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관련

'따스한 눈으로 세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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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peace-maker] 쪽지 캡슐

2008-09-16 ㅣ No.8471

바오바브나무 이야기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보면 ‘바오바브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오바브나무는 워낙 성장력이 좋기에 잠시라도 자라나는 가지를 치고 뿌리를 잘라주고 하는 감시를 소홀히 하면 순식간에 엄청 큰나무가 되어 자칫하면 어린왕자가 사는 소혹성을 뒤덮어 삼키거나 공중분해 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린왕자는 매순간 바오바브나무를 감시하고 다스리며 소혹성의 안전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권력이 바로 바오바브나무와 같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그 사회가 잠시라도 감시와 견제와 비판기능을 상실하면 설사 그 지도자가 성군 솔로몬일지라도 소혹성에 바오바브나무가 그러했던 것처럼 권력은 권력 자체의 탐욕스런 이기주의적 속성상 사회에다 부정적 기능을 초래하는 오도된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진국일수록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와 비판기능이 시스템적으로 정착되어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 NGO단체들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역량이 극대화되어 있어 정책입안과정에서부터 시행에 이르기까지 깊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1987년 6월민주화항쟁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는 세워졌었지만 그런 측면에서는 아직 미흡한 부분이 많습니다. 국가정책이 안정적으로 수립되고 펼쳐지려면 이러한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확립되고 작동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당연히 결코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것은 국리민복과 공동선 실현을 위해 구성원 전체가 매순간 가장 최선의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하여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에, 당연히 정치적 비판은 필요하고 특히 정책에 대한 엄정한 감시의 눈길과 참여의 손길은 참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이 지기는 지난 세월 동안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인 지지여부를 떠나 늘 비판적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난 노무현 대통령과 정권 역시 개인적으로는 지지를 했었지만 국리민복과 공동선 실현 그 원칙에 어긋나는 정책을 펼칠 때는 그 누구보다 반대하고 비판하는데 앞장섰으며 그것은 이 게시판에 고스란히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이 '따스한 눈으로 세상보기' 게시판이야말로 지난 노무현 정권 동안 노무현 정권에 가장 비판적인 글들이 많이 올라온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감시와 비판 역시 그런 관점에서 그 당위성을 찾습니다. 이 지기는 비록 그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럴지라도 이왕 집권하였으니 성공적인 국정수행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았습니다. 현 정권의 실패와 좌절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전체의 비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것은 몰라도 그가 내세운 실용주의에 기대감을 표하기도 했으며, 그가 실용적인 열린 자세로 통 큰 정치를 펼치며 최소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기백 있게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는 필드라도 마련해주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지난 몇 달간 확인한 것은 그가 표방한 실용주의의 허구성이었습니다.


중국을 지금의 모습으로 있게 하고 선진대국의 기초를 마련한 등소평이야말로 ‘흑묘론’에서 볼 수 있듯 대표적 실용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중국인민에 대한 진정하고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국리민복의 통치철학이 산맥의 등뼈처럼 그의 정치 전체를 흔들림 없이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그의 통치행위의 원칙 그 도덕적 정당성이 비롯되며, 그가 지녔던 그 심오하고 원대한 꿈이 오늘의 중국을 있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진정으로 실용주의가 유익하게 작동되려면 그 안에 그를 온전히 뒷받침을 해야 할 통치철학이 든든히 바쳐주고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통치철학을 이명박 정권 특히 대통령 개인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작금의 정치적 혼란의 근본 원인입니다. 마치 국가를 CEO가 사기업 경영하듯이 하려들기에 이토록 좌충우돌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의 실용주의는 가치부재 속에 곧 천박함을 드러내며 예측난망의 혼란(덤벙거림)만 드러내고 있는데 국정을 책임질 지도자의 정책시행의 덤벙거림은 국가전체의 위기로 바로 치닫게 만드는 치명적 요소가 될 수 있으니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항인 것입니다.


물론 시장이 국가 전체를 압도적으로 주도한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 CEO형 지도자가 요구되고 국가 역시 경영마인드로 운영되어져야 한다는 소리가 높지만, 정치의 근본 그 무게는 그리 가볍지가 않습니다. 국가는 맹목적 이익추구의 기업이 아니며, 국민은 그런 사기업의 직원도 아닙니다. 국가는 한 인간의 삶이 탄생에서부터 일상생활과 자아실현을 거쳐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삶의 뿌리가 심어져 있는 품위 있는 정치문화적 의미공간입니다.


