 관여하였다.  
 
Father Hardon's Catholic Catechism was a significant post–Vatican II work in the sense that it essentially brought modern Catholic teaching and faith into one book, unlike any other before, and was a precursor to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which is the official codified teaching of the Catholic Church, promulgated by Pope John Paul II in 1992. Hardon served as a consultant for the drafting of that document.
 
Hardon 신부의 가톨릭 교리서는, 이 책이, 이전의 다른 책들과은 달리, 본질적으로 현대 가톨릭 가르침과 믿음을 한 권의 책으로 탄생시켰다는 점에 있어, 하나의 괄목할만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저술이며, 그리고 이 책은, 1992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공표된, 가톨릭 교회의 공식의 성문화된 가르침(official codified teaching)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에 대한 한 선행물(a precursor)이었다. Hardon 신부는 바로 이 문헌(즉,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기초를 위한 한 명의 자문 위원으로서 봉사하였다.
 
(C) 또한 여기를 클릭하여, Hardon Archives 제공의 Hadon 신부님에 대한 간략한 안내의 글도 또한 참고하십시오.
 
(D)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가톨릭 대사전 [제공처: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용어 설명에서 Modern Catholic Dictionary[참고 문헌]으로 인용하고 있는 약740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상, Modern Catholic Dictionary 및 그 저자에 대한 안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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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위의 제3항의 설명에 의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리고 실천하셨던 "사랑/사랑하다"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설명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결코 일방적인 어떤 사랑이 아니라, 주어지고 그리고 받게 되는, 어떤 상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질문 3:제3항 및 제4항의 설명들이 충분한 답변이 된다는 생각이신지요?
 
여전히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사랑하다"의 본질을 아직은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4: 지금 말씀드린 이 부분에 대하여, 가톨릭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답변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기 전에,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실린, 다음과 같은, "사랑하다(to love)"에 대한 설명을 함께 학습하도록 합시다:
 
5.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love(사랑하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발췌 시작) 
LOVE

To will good to someone. Also to please someone, either by sharing with that person what one possesses or by doing what someone wants. Basically there are two kinds of love. The love of concupiscence, or self-interested love, means that another is loved for one's own sake as something useful or pleasant to the one who loves. The love of friendship means selfless love of another for that person's own sake, for his or her good, to please him or her; it is the love of benevolence.
 
사랑하다(LOVE, amor)
 
어떤 이(someone, 즉,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이)(*1)에게 선을 의도하고자 함(to will good to someone)을 말합니다. 또한 어떤 이를, 자신이 가진 바를 바로 그 자와 함께 나눔으로써 혹은 어떤 이가 원하는 바를 행함으로써 둘 중의 하나에 의하여, 즐겁게 함(please)을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i) [감각을 수행하는 욕구(the sensitive appetite, 즉 감각 욕구)에 기인하는 정(情, passions)들 중의 하나인] 사욕편정(偏情, concupiscence)(*2)에 기인하는 사랑(the love of concupiscence) 혹은 이기적인 사랑(self-interested love)은 다른 자가, 사랑하는 자에게 유용한 혹은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으로서, 사랑하는 자 고유의 목적을 위하여, 사랑을 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ii) [이성적 욕구(rational appetite), 즉, 의지(the will) 안에 있는, 따라서 결코 감각 욕구에 기인하는 정(情, passions)들 중의 하나일 수가 없는] 우의(友誼)에 기인하는 사랑(the love of friendship)은 다른 이에 대하여, 바로 그 자 고유의 목적을 위한, 그자 혹은 그녀의 선(good)을 위한, 그자 혹은 그녀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이기심이 없는 사랑(selfless love)[즉, 사욕편정(私慾偏情, concupiscence)에 기인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하며, 그리하여 이 사랑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년)가 정의하는(defines) 우의(友誼, friendship), 즉, "상호호혜적 우의(友誼)"의 시작인] 선의(善意)에 기인하는 사랑(the love of benevolence)입니다.(*3)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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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어떤 이(someone)""자기 자신(himself)" 혹은 "다른 이(another)" 를 말한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이상, 2015년 5월 17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2.12.17]
(*2) 번역자 주: 현재까지 국내의 가톨릭계에서 사용중인, 영어로 "concupiscence"로 번역되는 라틴어 단어 "concupiscentia"의 번역 용어인 "慾偏情"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제2-2-4항제2-2-5항반드시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5.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23-12-25]
(*3)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바로 이 우의적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권고하는, (i) 7개의 물적 자선들, 즉, "형애긍지행 7단" 그리고 (ii) 7개의 영적 자선들, 즉, "신애긍지행 7단"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또한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형신애긍지행14단의_성경_출처들_2974.htm <----- 필청/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형신애긍지행14단의_성경_출처들_및_실천_사정들_3003.htm <----- 필청/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53.htm <----- 필독 권고   

[이상, 2023-12-25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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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위의 제5항의 설명에 의하여, 만약에 우리가 이 설명의 문헌적 출처를, 즉,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신학적 출처를 정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리고 실천하셨던 "사랑/사랑하다"에 대하여 더 나은 이해를 하게 되겠습니다.
 
