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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1일[세계병자의날]루르드의 복되신 동정마리아♬Ave Maria-GregorianCh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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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4-02-11 ㅣ No.1611

 

축일:2월11일

세계 병자의 날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B. Maria Virgo de Lourdes

Beata Vergine Maria di Lourdes

Our Lady of Lourdes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프랑스의 루르드에 발현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인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셨다.

 

이날 전 세계 가톨릭 교회는 병자들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위하여 일하는 모든 의료인을 생각하며,

그들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와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여 사랑과 봉사 정신을 키우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교회의 권위와 이름으로 기도한다.

 

 

1858년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프랑스 루르드 근처의 마사비엘 동굴에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발현하셨다.

보잘것없는 어린이를 통하여 성모님은 죄인들을 회개에로 부르셨고,

교회에서는 기도와 사랑의 놀라운 정신 특히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도우려는 정신이 움트기 시작했다.

 

 

성 마리 베르나데트 수비루 동정의 편지에서

(Ep. ad P. Gondrand, a 1861: cf. A.Ravier, Les  ecrits de sainte Bernadette,

Paris 1961, pp. 53-59)

 

여인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두 여자 아이들과 함께 가브 강변에 땔나무를 주으러 갔을 때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목장 쪽을  바라보았더니 나무들이 전혀 흔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동굴 쪽을 바라보니까 파란 띠에 흰옷을 입고 있는 한 부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 부인의 양쪽 발등에는 노란 장미꽃이 꽂혀 있었고 그의 묵주도 같은 노란 색이었습니다.

저는 그 부인을 바라보았을 때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 눈을 부볐습니다.

그리고는 묵주가 든 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십자성호를 긋고 싶었으나 이마에다 손을 올릴 수가 없었고 손은 이내 아래로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부인은 자신이 성호를 그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하려고 했습니다. 제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나 마침내 십자 성호를 그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부인은 손가락 사이로 묵주 알을 굴렸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묵주의 기도를 끝마치자 환시는 사라졌습니다.

 

환시가 사라지자 두 여자 아이들에게 무얼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들에게 말해줄 게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흰옷을 입은 한 부인을 보았는데 누군지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나보고 거기에 되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했으나 저는 거절했습니다.

어떤 내적인 힘에 이끌리는 것을 느끼면서 일요일 날 거기에 다시 갔습니다.

 

 

그 부인은 제가 세 번째 갈 때까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가던 날 나를 보고 보름 동안 자기에게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니까 사제들에게 가서 거기에다 소성당을 짓도록 청하라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부인은 제게 샘에서 물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둘러 보아도 샘이 없기에 저는 가브 강물을 마시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그게 아니라면서 손가락으로 샘을 가리켰습니다.

제가 가서 보니 약간의 더러운 물밖에 없었습니다.

손을 넣었지만 손으로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땅을 후비었더니 마침내 마실 수 있는 물이 조금 나왔습니다.

세 번은 버리고 네 번째 마셨습니다. 바로 그때 환시가 사라지고 저는 거기를 떠나 왔습니다.

 

그 다음 보름 동안 거기에 찾아갔었습니다.

그 부인은 월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제게 나타나

사제들에게 소성당을 짓도록 청해 달라고 다시 부탁했고

저더러 그 샘에서 몸을 씻고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저는 몇번이나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 부인은 제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인은 팔을 펼치고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는 자기는 "원죄 없이 잉태된성모"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보름 동안 부인은 제게 또한 세 가지 비밀을 계시하셨고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그 비밀을 충실히 간직해 왔습니다.

(가톨릭홈에서)

 

 

1830년 11월 27일,성녀 가타리나라브레(축일:11월28일)에게 발현하실 당시

성모님은 지구 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 주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 후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Medaille miraculeuse)’ 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발현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이 고조되었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한지 4년째 된던 해,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축일;4월16일,시성1933.12.8.)에게 발현하셔서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12월8일.게시판791번,1511번.
*성녀 가타리나 라브레 축일:11월28일.게시판775번,1495번.
*성녀 베르나데트 동정 축일:4월16일.게시판1093번,1714번.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7월16일.게시판1275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루르드는 프랑스 남쪽의 국경을 막은 피레네 산맥의 산록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인데,

본래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1858년 2월 11일 이후 수십회에 걸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있은 후부터 일약 세상에 유명해졌다.