그런 의미 있는 삶의 소중한 공간을 이리도 쉽게 그것도 지도자가 앞장 서 상업적 가치판단의 세계 속으로 내던져버리려는 것에서 촉발된 갈등이 이번 ‘미 수입소고기 사태’의 의미 그 본질이며, 지도자 이명박과 일반국민 사이의 이러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가치판단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개념의 차이 그 간격(gap)에 이번 사태의 비극이 있었고, 그만큼 서로 간에 상처도 깊게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통찰이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정치란 국민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국민들의 이해 속에서 이뤄져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과정과 절차의 예술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일지라도 합법적이고 정당한 과정을 통하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라면 무가치하고 해로울 따름입니다. 민주사회에 있어 한 지도자에 대한 정치력을 판단하는 평가기준 역시 그가 얼마나 정당하고 합법적인 수단과 과정을 통해 펼쳤는가가 모든 것에 우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향과 업적’의 문제가 나오게 되는데 지향주의의 삶을 사는 자라야 과정과 절차를 귀중히 여길 수 있겠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보는 자야말로 결과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자이고 민주사회에는 그리 합당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거기에다 다른 이들 모두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권력이 있는 반면, 자기 편 외에는 모두 적으로 돌릴 뿐 아니라 자기편 속에서마저도 자꾸 적을 만들며 갈수록 움츠러드는 권력이 또한 있습니다. ‘부루터스, 너 마저도!’ 했다지만 부루터스마저도 적으로 돌린 정치는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그 권력이 그 사회전체의 공동선을 진정으로 추구하느냐 아니면 집권세력의 특수이익에만 집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물론 도덕군자가 아닌 한 완벽하게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그 근본적인 지향성에 있어서 정치는 소외된 이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어야 하며, 집권세력 밖까지 포용하고 다독거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정치적 성과도 결정됩니다. 그런데 국민의 감정을 이토록 상하게 하면서 올바른 정치가 과연 이루어질 것인가 염려가 됩니다.


흔히 민주사회에서 정치의 안정과 불안정의 바로미터는 그 정치수준과 민도(民度)와의 함수관계에서 찾아진다고 합니다. 민도와 정치수준이 대등할 때 정치는 안정 되나 그렇지 않고 그 사이에 간격이 있으면 있을수록 정치는 불안정해지게 되며, 특히 민도에 비해 정치수준이 크게 떨어질 땐 그것을 단순히 정치적 불안정 뿐 아니고 사회적 불안까지 초래하게 됩니다. ‘민도와 정치수준이 대등하다.’는 것은 정치에 국민의 일반의사 곧 민의가 왜곡됨 없이 그대로 정치에 반영 실현되고 지도자의 뜻 역시 국민에 전달 될 수 있는 정치와 국민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정상적으로 활성화 되어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는 한마디로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된 상태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통치행위 자체에 설득력 지닌 대의명분과 정당성, 결국 품격 있는 통치철학이 지도자의 마음에서부터 자연스레 표출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문득 ‘문명이란 설득이 폭력을 이기는 것이다.’라는 화이트헤드의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때 우리의 정치는 이런 천박함에서 벗어나 문명화 될 것인가 한숨만 나옵니다.


정치란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면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의 뜻은 ‘국가의 주권자가 그 영토나 국민을 다스리는 일’이고 두 번째 뜻은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에 따르는 현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데 대체적으로 우리는 두 번째의 뜻으로만 정치를 생각할 뿐 첫 번째의 뜻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데, 이 때 국가의 주권자란 국민 모두입니다.