질문 5: 위의 제4항에 주어진 "사랑(love)"에 대한 설명의 출처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55-1274년)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입니다.
 
6.
다음은,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신학 대전 Ia, q20, a2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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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시작)

Article 2. Whether God loves all things?

 

제2조. 하느님께서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시는지?

 

Objection 1. It seems that God does not love(amet) all things. For according to Dionysius (Div. Nom. iv, 1), love(amor) places the lover(amantem) outside himself, and causes him to pass, as it were, into the object of his love(amatum). But it is not admissible to say that God is placed outside of Himself, and passes into other things. Therefore it is inadmissible to say that God loves(amet) things other than Himself.

 

Objection 2. Further, the love(amor) of God is eternal. But things apart from God are not from eternity; except in God.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anything, except as it exists in Himself. But as existing in Him, it is no other than Himself.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things other than Himself.  

 

Objection 3. Further, love(amor) is twofold--the love, namely, of desire(concupiscentiae), and the love of friendship(amicitiae). Now God does not love(amat) irrational creatures with the love of desire(amore concupiscentiae), since He needs no creature outside Himself. Nor with the love of friendship(amore amicitiae); since there can be no friendship with irrational creatures, as the Philosopher shows (Ethic. viii, 2).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all things.

 

Objection 4. Further, it is written (Psalm 5:7): "Thou hatest all the workers of iniquity." Now nothing is at the same time hated and loved(amatur). Therefore God does not love(amat) all things.

 

On the contrary, It is said (Wisdom 11:25): "Thou lovest(diligis) all things that are, and hatest none of the things which Thou hast made." 

 

이와는 달리,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diligis)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지혜 11,24(25)) 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I answer that, God loves(amat) all existing things. For all existing things, in so far as they exist, are good, since the existence of a thing is itself a good; and likewise, whatever perfection it possesses. Now it has been shown above (Question 19, Article 4) that God's will(하느님의 뜻/의지] is the cause of all things. It must needs be, therefore, that a thing has existence, or any kind of good, only inasmuch as it is willed by God. To every existing thing, then, God wills some good. Hence, since to love(amare) anything is nothing else than to will good to that thing, it is manifest that God loves(amat) everything that exists. Yet not as we love. Because since our will is not the cause of the goodness of things, but is moved by it as by its object, our love(amor), whereby we will good to anything, is not the cause of its goodness; but conversely its goodness, whether real or imaginary, calls forth our love(amorem), by which we will that it should preserve the good it has, and receive besides the good it has not, and to this end we direct our actions: whereas the love(amor) of God infuses and creates goodness.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사물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loves, amart). 이는 존재하는 사물들 모두는, 그들이 존재하는 한, 선(good)하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한 사물의 존재 그 자체가 한 개의 선(a good)이기 때문이며, 그리고 한 사물이 어떠한 완미(完美)(perfection)를 소유하고 있든지 간에 또한 마찬가지(likewise)[번역자 주: 즉, 한 개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질문 19, 제4항) 하느님의 의지/뜻(God's will)가 모든 사물들의 원인임을 이미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물은, 오로지 그것이 하느님에 의하여 의도되는 한, 존재(existence)를, 혹은 선(good)의 어떤 종류를,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then) 존재하는 각 사물에 하느님께서는 어떠한(some) 선을 의도하십니다(will). 따라서, 어떤 사물을 사랑하는 것(to love, amare)은 바로 그 사물에 선을 의도하는 것(to will good)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사랑하시는(loves, amat) 것은 명백합니다.(*1)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듯이(*2)아닙니다. 왜냐하면(because), 우리의 의지[번역자 주: 즉, 우리의 이성적 욕구(rational appetite)]는 사물들의 선함(goodness)의 원인(cause)[번역자 주: 즉, 하느님의 의지]이 아니고, 이 원인의 대상을 경유하여서 처럼(as by its object) 이 원인에 의하여 움직여지므로(since),(*3) 바로 그것[번역자 주: 즉, 바로 이 움직임]에 의하여 우리가 임의의 사물에 선을 의도하는 우리의 사랑(love, amor)은 이 사물의 선함의 원인이 아니며, 거꾸로(conversely), 실제이든 혹은 상상이든지간에, 이 사물의 선함이 우리의 사랑(love, amorem)을 [번역자 삽입: 심장(heart) 안쪽에] 야기시키는데(calls forth),(*2) 바로 이 사랑에 의하여 [번역자 삽입: 이 야기됨 직후부터] 우리가 [번역자 삽입: 부수적으로(accidentally)] 의도하는(wills) 바는, 이 사물이 마땅히(should) (i) [번역자 삽입: 장차 우리의 concupiscence에 관련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한 것(the good)들을 유지하고(preserve), 그리고 (ii) 그 위에(besides) [번역자 삽입: 장차 우리의 amicitia에 관련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선한 것(the good)들을 받아들이며(receive), 그리고 바로 이러한 끝/목적지(end) 쪽으로 우리가 우리의 행동(actions)들을 향하게 하는(direct)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번역자 삽입 concupiscence가 전혀 없는] 하느님의 사랑(love, amor)은 선함(goodness)을 주입하며(infuses) 그리하여 선함을 창조합니다(cre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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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아담과 하와에 의하여 범해진 "원죄(original)"의 결과로 그 이후부터 우리에게는 이들로부터 물려받는 "concupiscence"가 있게 되므로, 따라서,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무런 형이하학적 감각 기관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기 때문에, 바로 이 "concupiscence"가 하느님께 전혀 없음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라.

