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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조용히 생각 해보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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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한 [jelka] 쪽지 캡슐

2005-08-09 ㅣ No.2370

여러분이 누구이든지 (사제이시든지, 사목위원이시든지 일반신자 이시든지 막론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으신다면

우리들의 신앙을 가다듬기 위하여

아래의 글을 읽고나신 후 성령님의 은총을 힘입어

깊은 묵상을 통하여 변화되는 삶을 찾아

매일매일 구원의 행복하신 삶을 찾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퍼온 글 -

 

신자들이여,  참으로 좋으신 신부님들을 물들게 하지 말기를.......

 

신자들의 무의식적 잘못된 습성들이

 

신부님들의 천국 여정에 걸림돌이 되는구려.

 

 

사소한 일에 삐치지 않는 신부님들은 과연 없을까요.

 

신부님들의 사소한 삐침에 신자들은 안절부절,

 

신자들의 가슴속은 멍들어만 갑니다.

 

 

신부님들이 신자들을 달래셔야지

 

신자들이 신부님을 달랜다는 것이

 

격식에 어울리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신부님들의 투정에 신자들의 한숨이

 

그칠 날이 없군요.

 

 

가시는 발걸음이 제 아무리 서럽다 하시더라도

 

그것은 신부님들 스스로가 짊어지셔야 할 십자가가 아닐까요.

 

아니,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가시밭길인데....

 

 

신자들로부터 받으실 수 있는 모든 서러움을

 

혼자서 삭이실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신자들로부터 받으실 수 있는 모든 서러움을

 

마음속의 거름으로 만드실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무지한 신자들의 이전투구식의 갈등에

 

모르는척 비켜서 있는 비겁함보다는

 

온 몸을 던져서 그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없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사제의 직분은 무엇일까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호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형수도 용서하는 곳이 교회이자 예수님의 정신이거늘.....

 

흡혈귀 같은 자케오도 용서받았던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거늘......

 

하물며 사제의 권위와 직분으로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이나 하는 정신나간 그 엉터리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과연 사제로서의 길일까요.

 

사제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신자들이 과연 타도의 대상인가요.

 

 

" 사제가 신자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

 

그런 말도 있습니까. 그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 말입니까.

 

이해가 되는 사람이 있으면 해석을 좀 해주시죠.

 

우리가 알아 듣지도 못하는 그런 말을 하는

 

사제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죠.

 

혹 말세의 언어가 아닌가요.

 

 

선량한 신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통합 조정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없으시다면

 

굳이 그 길을 계속해서 걸으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선량한 신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통합 조정되지 않은 채로 그냥 내버려졌기에

 

교회가 네편 내편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신부님들의 통합 조정능력 부족의 그 흔岵?/P>

 

남아있는 선량한 신자들이 고스란히 떠 안게 되고,

 

그 흔적을 지우느라 많은 시간들의 가슴앓이를 해야겠죠.

 

신부님들은 무책임하게도 미련없이

 

그냥 훌쩍 떠나버리시면 그만이겠지만....   

 

 

때가 되고 철이 되면 훌쩍 떠나버리는

 

철새와 같은 그이가 주인일까요.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그대들이 주인일까요.

 

 

주인이 객이 되고, 객이 주인이 되는

 

거꾸로 가는 교회의 이 모습이

 

과연 정상적인가요. 

 

 

세상 모든 것이 빠르게 제 모습을 찾아 가도

 

오직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의 뒤틀려진 그 모습이랍니다.

 

 

세상 많은 신자들이 발 빠르게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넓혀감에도 불구하고

 

오직 신부님들만이 당신 멋에 도취되어

 

구시대의 구렁속을 헤메시는군요. 

 

 

교회가 당신의 멋을 위해 존재하는 곳은 아니지요.

 

교회의 많고도 많은 선량한 신자들이 당신께서 부리시는 그 멋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는 아시는지요.

 

 

신자들을 대상으로 당신의 이상을 마음껏 펼치기 보다는  

 

흩어진 신자들을 하나라도 더 불러 모으려는 강렬한 열정과 행동이

 

오히려 사제가 가야할 거룩한 길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이 죽음으로써 흩어진 신자들을 불러 모았듯이 말입니다.

 

 

신자들을 대상으로 당신의 이상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그것은 세상을 위한 당신의 길이 아니라 당신의 영욕만을 위한 이기적인 길이 아닐까요.

 

그것은 떼묻은 당신의 영욕을 위해 순수한 세상의 영혼들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굳이 이러한 길을 가기 위해서

 

지금 걷고 계시는 그 길을 계속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보이네요.