그 마을의 교외에 있는 가르와리아라는 산록을 따라 가급 강이 흐르고, 그 중간에는 샬레 섬이 있어서 강물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다시 합류되는 곳에 큰 절벽이 있고 그 가운데 마사비엘이라고 부르는 굴(洞穴)이 있다.

이곳이 성모께서 발현하신 성지이다.

 

이것은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새로 신덕 도리로 반포(1854년 12월)하신 후 3년 2개월째 되는 날이었다.

가난한 물방앗간 집에서 태어난 베르타데나라는 13세의 소녀가

강을 건너 마사비엘 부근에 가서 땔나무를 하기 위해 흘러 내려온 나무를 한참 줍고 있을때

갑자기 큰 바람이라도 불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매우 놀라 뒤를 보니가 마침 굴속에 아름답고 어여쁜 한 부인이 서 계셨다.

 

그녀는 몸에 백설과 같은 흰옷을 입고, 허리에는 하늘색의 띠를 두르고, 손에는 백주 금쇄(白珠金鎖)의 묵주를 들고,

깨끗한 맨발로는 두 장미꽃을 밟고, 눈은 황홀하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계셨다.

베르나데타는 그녀가 누구신가를 아직 모르며

다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마음속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어 같이 기도를 바쳤다.

영광송이 끝나자 그 귀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후 베르나테타는 집에 돌아와서 양친과 본당 신부께 그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2월 14일 베르나데타는 그 귀부인에 대한 정에 못이겨 재차 마사비엘을 방문했다.

그녀는 예상한 대로 또 귀부인의 발현을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호기심으로 베르나데타를 따라간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때 베르나데타의 탈혼 상태에 놀라 그녀와 소리를 합쳐 묵주의 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귀부인의 발현은 2월 11일부터 7월 16일 가르멜 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축일까지 18회나 되었다.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신앙심으로 베르타데타를 따라 동굴에 가는 사람은 점점 증가해 종종 수백 명에 달한 때도 있었다.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성모 영보)축일에 16회 째의 귀부인의 발현을 본 베르나데타가

"오,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까

귀부인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다"하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베르나데타에게 발현하신 분이 성모 마리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성모의 발현의 목적에 대하여 베르나데타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사제에게 말하여라"고도 분부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여라"고도 명령하셨으며, 다시 베르나데타 개인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너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이다"하고 고마운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2월 25일 9회 째의 발현에는 "샘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여라"하는 명령을 받았지만

베르나데타는 샘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짓한 곳을 손으로 파보니까 과연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후에 많은 병자들을 기적으로 낫게하고, 매일 12만 2천 4백 리터의 물을 내게 하는 루르드의 영천(靈泉)의 시작인 것이다.

 

이 영천의 난치병에 대한 효능은 실로 놀랄 만한 것으로서 지금까지 영수(靈水)를 마시고 혹은 몸을 씻음으로써

아주 희망이 없었던 병자가 완쾌된 예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지만, 1861년까지의 3년 동안에도 이미 백 건가량의 완치의 실례가 있었고,

의사들의 엄밀한 조사에 의해서도 "그 중의 15건은 적어도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기적이다"하고 결정되었던 것이다.

 

7월 16일 최후의 발현이 있은 후 그교구의 주교, 신학자, 과학자 등으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를 조직하고

발현의 사건에 대하여 충분한 신학적,과학적인 조사를 하도록 명했는데, 그 결론은 각 위원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일치했다.

 

이와 같은 기적이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루르드를 순례하는 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되었다.

프랑스 국내는 물론 먼 외국에서도 개인적으로 혹은 단체로 이성지를 방문하고 그 동굴 옆에 무릎을 꿇고 성모의 전구를 간구하여

영육간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또한 그 영수(靈水)의 효능으로 잔치병을 회복한 자도 그 수를 모를 정도로 다수에 달했다.