 

(*2) 번역자 주: 바로 이 문맥 안에서 말해지고 있는 우리가 하는 사랑을,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원초적 사랑(primal love)"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3) 번역자 주: 바로 이 문장이, 이 "원초적 사랑"의 원인이 "concupiscence"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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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ly to Objection 1. A lover is placed outside himself, and made to pass into the object of his love, inasmuch as he wills good to the beloved; and works for that good by his providence even as he works for his own. Hence Dionysius says (Div. Nom. iv, 1): "On behalf of the truth we must make bold to say even this, that He Himself, the cause of all things, by His abounding love and goodness, is placed outside Himself by His providence for all existing things."

 

Reply to Objection 2. Although creatures have not existed from eternity, except in God, yet because they have been in Him from eternity, God has known them eternally in their proper natures; and for that reason has loved them, even as we, by the images of things within us, know things existing in themselves.

 

Reply to Objection 3. Friendship cannot exist except towards rational creatures, who are capable of returning love, and communicating one with another in the various works of life, and who may fare well or ill, according to the changes of fortune and happiness; even as to them is benevolence properly speaking exercised. But irrational creatures cannot attain to loving God, nor to any share in the intellectual and beatific life that He lives. Strictly speaking, therefore, God does not love irrational creatures with the love of friendship; but as it were with the love of desire, in so far as He orders them to rational creatures, and even to Himself. Yet this is not because He stands in need of them; but only on account of His goodness, and of the services they render to us. For we can desire a thing for others as well as for ourselves.

 

Reply to Objection 4. Nothing prevents one and the same thing being loved under one aspect, while it is hated under another. God loves sinners in so far as they are existing natures; for they have existence and have it from Him. In so far as they are sinners, they have not existence at all, but fall short of it; and this in them is not from God. Hence under this aspect, they are hated by Him.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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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위에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에 대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의 약 600여 개에 달하는 각 문항(Questions)들에 대한 "압축된 바꾸어 말하기"Paul J. Glenn 몬시뇰(1893-1957)의 저서: "A Tour of the Summa (신학 대전 여행)", Ia q20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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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God loves all existing things, that is, things that have positive being. For these things exist by God's will, that is, by his love. To love a thing is to will the thing and to will good to it. God wills the existence, essence, and perfections of existing things; hence he loves these things. God's love is not like human love which is attracted to things by the good it finds in them; God's love causes the good in things.

 

2.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사물들, 즉, 실재하는 있음(positive being)을 가진 사물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이러한 사물들이 하느님의 의지/뜻(God's will)에 의하여, 즉(that is), 당신의 사랑(his love)에 의하여,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을 사랑하는 것(to love)은 그 사물을 의도하는 것(to will)이며 그리고 그것에 선(good)을 의도하는 것(to will)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본질인 존재를, 그리고 존재하는 사물들의 완미(完美)(perfections)들을 의도하시며(wills), 그리하여 그 결과 당신께서는 이러한 사물들을 사랑하십니다(loves). 하느님의 사랑(God's love)은, 사물들 안에서 발견하는 선(the good)에 의하여 사물들로 끌려가게 되는, 인간의 사랑(human love)비슷하지(like) 않은데, 이는 하느님의 사랑은 사물들 안에 있는 선한 것(the good)들의 원인(cause)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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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른 한 편으로, 향주 삼덕들 중의 하나인 애덕(charity, caritas, Christian love, agape, 아가페,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참 뜻은 결국에,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3,34)
 
에 있어서의 "사랑/사랑하다" 의 의미로 귀착되는데, 지금까지의 학습을 통하여, 이제 "이 하느님의 사랑"의 신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질문 5. 그러면,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은 언제 우리에게 주입될까요(infused)?
 