 

 

왜냐구요. 

 

자신만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순수한 다른 영혼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걸어 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은 무수히 많거든요.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고자 하신다면

 

당신의  그 마음과 행동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 너희는 너희들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테니까 " 라는 것처럼 들리는

 

당신의 막나가시는 듯한 그 마음과 행동으로 교회의 한쪽 기둥이

 

뿌리채 흔들리는 진동이 귓가를 때리는군요.

 

이 분노의 진동소리가 들리기는 들리십니까.

 

그런데도 당신의 그 멋이 나오십니까.

 

 

지금 우리는 한가롭게 당신의 멋을 감상할 시간이 없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선량한 대다수의 신자들은 세속과의 격렬한 전쟁을 치르는 중이랍니다.

 

선량한 신자들을 어서오라 유혹하는 세속과의 피할 수 없는 그 전쟁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서 도도히 흐르는 신앙의 열정 만큼은

 

그 싹을 키우려고 눈물겨운 투쟁을 한답니다.

 

 

세상속에 사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제의 사목이 되어야 하거늘....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있는 당신께서

 

이러한 전쟁을 이해하시기는 한다는 말씀입니까.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피하고 있는 당신께서

 

이 전쟁의 강도가 피부에 와 닿기는 한지요. 

 

당신은 세상 사람을 만날 뿐

 

세상을 알지는 못하지요.

 

 

세상을 아신다고요.

 

그렇게 항변할 수도 있으시겠죠.

 

그러나 당신께서 아시는 그 세상은

 

눈이 있으니 눈으로 보고 아는 그런 세상이요,

 

귀가 있으니 귀로 들어서 아는 그런 세상이랍니다.

 

우리가 가슴으로 마음으로 온몸으로 피와 땀과 눈물로 아는

 

그런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아닐까요.

 

 

세상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철없는 당신 때문에.....

 

세상속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여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당신때문에.....

 

세상속에서 처절한 투쟁을 하면서 영광의 그 상처를 입은 선량한 신자들이

 

목자이신 당신으로부터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를 받지는 못할망정

 

이중 삼중의 상처는 받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상에 치이고, 교회에 치이는

 

선량한 신자들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사랑이 없으시다면

 

차라리 당장 거룩한 그 검은 옷깃을 감추시기라도 하면 될것을.....

 

아, 땅이 울고 하늘이 우는 이 슬픈 현실이여....

 

너는 언제 떠나겠느냐.

 

당장 떠나거라.

 

 

세상속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기 위해 가야 하는 곳이 교회이거늘......

 

교회에 가는 것이 또다른 상처를 얻기 위해 가야하는 곳이라면.....

그러기에 교회에 가는 것이 주저되는 신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될 큰 슬픔이겠지요.

 

더욱이 이런 슬픈 일들의 주역이 사제라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호하고 도와야 하는 것이 사제가 가야할 길일텐데...

 

때에 따라서 사제들은 신자들에게 아주 직접적인 상처를 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들의 건전한 신앙생활에 사제가 방해꾼의 역할을 할때도 있으니.....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있어서는 안될 이러한 슬픈 현실들은

 

교회의 여러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반복되곤 하는데.....

 

과연 어디에서 그 근본적 원인을 찾아야 할까요.

 

훌륭한 지도자가 흔치 않는 교회의 현실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군요.

 

 

교회가 목표를 향해 가야 하나요.

 

그럼 그 목표는 무엇인가요.

 

그 목표의 내용이 '일'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일'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요,

 

사람은 '일'이라는 수단을 통해 얻어야만 하는

 

가장 소중한 결과물이 아닐까요.

 

 

'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지

 

사람이 '일'을 위해 있다보니

 

교회가 힘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의 지도자인 신부님들은

 

왜 '일'을 위해 사람을 다치게 하는

 

헛된 '일'들을 되풀이 해야만 하시나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일'들을 말이예요.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 그 '일'들을 말이예요.

 

그러니 교회가 힘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요.

 

 

일은 잘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답니다.

 

잘하면 얼마나 잘하고 못하면 얼마나 못하겠습니까.

 

먼 훗 날 돌이켜 보면 잘하고 못함의 차이는 단지 백지 한장인것을.....

