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동성당 게시판

사랑하고 싶은 그녀 ~신앙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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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주 [jju2] 쪽지 캡슐

2000-09-07 ㅣ No.4290

-윗-  앗!  늦었당 종시니빠가 오늘까지 내라구 했는데 천성이 어디가랴 !!

셤공부도 숙제도 미리 해본 역사가 없는 난 오늘도 이렇게 부랴부랴 하고 있다. 이게 신앙체험이냐구?  설마 하니 아무리 날라리 신자여두 예수님편에서 생각해보면 주님의 은총아닌게 없는 법인것인디..

인제 부텀 수기를 쓸요량인가분디 부디덜 잘좀 읽어 주쑈. 알갔제라?

*종시너빠 -윗- 글도 같이실으믄 안되는거 알제?

 

외할머니가 우리 엄마를 가졌을때 태몽하나를 꾸셨답니다.

신부님 두분이 집안으로 무언갈 가지고서 들어오시는 꿈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토속신앙을 믿으시던 우리 외할머니는 천주교로 개종을 하여 그야말로 열렬한 카톨릭 신자가 되셨고 그 피를 이어받은 우리 엄마 역시도 그러하셨지요.

그러나 제아무리 순종이라도 세월이 흐르다보면 변종이 생기는 법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내동생과는 반대로 믿음에는 안중도 없고 그저 사람이 좋아서 다니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면 참 모순이라는 생각도 들곤한답니다.

이리도 얕은 신앙심 덕에 뭐라다할 신앙체험은 없지만, 내가 하느님을 믿은 25년동안 그나마 가장 코끝 찡했던 순간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제가 막 사회로 첫발을 내딛은 스므살의 어느 봄날...

저랑은 네살밖에 차이나지않는 우리 막내 이모의 손에 이끌려 거듭나기라는 단체에 활동을 하게 되었답니다.

저희 금호동본당에 청년단체인 이곳은 재가장애인과 관련.  교육이나 방문활동 그밖에도 여러가지 행사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더블어 살아갈 수 있도록 미약하나마 용쓰는 곳이라고나 할까요!

여하튼 그때 당시 봉사는 제 관심사 밖의 일이었답니다.

몇달 못 다니고 탈단을 해버린 저는.   

2년동안 세속의 수많은 일들을 해가며 한마디로 나름의 방탕한 세월로 내삶을 굴리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무언가에 이끌려 관심밖의 일이었던 그곳을 다시 찾게되었고 2년전의 저와는 사뭇다른 저를 발견 할 수 있었답니다. 이번엔 제가 스스로 찾아든 것이니까 당연한 모습이었을 테지요..

좀더 적극적인 눈으로 활동을 하게 됐을 때 알게된 이가 있었답니다.

이름은 "이 보 나"

자그마한 키. 동그랗고 자그마한 얼굴. 둥근 눈. 짝딸막한 손. 둥그런 어깨...

어딜봐도 귀여운 그녀!!

저보다도 일곱살이나 많은데 정신연령은 세살짜리 어린아이에 비교 할 수 있을만큼 순수하고 맑았답니다.

보나언니는 정신지체 1급에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장애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 아무런 말 없이 저를 보며 따스한 미소를 보내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사랑이 아주 많은 사람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지요.

그 후에도 찾아 갈 때마다, 그럴 수록 전 언니가 점점 좋아져 갔습니다.

할줄 아는 말이라봐야 "네~"하고 수줍은 미소를 띄우는 것이 전부였고 할줄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착하고 고운 그 심성은 저를 마구 그녀에게로 빠져들게 했답니다.

그리고 언니도 점차 저를 좋아하게 되었지요.

보나언니는 1남 5녀 중에서도 막내딸이랍니다.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서 늦둥이 보나언니를 낳으셨고 산모가 고령인탓인지 언니는 다운증후군이라는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되었지요.

이제는 일흔이 훌쩍 넘어버리신 노모.. 그분은 구시대 방식에 맞게 집안에서만 곱디곱게 기르시고 그덕에 교육이라곤 받아 본적도 없는 언니는 어머니로 부터 배운것 외엔 별로 할수있는게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답니다.