바로 세례 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확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5)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다수의 우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으며, 이 글은 이 무지(ignorance)를 멀리 쫒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학습한 바를 하느님의 인류 구원 의지의 드러내심 안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1.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들을 선하게 하고자 의도하시는 "하느님의 의지/뜻"(God's will)를 말한다.
 
7-2. 피조물들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original sin) 이후로, 이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애초의 선의 완미(完美)(perfection) 상태를 상실당하였다. 즉 악(evil = 선의 결핍)이 세상에 들어왔다.
 
7-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사랑하시기에(loves),  피조물들이 상실당한 선을 회복하는 것을 당신께서 의도하시기에(wills), 창세기 3,15에서의 말씀을 시작으로 하여 구약 성경에 기록된대로, 당신의 인류 구원 의지를, 인격 사이의 계약(covenant)의 형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약속하셨다.
 
7-4.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을 그들 본래의 순수함(the purity of its origins)으로 회복시키고자, 당신의 인류 구원 의지를 세상 안에서 구현하시고자, 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듯이, 당신의 외 아드님(성자, the Son of God)를 세상에 보내셨으며[여기를 클릭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2336항의 첫 문장을 참조하라], 성자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복음서 13,34)
 
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7-4-1. 따라서 강생하신 성자이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로 이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 즉, 하느님 의지의 첫 번째 움직임을 말하므로, 옛 계약의 율법들 모두를 완성시키는 유일한 사랑이다.
 
7-4-2. 따라서 바로 "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상대방을 선하게 하여 그리하여 상대방이 선(good)의 완미(完美)(perfection)에 이루도록 도와주는, 서로 주고 받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실천함을 말한다.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766항(<--- 클릭하십시오)"사랑하다(to love)"를 다음과 같이 정의(define)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이(someone, 즉,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이)의 선을 의도하는(will) 것이다"(*)

"To love is to will the good of someone (himself or an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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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I-II, q. 26 a. 4, c: Ed. Leon. 6,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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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1. 특히 이 사랑은, 죄인들을 포함하여, 누구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음에 크게 주목하라.
 
 그러므로 특히,
 
(결론 1)
 
설사 그리스도교 신자로 세례를 받은 자들 [그리하여 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과 초자연덕들인 향주 삼덕(theological virtues)들이 하느님에 의하여 주입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선하게 하고 그리하여 상대방을 선(good)의 완미(完美)(perfection)에 도달하도록 돕지 않는 어떠한 것들도,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서 명하신 바로 "그 사랑", "하느님의 사랑"이 결코 아니다.
 
7-4-3. (이 하느님의 사랑은 "하늘 나라"로의 참여를 위한 필수적 사랑이다) 
 
(결론 2)

따라서
이 사랑은, 첫 성령 강림일 이후로 지금까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속하고 있는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 즉 하느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하는 바로 그 유일한 사랑이다. 이는 "하늘 나라"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계명으로 명하신 바로 "이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원 선함(original goodness)"을 회복하여 유지하고 있는 자들, 즉 "원 은총(original grace)"의 지위에 있는 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아래에 인용한 산중 성훈의 마지막 부분을 참조하라).(*)

[내용 추가 일자: 202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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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1583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신부님들에 의하여, 영어로 "the sermon on the mount"로 번역되는 라틴어 표현에 대응하는 번역 용어로서 1635년 경에 처음으로 도입된, "산중 성훈"/"산중 수훈" 대신에, 1807년과 그 이후에 중국 본토에 처음으로 진출한 개신교회 선교사들 중의 한 명인 James Legge(1815-1897년)에 의하여 1844년에 처음으로 도입된, 그리고 일본을 경유하여 우리나라 조선 반도에 1933년에 처음으로 수입된, "산상 설교"라는 번역 표현이 왜 매우 부적합한 번역 용어인지에 대한 졸고를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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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24-01-01일자 내용 추가 끝]

 
다음은 예수님의 산중 성훈(마태오 복음서 제5장-제7장)의 마지막 말씀이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일부 글자들을 굵게 하고 색깔을 입힌 것은 제가 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라(루카 13,25-27)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내 말을 실행하여라(루카 6,47-49)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청중의 반응(마르 1,22; 루카 4,32)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7-4-4.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하여,어떠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산중 성훈/산중 수훈(마태오 복음서 제5장-제7장)로 가르쳐 주셨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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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강생하신 성자이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i) 그리스도교 윤리의 대 헌장인 진복팔단(8개의 참행복들, 마태오 복음서 5,3-10, 가해 연중 제4주일 복음 말씀에 포함됨)을 선포하신 후에, 바로 이어서
 