 

그 백지 한장 조차도 빛이 바래 다 없어지고 말것인데.....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옳은 일일 수도 있고

 

잘못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옳은 일이지만 먼 훗날

 

잘못된 일로 자리매김 될 수도 있고,

 

지금은 잘못된 일이지만 먼 훗날

 

옳은 일로 자리매김 될 수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이죠.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속에 숨어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분명한 그 한가지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사제들이 일구워 가는 그 일들은 

 

상당수가 사람의 소중함을 해치면서 까지, 사람을 다치게 하면서 까지 일구어 가는 

 

일 자체에 목표를 두는 세상의 그런 일들과 같아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그 일들은 대개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 가거나 없어지게 되며

 

때에 따라서는 한줌의 재로 변하기도 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일들이 들어서게 되는

 

그런 일들인데 말이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일들을 일구워 가면서 만나게 된 많고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고스란히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관계가 좋았으면 좋은대로

 

그 인간관계가 나빴으면 나쁜대로

 

고스란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더군다나 일을 통해서 만나게 된

 

그 사람의 그리스도의  향기는 오랜 시간이 흘러간다해도

 

잊혀지지 않은채 우리의 가슴속을 헤집으며

 

멀리 멀리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 사람이 일구워 놓은 모든 일들은 비록 사라져가고 있지만......

 

 

사람이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일'이 목표가 아니라

 

'일'속에 숨어있는 사람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이 외침이 들리십니까.

 

이 외침을 이해하시기는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 외침을 뼛속 깊숙히

 

몸서리쳐지도록 이해를 할 수 없으시다면

 

사제의 사목은 핵심을 비켜나 걷돌다 말것입니다.

 

언제까지 더 시간 낭비를 하시려 합니까.

 

얼마나 더 시행착오를 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가시는 그 걸음을 인간적으로 이해받기를 원하신다면

 

차라리 신자들에게 인간으로 다가서면 될것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무엇이기에

 

교회의 한숨은 절로 나오고,

 

그 주름살은 깊어만 가는군요.

 

 

가시는 그 걸음은 아무리 뜯어봐도

 

예수님과 같지 않은 보통 인간인데....

 

예수님처럼 추앙받기를 원하시는 터라....

 

예수님의 대리자라고 스스로를 자리매김 하시는 터라....

 

이러한 모순들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군요.

 

 

시노드의 핵심에 있었던 신부님의 그 말씀....

 

백번 천번 시도드하는 것보다는

 

백번 천번 사제들이 겸손해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피를 토하시는 그 충고가

 

왜 이렇게 가슴을 때릴까요.

 

 

아 !  슬픈 이 현실이여,

 

아 ! 가련한 내 님이시여,

 

자, 이제 무덤에나 던저져야 할 그 아집을 버리시지요.

 

님의 그 발목을 묶고있는 어둠의 쇠사슬을 끊어버리시지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그 십자가를 내 던져버리십시오.

 

그 대신 하느님을 향해 고이 간직한 그 날개를 활짝 펴십시오.

 

그리고 훨훨 하늘 높이 멀리 멀리 날아 올라 보십시오.

 

희망이 속삭이는 새로운 세상이 보이지를 않습니까.

 

사람들이 달라진 님을 기다리는 그 세상이.

 

 

정말로 말도 안되는, 엉터리 같은

 

신부님들이  진을 치고 있는 아눌한 교회의 현실에서

 

신자 여러분은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런(?) 님(?)들에게

 

순수한 여러분의 영혼을 맡겨서 지치고 상처 받고 여러분의 인내심을 시험받기 보다는

 

죽은 사람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살아있는 여러분의 영혼만이라도 스스로가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신자 여러분은 벽돌 한장 한장 정성스럽게 포개어 쌓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거리를 헤메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심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오직 하느님을 향한 내공을 쌓으십시요.

 

어떤 주위 환경에서도 초연해 질 수 있는 잘 다져진

 

내적 신심을 쌓으십시요.

 

 

그리고 기다립시요.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올 것입니다.

 

먼길을 떠나시면서 혼자 내버려진 어린 자식을

 

안스러워 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시는 아버지가

 

여러분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멀리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계실 것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십시요.

 

희망을 잃지 마십시요.

 

 

아버지가 저기서 두 팔 벌리고 걸어오고 계시지를 않습니까.

   

어서 달려 가십시요.

 

그리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십시요.

 

그리고 소리내어 엉엉 울으십시요.

 

아버지 없는 그동안의 서러움을 다 토해내십시요.

 

울고있는 여러분이 가여워서

 

아버지는 더 이상 여러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어떠한 경우가 있더라도, 사제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신자 여러분 각 개인의

 

피치 못할 내외적인 사정이 있더라도  교회내에서의 성사와 전례 생활 만큼은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충실한 성사와 전례 생활은 신자 생활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이것 없이 하느님께 대한 내공과 내적 신심을

 

쌓는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 만큼은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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