어느날,

천주교와는 무관하시던 보나언니의 어머니께서 천주교인이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글세... 우릴 잘 보셨나! 아마도 그럴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주위의 권유도 있었던 것 같았다. 천주교를 좋게 보신탓일까 보나언니를 수녀님이 운영하는 시설에 맡기고 싶다고 우리만 보면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어찌보면 참 가슴아픈 일이기도 하다. 피를 나눈 가족인데도 다른 자식들에게 맡기기엔 짐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이런 현실을 볼때마다 참 암담하기도 하고 답답했습니다.

어찌됐거나 저희는 기뻤답니다. 우리 보나언니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은 하느님 보시기에도 좋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는 ’분닥세인트’에서의 하느님으로 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형제라도 된냥 한주도 거르지 않고 보나언니와 함께 미사를 드렸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찌는 한 여름에도 보나언니는 주일아침 "성당 가야지"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만 들으면 벌떡 일어나 체비를 한다고 하시며 저희더러 신기하다는 듯 말씀을 해주시곤했답니다.

집안에서만 30년 넘도록 지내온 언니는 그야마로 엉거주춤한 폼으로 어그적 어그적 걷습니다. 손을 잡아야만 걸을 수 있던 언니!

3년이 흐른 지금은 성당에서 집까지가는 길도 다 외우고 혼자 가보시라면 뒤 따라오는 우리 눈치를 보아가며 잘도 가십니다. 단지 아직도 횡단보도를 무서워하고 차가 와도 비킬 줄 모르는게 좀 걱정이지만 보나언니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는게 바로 우리 주님께서 내려주신 자그마한 기적이 아닌가 싶었지요.       

우리는 오며 가며 성호경 긋는것도 공부하고 여러가지 노래도 부르며 다녔습니다.

보나언니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따라하는 모습은 정말 사랑스러웠지요.

그러나 즐겁기만 한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운증후군은 염색체 이상으로 오는 선천적 질환으로 제 8요일에서도 보았듯이 서로들 닮았고 누구나 장애인임을 쉽게 알 수 있기때문인지

사람들은 보나언니를 꼭 뭐 보듯 처다보았지요. 그리고 저는 곱지않은 시선들과 가여워하는 측은지심들에

그들이 미워지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이제 우리는 뭍사람들의 시선을 어느정도는 무시하며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때로는 미소를 지어보이기 까지 했지요 .

어느새...

이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리도 못하던 성호경을 이제는 "성부와~"만 외쳐도 손이 절로 이마로 갈 정도로 성호경 하나 만큼은 도가 트이게 되었답니다.

물론 한주만 걸러도 헤깔려 하시지만 말입니다.

성당에선 세례식이 가까와져갔고 우리는 다른 몇 친구들과 함께 세례식에 필요한 성체모시기를 연습하게 되었지요.

계란과자로 성체를 대신하고 한줄로 서서 ’그리스도의 몸’하면 ’아멘’으로 받아모시기를 했다. 과자라 그런지 분위기는 점점 화기애매해져 갔는데 학생들은 과자를 먹으려고 줄서기 바빴고 특히 우리 보나언니는 성체는 안중에도 없는 듯 ’아멘’ 대신 "아~"하며 과자나 빨리 넣으라는 듯 입만 벌려대서 우리는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순진한 우리 언니가 너무도 귀여워서 콰악 깨물어 주고 싶었지만 미사때도 이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너무도 부족했던 것일까요!!

이번 세례식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정신지체 1급이라는 것과 교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이유였지만, 우리가 좀더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더 컸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단원들도 나도 의기소침해지는 건 어쩔수 없었지만 해야만 했지요.

좀 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잠시 휴교를 했었던 ’장애인 주일학교’ *늘참반*을 부활시키게 되었지요.

부활이라니 거창한듯 싶지만 학생 다섯에 보조교사 넷, 담임 한명으로 구성된 자그마한 소그룹이랍니다.

이번에는 수녀님이 담당하시는 학생반에서도 교리를 받게하고 우리랑도 교리공부를 해가며 이번엔 꼭!!이란 다짐으로 한주 한주를 보내갔답니다.