(ii) 이 참행복들에 대한 가르침을 가정 생활과 관련된 몇 개의 은유(metaphors)들로 주시며(가해 연중 제5주일 복음 말씀인 마태오 복음서 5,13-16), 그런 다음에
 
(iii) 당신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오셨음을 밝히신 후에, 실생활과 직결된 구약 성경에 있는 여섯 개의 예제(examples)들 중에서 네 개를 마태오 복음서 5,17-37(가해 연중 제6주일 복음 말씀)에서 다루시며[5,21(살인해서는 안된다); 5,27(간음해서는 안된다); 5,31(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5,33(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 그리고
 
(iv) 나머지 두 개를 마태오 복음서 5,38-48(가해 연중 제7주일 복음 말씀)에서 다루신다[5,38(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5,43(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한 선한 행실(good deeds)들에 대한 여섯 개의 예제들을, 해당하는 옛 행실들의 완성으로서,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 지속적으로 이 나라 안에 머물기 위하여서는, "산중성훈"에서 제시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함을 알 수 있다.
 
7-4-5. 따라서 이 윤리적 삶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드러내실 때에, 요구하셨던 십계명의 완성으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늘 나라에 들어가, 그리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지속적으로 이 영광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하여,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요청되는 필수적인 삶이다.
 
이와 같이, "영광(glory)", 즉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의 윤리적 삶과 직결되어 시작되는 부분이 다음의 탈출기 33,18-23에서부터임에 특히 유의하라:
 
(발췌 시작)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18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19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20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21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22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 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23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상, 발췌 끝).
 
7-4-6. (하느님의 영광에의 참여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함에의 참여를 지향한다) 

여기를 클릭하여, Modern Catholic Dictionary 에 주어진 설명을 읽으면, 이제 이 "영광"이라는 용어에 대한 더 자세한 용어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습니다:
 
GLORY
The recognition and praise of someone's excellence. Applied to God, the divine (internal) glory is the infinite goodness that the persons of the Trinity constantly behold and mutually praise. His external glory is first of all the share that creatures have in God's goodness. Sometimes called objective glory, it is given to God by all creatures without exception, by their mere existence, insofar as they mirror the divine perfections. Formal glory is rendered to God by his rational creatures, when they acknowledge the divine goodness and praise God for who he is and what he has communicated of himself to the world. (Etym. Latin gloria, renown, splendor, glorification.)
 
영광(GLORY)
 
어떤 이의 탁월(excellence)에 대한 인정(recognition)과 찬미(praise)를 말합니다. 하느님께 적용되는, 하느님의 (내적) 영광[the divine (internal) glory]은 성 삼위의 위격들께서 변함없이 주시하면서 상호 찬미하는 무한한 선함(infinite goodness)을 말합니다. 당신의 외적 영광(His external glory)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선함 안에서 피조믈들이 가지는 바로 그 모든 함깨 나눔(all the share)을 말합니다. 때로는 객관적 영광(objective glory)으로 불리는, 이 영광은 예외 없이 모든 피조물들에 의하여, 그들의 단순한 존재에 의하여, 그들이 하느님의 완미(完美)들을 반사하는(mirror) 한, 하느님께 바쳐집니다. 형상적 영광/정식 영광(formal glory)은, 당신의 이성적 피조물(rational creatures)들에 의하여, 그들이 하느님의 선함을 인정하고 그리고 당신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하여 및 당신께서 당신 자신으로부터 이 세상에 이미 나누어 주신(has communicated)(*) 바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미할 때에, 하느님께 되돌려집니다(is rendered to). [어원. Latin gloria, renown, splendor, glor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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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communicate"의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적 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9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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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위의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영광(glory)"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809에 주어진 영광의 정의는 하느님의 외적 영광(God's external glory)에 대한 정의임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탈출기 33,18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에 주어진 영광에 대한, "하느님의 내적 실체(sa réalité intime)" 라는 설명은, 하느님의 내적 영광(God's internal glory)에 대한 설명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구약 성경의 본문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이 성 삼위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지 않으셨으므로,
 
(결론 3)
 
(i) "하느님의 내적 영광(God's internal glory)"이 "하느님의 무한한 선함(God's infinite goodness)"으로 정의되고(is defined), 그리고
 
(ii) "이 내적 영광의 드러내어지는 바"가 "영광(glory)", 즉 "하느님의 영광(the glory of God)"으로 정의됨(is defined)을
 
우리는 또 한 개의 결론으로 추론하여 도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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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론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발췌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94항의 첫 문장인
 
"하느님의 영광" 당신의 선함(goodness)의 바로 이러한 드러냄 및 나누어줌 실현을 그 주된 부분으로 가지고 있다(consists in).
 
