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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해설: 죄의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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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18 ㅣ No.42

[사도신경 해설 52] “죄의 용서” (1) 자비의 성사

최영철 알폰소 신부(거창본당 주임)


교리 순서상 교회에 관한 교리 다음에는 성사에 관한 부분이 곧 따른다. 그런데 신경에는 성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성사 대신 ‘죄의 용서’에 관한 고백이 나오는데, 이것이 성사에 대한 고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사가 죄를 사해주는 자비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중풍병자를 치유하면서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제기한 의문이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 만큼 극히 힘든 일이며, 신적인 행위라 할 정도로 대단히 위대한 일이다. 그래서 “용서로 전능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이라는 기도 첫 마디도 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사건인 죄 사함을 드러내 보이기 위하여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2,10) 고 단언하시며 치유하셨다. 중병에 걸려 오래 누워있던 환자에게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시자 그는 “일어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걸어 나갔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용서를 통해 죄에서 해방시키러 오셨다. 용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 현상이다. 불가시적 사건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예수님은 가시적 중풍병자 치유를 이용하셨다. 가시적 육신 치유를 통해 불가시적 영혼 치유를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이것이 곧 ‘성사의 방식’이다. 성사는 가시적 방편들(말씀, 몸짓, 재료)을 통해 불가시적 은총과 자비의 선물을 드러내고 전해주는 ‘거룩한 일’이다. ‘성사’는 말 그대로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거룩한 것으로써 거룩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성사를 다른 말로 ‘유효한 표징’이라 한다. ‘표징’이란 보이지 않는 실재와 관련되어 그 실재를 가리키고 나타내주는 감각적 수단 또는 도구 곧 ‘볼 수 있는 표지’이다. 예컨대 반지는 불가시적 부부 사랑과 헌신을 나타내고, 국기는 국가를 나타내는 표지이다. 가장 대표적이고 기본적 표징은 언어다. 말이나 문자는 보이지 않는 생각, 뜻, 의견, 마음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매체이다. ‘유효한 표징’이란 불가시적 실재를 가리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불가시적 실재(은총)를 전달하는 ‘효과적’ 표징을 말한다. 성사는 그것이 가리키는 불가시적 은총, 사랑, 생명을 드러내고 실제로 전하는 도구로서 인간을 거룩하게 해주는 표징이다.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성사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 삶 자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계시해주는 유효한 표징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그분은 ‘아버지와 하나’이므로 그분을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가 듣고 본 것, 손으로 만져본 것, 그 생명이 나타났다.”(1요한 1,1) 그분은 하느님 자비의 성사 자체이다. 그 자비를 드러내고 베풀기 위해 인간으로 오셨고 특히 죄인들과 어울리셨다. 죄인들 틈에서 세례받고, 연약한 인간처럼 유혹을 겪고 죄인으로 지탄받는 이들과 먹으며 사귀셨고, 죄인 취급당해 재판받고 죄인처럼 사형 당하셨다. ‘죄인의 벗’으로 처신한 예수님의 삶, 말씀과 행적이 모두 자비의 성사다. 역설적이게도 이 모습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 결과 그분은 무자비하게 처형 당하셨다. 예수님은 삶 전체를 통해 또는 구체적 행동이나 분명한 말씀을 통해 성사들의 기초를 놓으셨고, 교회는 그것을 바탕으로 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혼인과 성품성사들을 제정하였다. 칠성사 모두가 어떤 처지에서든 자비로이 용서해주는 하느님과의 은혜로운 만남의 순간들이다. [2009년 5월 24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가톨릭마산 8면]


[사도신경 해설 53] “죄의 용서” (2) 용서와 칠성사


성자와 성령이 파견되신 유일한 목적은 ‘죄의 용서’다. 용서가 해방이고 구원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성자의 일생은 용서를 베푸는 삶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의 모습’으로 처신하신 것도,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것도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간구하셨고 뉘우치는 오른편 죄수는 그분으로부터 용서를 선고받았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성령의 파견도 용서를 위한 것이다. 성령을 통해 죄의 용서가 실제로 전해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과 함께 죄를 사해주는 권한까지 부여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성령께서 내려오셔야 죄가 실제로 사해지고 우리는 죄의 용서를 체험한다. 예수 부활과 성령 강림의 유일한 효과이며, 으뜸가는 선물은 용서이다. 용서의 권한은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이다. 아무도 선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 엄청난 권한을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교회에 넘겨주셨다. 곧 당신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주는 권한을 주셨다. 승천 직전에도 예수님은 사죄권을 주신 사실을 재확인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 28,19) 세례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우리를 결합시켜 되살아나신”(로마 4,25)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합시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로마 6,4) 하는 용서를 위한 첫 번째 성사이다. 세례성사만이 죄가 용서되는 성사가 아니라 세례를 포함하여 일곱 성사 모두가 죄를 용서해 주는 해방의 성사이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성사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성령은 온 시대 모든 사람에게 실제로 죄의 용서가 전달되기 위해 파견되어 오셨다. 그런데 ‘하느님의 성사’인 그리스도는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성령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 끝날까지 현존하지만 ‘성사의 방식(가시적 방식)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할 수는 없게 되셨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라 불린다. 그것은 ‘사라지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볼 수 없는 하느님과 그분을 볼 수 있게 해주기 위해 파견되었다. 일곱 성사는 하느님의 성사인 그리스도의 삶, 말씀과 행적을 근거하여 그리고 그분의 직접 명령에 따라서 제정된 교회의 성사들이다.

교회의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어야 한다. 세밀한 형식에 있어서는 교회가 확정하였지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말씀이든 행적이든 그리스도의 명령과 모범을 따라서 제정된 것이다. 둘째, 감각적 표시 곧 (유효한) 표징이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표징이 필수적이다. 셋째, 이 표징이 가리키는 은총을 전달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표징 뒤에 감추어진 은총과 사랑 그리고 생명이다. 칠성사의 ‘일곱’은 ‘충만’ 또는 ‘온전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온 삶에 걸쳐’(탄생, 성인식, 식사, 혼인, 치유, 고백, 임종) 성사가 베풀어지며, 각 성사가 은총을 충만히 전해줌을 가리키는 숫자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뜻 깊은 계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생명을 전해주는 방편이다. 보이지 않는 용서는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하느님의 고유 권한에 속한 용서를 교회와 성사를 통해 혜택받을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2009년 5월 31일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생명의 날) 가톨릭마산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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