 

 

리용시의 한 조각가 파비슈는 베르나데타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자세히 듣고 나서 가라라의 대리석으로 그 고결한 모습을 조각하여

그것을 마사비엘의 동굴 안, 바로 발현하신 자리에 안치하고 1864년 4월 4일 그 축성식을 거행했다.오늘까지 세상에 유명한 루르드의 성모상은 바로 이것이다.

 

루르드의 성모의 전구로 은헤를 받은 신자들 중에는 감사의 헌금을 한 사람도 적지않다.

그러한 헌금으로 성모의 뜻대로 그곳에 건립된 화려한 성당은 1876년 7월 2일 파리의 대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그 후로 그곳을 참배하는 순례자는 한층 더 많아져 매년 평균 60만명인데, 1933년 발현 75주년에는 실로 1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루르드에 있어서의 병자의 완치는 모두가 기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루르드 의국 조사 위원(醫局調査委員)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의 55년 동안에도 기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4,445건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루르드에 순례하는 병자가 모두 다 완치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구든지 많은 위안을 얻어 병고를 잘 참게 된다는 것은 일반이 인정하는 바이다.

 

현재는 교회에서 루르드의 성모 발현은 초자연의 발생이라고 규정했지만 이를 기념하는 축일 즉 2월 11일은 일찍이 1891년에 설정되어

우선 남쪽 프랑스 일대의 교회에서 준수하게 되었고, 다시 1907년에는 성 비오10세에 의하여 전 세계의 교회에서도 준수하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루르드 성지내 성모의 원죄없으신 잉태 대성당에

한국을 대표하여 전시될 ’한국의 성모’ 자수성화

 

’한국의 성모’ 자수 성화 루르드성지에 걸린다.  

세계적 성모발현지 프랑스 루르드(Lourdes) 성지에 한국을 대표하는 자수성화(刺繡 聖畵) 작품이 걸린다.

 

6일 루르드 성지에 전달돼 성지내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성당에 전시될 이 자수성화는

화가 심순화(가타리나, 42)씨가 그린 성모자(聖母子) 성화에

섬유예술가 김혜순(아녜스, 59)씨가 수를 놓고 매듭을 한

’한국의 성모’로, 루르드 성지에 한국을 대표하는 성화가 내걸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가로 65cm에 세로 120cm 크기의 이 작품은

푸른 빛이 도는 녹색 계열의 고운 한복을 입은 자애로운 표정의 성모가

색동옷 차림의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자를 중심으로 주변에 천사와 아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그림 중앙 오른쪽에는 서소문밖 네거리 성지와 태극기를, 하단에는 무궁화를 그려넣어

순교자들의 신앙으로 세워진 한국 교회를 상징적으로 드러냈으며,

아울러 한국 교회를 성모께 봉헌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림 윗쪽 하늘의 세 천사는 삼위일체를, 아랫쪽의 세 대천사와 색동옷의 네 남녀 어린이는 7성사를,

무궁화꽃 33송이는 예수의 33년 지상 생애를, 꽃망울이 맺힌 12개의 연두빛 꽃봉오리는 12사도를 각각 뜻한다.

(평화신문 726호.2003.6.1.에서)

 

 

세계 병자의 날

 

제15차 세계 병자의 날에 초대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2년 5월 13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2007년 열다섯 번째 맞는 "세계 병자의 날"을 대한민국 서울에서 주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 세계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는 모든 이의 관심을 난치병 환자들에게 모으고자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의료 분야에서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치료 방법을 찾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난치병 환자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중요한 소명이기도 합니다. 세계 병자의 날이 환자들과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고 "생명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으시는 환자들과 가족들, 보건사목 종사자들과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병자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고자 하는 모든 분들을 세계 병자의 날에 초대합니다.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역대 개최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92년 5월 13일 교황청 보건사목위원회 위원장 피오렌조 안젤리니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해마다 2월 11일을 "세계 병자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세계 병자의 날은 1993년부터 대륙별로 돌아가며 거행되었으며, 아시아 대륙에서는 레바논, 인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개최됩니다.

