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그런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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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혜진 [twkedae] 쪽지 캡슐

2000-01-01 ㅣ No.542

 

그런 마음으로..

                이어령

 

마치 기적처럼 하얗게 눈이 내린 날 아침.

아무도 걷지 않는 길 위에 첫발을 디디는 그런 마음으로,

흰 공책의 첫장에 최초의 글씨 한 자를 막 적어가는

그런 촉감으로,

서먹이던 여인으로부터 ’당신’이라는 호칭을 처음들었을때의 그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어린 자식의 돌상 앞에서 난생 처음으로 걸음마를

시작한때 손뼉을 치는 그런 소리로,

오랫동안 누워 있던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

퇴원수속을 하려고 온 간호원에서 문병객이 놓고 간

포인세티아의 꽃 화분을 미련없이 안겨주는 선심으로

배를 타고 떠나는 마음으로

1백 미터 경주의 육상 선수들이 일렬로 늘어선

출발 직전의 포오즈, 비상할려고 막 날새를 펴는 백로,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트럼펫에서 터져나오는 첫번째의 음향.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 무대의 일 막이

오르는 동라소리 - 아, 그런 한 순간의 소리를 들을 때의

마음으로-.

그런 마음으로 당신이여.

이 해를 맞이하게 하소서.

무수한 발자국에 짓밟힌 눈길을 너무 많이 보아온 까닭입니다.

태엽이 풀려가듯이 그렇게 끝나는 것들, 낙서로 채워진 노우트.

상투적인 글이 적힌 종이,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영화의 엔드마이크,

사그러지는 것들 감격없이 되풀이 되어가는 그 모든 것들.

우리의 권태도 찢게 하시고, 침묵을, 허탈을, 무기력을 찢게 하소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런 마음으로.

이 날을 맞이하게 하소서.

 

 

항상 처음이란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시입니다.

처음 뿐만 아니라 늘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음 참 좋겠단 생각이 드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새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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