을 또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췌 시작)
 
CCC 293 Scripture and Tradition never cease to teach and celebrate this fundamental truth: "The world was made for the glory of God."134 St. Bonaventure explains that God created all things "not to increase his glory, but to show it forth and to communicate it",135 for God has no other reason for creating than his love and goodness: "Creatures came into existence when the key of love opened his hand."136 The First Vatican Council explains:
 
This one, true God, of his own goodness and "almighty power", not for increasing his own beatitude, nor for attaining his perfection, but in order to manifest this perfection through the benefits which he bestows on creatures, with absolute freedom of counsel "and from the beginning of time, made out of nothing both orders of creatures, the spiritual and the corporeal. . ."137
 
(졸번역)
CCC 293 성경과 성전은 다음과 같은 기초 진리을 가르치고 경축하는 것을 결코 멈춘적이 없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성 보나벤뚜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증대시키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이 영광을 밖으로 나타내어 그리하여 이것을 나누어 주시고자(communicate)" 만물들을 창조하셨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선함(goodness) 이외에 창조 행위을 위한 다른 이유를 전혀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물들은 사랑의 열쇠(the key of love)가 당신의 손을 열었을 때에 비로소 존재로 나타났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신 고유의 선함(goodness)과 "전능하신 힘"을 지니신 바로 이 한 분이신, 참 하느님께서는, 당신 고유의 지복(beatitude)을 증대시키기 위하여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전함(perfection)을 얻기 위하여서도 아니고, 당신께서 창조물들에게 베푸신 혜택들을 통하여 바로 이 완미함(perfection)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계획의 절대적 자유로우심과 함께 "한처음에, 무로부터 영적인 및 형이하학적 창조물들 둘 다의 질서를 ..." 만드셨다.
 
CCC 294 The glory of God consists in the realization of this manifestation and communication of his goodness, for which the world was created. God made us "to be his sons through Jesus Christ, according to the purpose of his will, to the praise of his glorious grace",138 for "the glory of God is man fully alive; moreover man's life is the vision of God: if God's revelation through creation has already obtained life for all the beings that dwell on earth, how much more will the Word's manifestation of the Father obtain life for those who see God."139 The ultimate purpose of creation is that God "who is the creator of all things may at last become "all in all", thus simultaneously assuring his own glory and our beatitude."140
 
(졸번역)
CCC 294 하느님의 영광 당신의 선함(goodness)의 바로 이러한 드러냄 및 나누어 줌(communication)의 실현을 그 주된 부분으로 가지고 있는데(consists in), 이 실현을 위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의 은총에 대한 찬미를 하고자 하는, 당신 뜻/의도(his will)의 목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아들들이 되도록" 우리를 만드셨는데(에페 1,5`-`6), 이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영광은 충만하게 살아있는 사람(man)에 있고, 그리고 게다가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을 뵈옴(the vision of God)에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를 통한 하느님의 드러내심(revelation)이 땅에 사는 모든 존재들을 위하여 생명을 이미 얻게 하였다면, 거룩한 말씀에 의한 성부의 나타나심(manifestation)은 당신을 뵙는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장차 얻게 할 것일까요." 창조의 궁극적인 목표는 "만물들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최종적으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1코린 15,28)이 되시어, 그 결과 당신 고유의 영광과 우리의 지복(참행복)을 동시에 확증하시고자 함에 있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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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여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결론 4)
 
우리의 구원(salvation), 즉, 원 선함(original goodness) 쪽으로의 회복은, 하느님의 내적 영광[즉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함(infinite goodness)]의 외적 드러냄인, 영광(glory, 즉, 하느님의 영광)에의 참여이라는 회복을 말하며, 이 회복은 향주 삼덕들 중의 애덕(Christian love, agape)으로 불리는 덕(virtue, 즉, 행동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습관)에 의한, "하느님의 사랑의 실천"에 의하여 가능하다.
 
[여기를 클릭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2262항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이 글에서 학습한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을 깊이 묵상하여 잘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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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5: 여기를 클릭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에서 다마스쿠스 사람(Damascene)으로 불리면서 그의 저술들로부터 총 365번[그의 대표적 저술인 De Fide Orthodoxa(정통 신앙에 대하여)로부터 총306번]이 인용되고 있는, 마지막 그리스 교부(Greek Father)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St. John of Damascus, 676-749년)의 생평에 대한 요약 글(성인전)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바로 아래의 출처에 있는 파란색칠을 한 글자들을 클릭한 후에, "성 요한 다마센" 제목의 글의 제일 마지막 줄은, 이 글에서 학습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상당히 유의미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세상을 위한 하느님 계획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사랑으로 보았는데, 교회가 하느님 사랑의 그 일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한다고 썼다."
 