1993년(프랑스 루르드)
1994년(폴란드 체스토코바)
1995년(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1996년(멕시코 멕시코시티)
1997년(포르투갈 파티마)
1998년(이탈리아 로레토)
1999년(레바논 베이루트)
2000년(이탈리아 로마)
2001년(호주 시드니)
2002년(인도 바일란카니)
2003년(미국 워싱턴)
2004년(프랑스 루르드)
2005년(아프리카 카메룬)
2006년(호주 애들레이드)

 

'세계 병자의 날' 의의

   제15차 '세계 병자의 날' 행사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주최하고 서울대교구가 협조하여 2007년 2월9일(금)부터 11일(주일)까지 명동성당과 장충체육관 등에서 열리며,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특사로 하비에르 로사노 바라간 추기경(교황청 보건사목평의회 의장)이 참석합니다.

 

'세계 병자의 날' 제정의 역사

  1992년 5월 13일,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2월 11일에 '세계 병자의 날'을 거행하도록 제정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세계 병자의 날'을 제정한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하느님 백성과 더 나아가 여러 시민 단체와 가톨릭 의료 기관들로 하여금 불구자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보장해 주고, 각 교구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로 하여금 특별한 방식으로 보건 사목에 투신하도록 도와 주는 데 있다. 또한 자원 봉사자들의 소중한 참여를 더욱 장려하고, 의료계 종사자들의 정신적·도덕적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며, 교구 사제들과 수도회 사제들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병자들에 대한 신앙적 도움의 중요성을 더욱 잘 인식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세계 병자의 날'은 1993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병자들 곁으로 다가오십시오'라는 주제로 처음 거행된 이래 지난 2006년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관심을···' 촉구하는 제14차 행사까지 세계 각지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습니다. '세계 병자의 날'을 거행하는 것은 전시 효과가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과 이를 돌보는 각 분야의 봉사자를 기억하며 도우려는 어머니인 교회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영성적·사목적 돌봄'

  서울에서 열리는 제15차 세계 병자의 날 주제는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영성적·사목적 돌봄'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제15차 세계 병자의 날 담화문에서 인간과 과학으로 대표되는 의학의 속성을 언급합니다. "질병은 위기의 순간과 함께 자신의 개인적 상황을 차분히 직시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의학의 발전은 적어도 육체적인 측면에서는 이러한 도전에 대처할 수단을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 과학이 발전해도 모든 질병을 다 고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전 세계의 병원과 호스피스 병동과 가정에서 난치병으로 흔히 죽음을 앞두고 고통받는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과 과학의 근본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변하면 안 되는 것, 곧 가치 기준의 혼란을 정리하는 첫 번째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가치 기준의 재정립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지난 2005년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교황은 현대 세계를 사막으로 비유하며 교회의 사명을 말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가난과 굶주림, 자포자기와 소외, 파괴된 사랑, 공허한 영혼, 인간 생명의 존엄성 상실 등 수많은 사막이 존재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을 사막에서 이끌어내 풍성한 생명을 선사하시는 성자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도구로 이용되는 현대사회 특히 한국사회에서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영성적·사목적 돌봄'을 주제로 세계 병자의 날을 거행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며, 한국 가톨릭 교회는 세계 교회에게서 커다란 지지와 힘을 받는 것입니다.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2007년 사목교서에서 "생명의 가치를 보존하고 수호하는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가자"고 '생명을 선포하는 교회'의 역할에 온 교구민을 초대했습니다.

 

'생명을 선포하는 교회'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번 병자의 날 담화문에서 환자들을 위로하며 그들이 고통의 참 의미를 깨달아 고통의 그늘에 눌려 있지 말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 나기를 바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몸이 성치 못한 사람들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얼굴을 알아보도록 일깨워 줘야 한다."