그러므로 권력으로의 정치만이 아닌 넓은 뜻의 정치에 우리 모든 국민은 국가공동운명체의 일원으로 늘 참여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권력의 참여까진 아닐지라도 국정의 참여는 국민의 의무요 권리로,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소에 나가 투표용지에다 도장 찍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겨선 안 됩니다. 이에 대한 포기는 권리의 포기일 뿐 아니라 책임과 의무마저 저버리는 진정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항시 정치권력에서 솟아날지도 모르는 악의 씨앗과 싹을 찾아 심기지 못하도록 하고 뿌리 뽑도록 눈을 날카롭게 뜨고서 살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오바브나무가 뿌리내릴 수 없도록 언제나 살피는 어린왕자의 역할과 같은 것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바오바브나무는 순식간에 커져 소혹성을 뒤덮고 기어이는 소혹성을 갈라놓으며 부숴버릴 것입니다. 그 때는 이미 늦어 아무리 뿌리를 도끼로 패고 톱으로 자르고 하려해도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정치(政治)가 정치(正治)가 될 수 있도록 항시 진단하고 감시하여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해야 하며, 그러한 정권과 정책에 대한 건전한 비판마저 당파주의로 매도한다면 그런 주장을 펼치는 자신이 혹시 당파주의자가 아닌가 오히려 반성해 봐야할 것입니다. 민주화란 필연적으로 그 구성원의 최대다수에 의한 최선의 참여, 곧 중의(衆意)에 의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으니, 정치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한 민주주의 정지체제에서 반대 없는 정치란 있을 수 없습니다. 민의를 총체적으로 수렴하고 그에 보완하고 하는 사이 정책은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되니, 정치에서는 모두를 위해서도 살아있는 견제·압력·반대세력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에서는 인간은 구원되어야 하고 인간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제반현실 곧 인간문제에 대해 결코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빛으로 밝혀 참되게 드러내 주어야 할 의무를 부여받은 그리스도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시대의 아픔을 바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서 그 사회와 더할 수 없이 깊은 결합을 이루며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됨으로써 사회복음화의 참된 누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적은 누룩이 밀가루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 바로 우리야말로 이 사회의 인간화와 민족구원의 시대적 사명을 받은 역사적 주체임을 자각하고서, ‘오늘 그리고 여기(hic et nuns)’ 곧 살아있는 삶의 모든 현장 한 가운데에 하느님의 사도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면으로 혼란과 위기에 처해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현실은 그 소명에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환경’ 전반에 공동선을 추구하는 의식이 온전히 뿌리 내릴 수 있는 그런 품격 있는 복음적 사회를 창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게시판의 현실을 되돌아 볼 때 역시 가슴 아픈 측면이 있습니다. 정치권력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당파주의로 몰고 가려는 구태의연하고 미숙한 몸짓을 보며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 지향하는 바는 어디까지나 ‘정치·문화·종교·사회의 모든 면에 있어서의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진보적 가치의 추구’입니다. 그 공동선의 근본원칙 아래 관용과 다양성도 함께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이 되면 결국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사회를 위한 공동선은 자기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그 뒤에 남는 것은 당연하게도 강자의 논리와 기득권의 구조적 지배 그뿐일 것입니다.


이 게시판의 이름인 ‘따스한 눈으로 세상보기’의 ‘따스한 눈’ 역시 무분별한 미지근함(요한묵시록 3장 16절)의 온정주의적 눈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가장 작은 이(마태복음 25장 40절)에게 우선적으로 먼저 쏟는 그 사랑이 담긴 따스한 눈으로 세상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람이 살 맛 나는 세상이 열립니다. 하느님의 공정(公正)은 칼로 자르는 듯한 차가운 공평무사가 아니라 마치 모자라는 자식에게 떡 하나 슬쩍 더 얹어주는 것 같은 어미의 사랑 그 편향된 공정(이사야서 42장 3절)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의 따스한 눈길을 지니는 우리 불꽃님들이 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따라서 이 게시판의 공간 역시 구태의연하고 비생산적인 말싸움만 난무하거나 앞의 그런 사랑이 바탕에 깔리지 않은 무의미한 논쟁의 장소가 아닌, 그런 사랑의 원칙이 살아있는 ‘삶을 키우는 한마당’이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소리를 당당히 낼 수 있는 기득권 세력의 주장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힘없고 소외 되고 약한 자들이 자기 속사정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아직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이 게시판이 그렇게 자기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의 소리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드러내주고 따스한 사랑의 눈길로 그들의 속사정을 살펴보고 함께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오바브나무는 잘만 크면 열매는 식품이나 약으로 사용하고 껍질의 섬유 역시 옷감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정치권력 역시 그처럼 잘 다스려 국리민복 향상에 보탬이 되고, 이 게시판 역시 소중히 가꾸어 우리 모두에게 ‘인간답고 품격 있는 보다 나은 사회’의 꿈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꽃지기 정중규 

 

 - 옮긴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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