출처: 2010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작성자: 윤 클레멘트 신부
 
시간이 있을 때에, 이 부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찾아 읽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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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6: 다음은 "주석 성경"의 주석들 중에서 "선(good)" 혹은 "선함(goodness, 선하심)""하느님의 사랑"을 관련지어 설명하는 주석를 직접 찾아본 결과들입니다. 제가 적용한 찾아 보는 방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i) 다음의 굿뉴스 서버 제공의 "(새 번역) 성경" 본문 검색을 통하여, "선", "선함", "선하심" 단어가 포함된 성경 본문들을 모두 검색한다:
 
 
(ii) 소장 중인 "주석 성경"의 해당 본문들에 주어진 각주를 모두 직접 확인한다.
 
이 비교/대조 조사의 결과, 다음의 두 개의 유의미한 주석들만을 찾아 내었습니다:
 
예레미야서 4,22에 대한 "주석 성경" 주석:
'선을 행한다는 것'
은 하느님을 찾는 일(아모 5,4.6.14), 온갖 덕의 근원인 지혜를 찾는 일(지혜 8,7)을 말한다. 지혜 없이 인간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지혜 7,14.28) 그분의 길을 깨달을 수도 없다(9,11; 시편 107,43; 호세 14,10).
 
필레몬서 6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선(善)"칠십인역쿰란에서처럼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좋은 것 곧 복(福)으로 알아듣기도 한다.
 
게시자 주: 신약 성경의 서간문인 필레몬서 6에 대한 "주석 성경"의 이 주석은, 여기를 클릭하면 확인할 수 있는, 프랑스어 공동번역 성경(TOB)의 해당 절에 대한 주석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석이, 구약 성경의 어떤 구절이 아닌, 신약 성경의 서간문의 한 구절에 주어진 이유는, 1970년대에 번역되었던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 필레몬서 6에서, "선(good)" 대신에, "축복(blessing)"으로 번역되었던 것 때문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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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주석들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에 대한 주석들)
 
아모스 5,4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여기서 '찾다'의 결과로 나타나는 '살다'는 하느님에게서 생명과 행복을 받음을 뜻한다(신명 30,15-16 참조). 
 
지혜서 8,7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이 네 덕은 플라톤과 스토아학파 등 그리스 철학자들이 내세운 주요 덕인데, 이러한 열거는 성경에서 여기에서만 이루어진다. 이것들을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사추덕(四樞德)'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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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필레몬서 6에 주어진 "주석 성경"의 주석이 상당히 유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항을 살펴 보면 즉시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라틴어 정본)
1 Deus, in Se Ipso infinite perfectus atque beatus, secundum purae bonitatis propositum, hominem libere creavit, ut illum vitae Suae beatae efficeret participem. Quare Ipse omni tempore et in omni loco homini fit propinquus. Hominem Deus vocat et adiuvat ut Eum quaerat, cognoscat atque totis viribus diligat. Omnes homines, peccato dispersos, in unitatem convocat familiae Suae, quae est Ecclesia. Ad id efficiendum, Suum misit Filium tamquam Redemptorem et Salvatorem, cum tempora sunt impleta. In Ipso et per Ipsum homines Deus vocat ut in Spiritu Sancto filii Eius fiant adoptivi atque ideo heredes Eius vitae beatae.
 
(이탈리아어 본)
1 Dio, infinitamente perfetto e beato in se stesso, per un disegno di pura bontà, ha liberamente creato l’uomo per renderlo partecipe della sua vita beata. Per questo, in ogni tempo e in ogni luogo, egli è vicino all’uomo. Lo chiama e lo aiuta a cercarlo, a conoscerlo e ad amarlo con tutte le forze. Convoca tutti gli uomini, che il peccato ha disperso, nell’unità della sua famiglia, la Chiesa. Per fare ciò, nella pienezza dei tempi ha mandato il Figlio suo come Redentore e Salvatore. In lui e mediante lui, Dio chiama gli uomini a diventare, nello Spirito Santo, suoi figli adottivi e perciò eredi della sua vita beata.