  주변의 격려와 보살핌이 함께 있을 때 이러한 여정은 가능합니다. 비록 지금 나와 내 가족에게 질병의 그늘이 없다 할지라도 조금만 돌아보면 주변에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병자들과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고통에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귀찮고 힘들지라도 인간은 누군가를 도와 주면서 행복을 맛보기에 고통받는 이들과 어떤 형태로든 함께하는 일은 내게도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가톨릭 계통 보건 사목 종사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보건 사목 종사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비유하며 그들의 수고를 격려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면서 생명을 돌보고 서로 북돋아 주는 일이야 말로 생명을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update 2007.2.10.

 

 

♬Ave Maria-Gregorian Chant

 

 

 

 

 

 

 

 

 

 

 

 

 

 

 

 

 

 

 

 

 

 

 

 

 

 

 

 

 

 

 

 

 

 

 

 

 

 

 

 

 

 

 

 

 

 

 

 

 

 

 

Beata Vergine Maria di Lourdes

 

11 febbraio - Memoria Facoltativa

apparizioni 1858

 

Questa memoria si collega alla vita e all’esperienza mistica di Maria Bernarda Soubirous (santa Bernadetta), conversa delle suore di Nevers, favorita dalle apparizioni della Vergine Maria (11 febbraio ? 16 luglio 1858) alla grotta di Massabielle. Da allora Lourdes e diventata meta di intenso pellegrinaggio. Il messaggio di Lourdes consiste nel richiamo alla conversione, alla preghiera, alla carita. (Mess. Rom.)

 

Etimologia: Maria = amata da Dio, dall’egiziano; signora, dall’ebraico

 

Ai piedi dei Pirenei, Lourdes accoglie ogni anno 5 milioni di visitatori provenienti da ogni parte del mondo. Qui un giorno Maria e apparsa all’umile veggente Bernadette Soubirous, incaricandola di un grande messaggio di speranza per l’umanita, sofferente nel corpo e nello spirito, che e l’eco della parola di Dio affidata alla Chiesa.

Quella mattina era un giovedi grasso e a Lourdes faceva tanto freddo. In casa Soubirous non c’era piu legna da ardere. Bernadette, che allora aveva 14 anni, era andata con la sorella Toinette e una compagna a cercar dei rami secchi nei dintorni del paese.

Verso mezzogiorno le tre bambine giunsero vicino alla rupe di Massabielle, che formava, lungo il fiume Gave, una piccola grotta. Qui c’era “la tute aux cochons”, il riparo per i maiali, un angolo sotto la roccia dove l’acqua depositava sempre legna e detriti. Per poterli andare a raccogliere, bisognava pero attraversare un canale d’acqua, che veniva da un mulino e si gettava nel fiume.

Toinette e l’amica calzavano gli zoccoli, senza calze. Se li tolsero, per entrare nell’acqua fredda. Bernadette invece, essendo molto delicata e soffrendo d’asma, portava le calze. Prego l’amica di prenderla sulle spalle, ma quella si rifiuto, scendendo con Toinette verso il fiume.

Rimasta sola, Bernadette penso di togliersi anche lei gli zoccoli e le calze, ma mentre si accingeva a far questo udi un gran rumore: alzo gli occhi e vide che la quercia abbarbicata al masso di pietra si agitava violentemente, per quanto non ci fosse nell’aria neanche un alito di vento. Poi la grotta fu piena di una nube d’oro, e una splendida Signora apparve sulla roccia.

La Signora aveva l’aspetto di una giovane di sedici o diciassette anni. Vestita di bianco, con una fascia azzurra che scendeva lungo l’abito, portava sulla testa un velo bianco che lasciava intravedere appena i capelli ricadendo all’indietro fino all’altezza della fascia. Dal braccio le pendeva un grande rosario dai grani bianchi, legati da una catenella d’oro, mentre sui piedi nudi brillavano due rose, anch’esse di un oro lucente.

Istintivamente, Bernadette s’inginocchio, tirando fuori la coroncina del Rosario. La Signora la lascio fare, unendosi alla sua preghiera con lo scorrere silenzioso fra le sue dita dei grani del Rosario. Alla fine di ogni posta, recitava ad alta voce insieme a Bernadette il Gloria Patri. Quando la piccola veggente ebbe terminato il Rosario, la bella Signora scomparve all’improvviso, ritirandosi nella nicchia, cosi come era venuta.