얼마전부터는 주일아침마다 기도도 꼬박꼬박하게 되었답니다. 고작해야 식사기도나 할까말까 제가 말이지요.

드디어 세례식의 날은 다가왔답니다.

보나언니는 사실 우리 한번 배워 알때 반복에 반복을 더해도 할까말까한 사람인데라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세례식때 실수라도 크게 해서 툇자라도 맞을까봐였지요. 우리들이 주님께로 보내던 간절함도 시간이 가까와짐에 따라 더해갔고요.

여하튼 세례받기 일주일 전 매일마다 모여 전체교리를 받을 때까진 잘해내셨답니다. 지루해하지도 않으셨고 누구보다 얌전히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도 같았는데...

세례받기 하루 전날, 성체모시는 연습을 하는 날이었답니다. 직접 보기도 처음이고 성체가 혀에닫은 느낌이 어색했던지

"안먹을래요."라고 하는 바람에 모두들 놀랐답니다. 더욱 놀라왔던 것은 평소 기껏해야 "네~"라는 말밖에 모르던 언니 입에서 그렇게 긴말을 하는 것을 처음보았던 것입니다.

놀라움과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걱정이 되었답니다. 바로 내일인데...

자리에 앉은 보나언니 표정을 보아하니 밍밍하고 아무 맛도 없는 고 자그맣고 동그란것을 삼키기가 뭐했던지 혀위에 놓고는 어쩌냐는 시늉으로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요.

그리고 나는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 삼킬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언니는 어느새 삼켰답니다. 저는 그야말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래도 이젠 우리 언니가 영세를 받나부다 하는 마음에 기뻤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더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건지..독실한 신자 같으면 믿음으로 해결을 보겠지만 난 아직까지는 그런 소양을 갖추지 못했기에 내일 세례식전 성체 모시기 연습 좀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습니다.

전 ’언니 제발’하는 마음으로 등을 쓸어 주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서로에게 따쓰한 미소로 마주대했던 날 처럼 우리는 서로 바라보았답니다.

그 날이 되었습니다.

보나언니의 어머님은 심한 관절염에도 불구하고 택시까지 타고 오셔서 언니를 축하해주시고 두시간에 걸처 진행되는 예식에도 모두들 의젓했답니다.

가장 걱정 되었던 성체모시기 예식때도 놀라우리 만큼 잘 치뤄주셨습니다. 두번째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정말 잘 해주었답니다.                  왠지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들면서 코끝이 찡해져왔답니다.

잘해준 언니가 고마웠고 오늘까지 잘 견뎌준 모두가 한없이 감사했습니다.

오늘처럼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 날이 또 있으랴 싶었습니다.

주르르 흘러버리는 내 눈물속에는 끌어오르는 기쁨이 샘솟고 있었답니다.

 

저희는 그 후에도 계속 교리를 해나갔답니다.

그러던 중 보나언니는 저희 단원과 같이 집에가던 길에 발을 삐는 작은사고가 나게 되었는데, 낳지 않아 병원엘 가봤더니 발에 금이갔다고 합니다.

지금은 미사도 못드리고 집에서 요양중이랍니다.

게다가 그녀의 늙으신 어머니까지 골반뼈가 부러져 입원까지 하셔서 친언니네 집에 잠시 머물러 지내느라 성당엔 몇달째 못나오고 있는 실정이지요.  매주마다 거듭나기를 하고 있노라면 보나언니가 생각이난답니다. 그렇게도 나를보면 반가와 하는 언닌데...

찌는 여름 7월에 한쪽다리를 커다랗게 깁스를 하고 있는 언니한테 미안한 마음 뿐이었답니다.

말을 못해 그렇지 얼마나 아팠을 텐데... 그래도 문병온 나를 보며 지어주는 행복한 미소가 참 고마웠습니다. ’난 괜찮으니 걱정마! 현주야!’라는듯해서

빨리 성당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언니는 나에게 예수님이였습니다.

사랑이 무었인지.. 인내가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해 주신 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당첨 소감~

 3년 동안 지침없이 ..묵묵하게 도와주신 거듭나기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KANG신붓님께도 더할나위 없는 존경심을 이 자리를 빌어 표합니당..^^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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