(프랑스어 본)
1 Dieu, infiniment Parfait et Bienheureux en Lui-même, dans un dessein de pure bonté, a librement créé l’homme pour le faire participer à sa vie bienheureuse. C’est pourquoi, de tout temps et en tout lieu, Il se fait proche de l’homme. Il l’appelle, l’aide à Le chercher, à Le connaître et à L’aimer de toutes ses forces. Il convoque tous les hommes que le péché a dispersés dans l’unité de sa famille, l’Église. Pour ce faire, Il a envoyé son Fils comme Rédempteur et Sauveur lorsque les temps furent accomplis. En Lui et par Lui, Il appelle les hommes à devenir, dans l’Esprit Saint, ses enfants d’adoption, et donc les héritiers de sa vie bienheureuse.
 
(영어본)
1 God, infinitely perfect and blessed in himself, in a plan of sheer goodness freely created man to make him share in his own blessed life. For this reason, at every time and in every place, God draws close to man. He calls man to seek him, to know him, to love him with all his strength. He calls together all men, scattered and divided by sin, into the unity of his family, the Church. To accomplish this, when the fullness of time had come, God sent his Son as Redeemer and Saviour. In his Son and through him, he invites men to become, in the Holy Spirit, his adopted children and thus heirs of his blessed life.
 
 
(졸번역문)
1. 그 자체로 무한히 완미(完美)하시고 복되신(perfect and blessed)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선함(sheer goodness)으로 이루어진 어떤 계획 안에서 사람(man)을, 그가 당신 고유의 복된 생명(blessed life)에 함께 하게 하고자, 자유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든지, 하느님께서는 사람 가까이로 다가오십니다. 당신께서는, 자신의 모든 힘(strength)과 함께, 당신을 찾도록(seek), 당신을 알도록(know), 당신을 사랑하도록(love), 사람을 부르십니다(calls). 당신께서는, 죄에 의하여 흩어져 그리하여 분리된 모든 사람(men)들을, 교회라는, 당신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단일체(the unity) 안쪽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이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때가 찼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구속주 및 구세주로서(as Redeemer and Saviour) 당신의 아드님을 파견하셨습니다. 당신의 아드님 안에서 그리고 당신의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께서는 사람들에게, 성령 안에서, 당신의 입양된 자녀(adopted children)들이 될 것을, 그리고 그리하여 당신의 복된 생명(blessed life)의 상속자(heirs)들이 될 것을, 요청하십니다(invites).
 
게시자 주: 위의 라틴어본, 이탈리아어 본, 프랑스어 본, 영어 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항의 번역문들을 함께 살펴 보면서, 바로 위의 졸번역문과 아래의 기존의 우리말 번역문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들이 있는지 비교/검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기존의 번역문)
1 스스로 한없이 완전하고 복되신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호의로 계획을 세우시고, 자유로이 인간을 창조하시어 당신의 복된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며, 있는 힘을 다하여 당신을 찾고, 알며,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죄 때문에 흩어진 모든 사람을 당신 가족인 교회의 일치 안에 불러 모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찼을 때, 이 일을 이루시고자 당신의 아들을 구속자와 구원자로 보내 주셨다.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불러 성령 안에서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당신 복된 삶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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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7;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기존의 번역문에서, 영어로 "goodness"로 번역되고 있는 표현을, "선함"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호의"로 번역한 것은, 이 글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학습하였듯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전반에 걸쳐 하고 있는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역할(role)을, "우리말로 번역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읽는 독자들이 파악하지 못하게 하므로,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goodness"라는 단어가 62개의 항들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따라서, 실제로 사용된 횟수는 이보다 더 많음),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호의"라는 단어가 단지 19개의 항들에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성 본문 중에서 62번씩이나 "goodness"라는 동일한 용어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가,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서 "호의" 이외의 다른 단어들로 번역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이에 대하여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하여, 여기를 클릭한 후에,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에 대하여 "호의", "선함", "선하심" "자애", 등의 단어로 검색을 해 보면, "호의"로 번역된 항들의 숫자가 19개, "선함"으로 번역된 항들의 숫자가 8개, "선하심"으로 번역된 항들의 숫자가 16개, "자애"로 번역된 항들의 숫자가 7개인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62 - (19 + 8 + 16 + 7) = 62 - 50 = 12개 정도가 다른 우리말 표현으로 번역되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결과는, "goodness"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62개의 항들과, 이들 항들에 대하여,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있어서의 해당 항들을 직접 비교/검토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는 생각이며, 이에 대하여서는 별도의 글을 작성하여 보고를 드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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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8: (추가 읽을꺼리 한 개)
  
여기를 클릭하면, <---- (영어 가능한 분들의) 필독을 권고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On The Perfection of the Spritual Life[영적 삶의 완미(完美)에 대하여]" 제목의 저술의 영어 번역본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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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성에 소요된 시간: 약 60시간 (자료 조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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