Tre giorni dopo, il 14 Febbraio, Bernadette - che ha subito raccontato alla sorella e all’amica quanto le e accaduto, riferendo della cosa anche in casa ? si sente chiamata interiormente verso la grotta di Massabielle, munita questa volta di una bottiglietta di acqua benedetta che getta prontamente sulla S. Vergine durante la nuova apparizione, perche, cosi le e stato detto, su queste cose non si sa mai e potrebbe anche essere il diavolo a farle un tiro mancino…

La Vergine sorride al gesto di Bernadette e non dice nulla. Il 18 febbraio, finalmente, la Signora parla. “Non vi prometto di farvi felice in questo mondo ? le dice - , ma nell’altro. Volete farmi la cortesia di venire qui per quindici giorni?”. La Signora, quindi, confida a Bernadette tre segreti che la giovane deve tenere per se e non rivelare mai a nessuno.

Intanto la notizia delle apparizioni si diffonde in un baleno in tutta Lourdes e molti curiosi si recano con Bernadette in quella grotta dove lei dice di vedere “Aquero” (quella la, nel dialetto di Lourdes). Bernadette, infatti, non conosce il francese, ma sa parlare solo il patois, il dialetto locale. E nel patois la bella Signora che le appare a Massabielle e “Aquero”.

E intanto l’afflusso della gente alla grotta aumenta. Nell’apparizione del 24 febbraio la Madonna ripete per tre volte la parola “Penitenza”. Ed esorta: “Pregate per i peccatori”.

Il giorno seguente, la Signora dice a Bernadette di andare alla fonte a lavarsi e a bere. Ma non c’erano fonti in quel luogo, ne sorgenti. La Signora allora indica un punto esatto. Bernadette vi si reca e poiche non vede l’acqua comincia a scavare con le sue mani, impiastricciandosi la faccia e mangiando fili d’erba... Tutti i presenti si burlano di lei. Ma, poco dopo, da quella piccola buca scavata nella terra dalle mani di Bernadette, cominciava a scorrere acqua in abbondanza. Un cieco si bagno gli occhi con quell’acqua e riacquisto la vista all’istante.

Da allora la sorgente non ha mai cessato di sgorgare. E’ l’acqua di Lourdes, che prodigiosamente guarisce ancora oggi ogni sorta di mali, spirituali e fisici, e senza minimamente diffondere il contagio delle migliaia di malati immersi nelle piscine. E anche il ricordo piu caro che ogni pellegrino ama portare con se, facendo ritorno a casa dalla cittadella di Maria.

Ma un fatto ancora piu eclatante doveva verificarsi, dopo il miracolo della sorgente, per avvalorare come soprannaturali le apparizioni di Massabielle. La Signora aveva chiesto a Bernadette che i sacerdoti si portassero li in processione e che si costruisse una cappella. L’abate Peyramale, pero, parroco di Lourdes, non ne voleva sapere e chiese percio a Bernadette un segno irrefutabile: qual era il nome della bella Signora che le appariva alla grotta?

Nell’apparizione del 25 marzo 1858, “Aquero” rivelo finalmente il suo nome. Alla domanda di Bernadette, nel dialetto locale rispose: “Que soy era Immaculada Councepciou…” (Io sono l’Immacolata Concezione). Quattro anni prima, Papa Pio IX aveva dichiarato l’Immacolata Concezione di Maria un dogma, cioe una verita della fede cattolica, ma questo Bernadette non poteva saperlo. Cosi, nel timore di dimenticare tale espressione per lei incomprensibile, la ragazza parti velocemente verso la casa dell’abate Peyramale, ripetendogli tutto d’un fiato la frase appena ascoltata.

L’abate, sconvolto, non ha piu dubbi. Da questo momento il cammino verso il riconoscimento ufficiale delle apparizioni puo procedere speditamente, fino alla lettera pastorale firmata nel 1862 dal vescovo di Tarbes, che, dopo un’accurata inchiesta, consacrava per sempre Lourdes alla sua vocazione di santuario mariano internazionale.

 

Autore: Maria Di Loren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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