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성당 게시판

2009.배론 성지 순례 (본당 레지오 성지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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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애 [sophia1008] 쪽지 캡슐

2009-05-20 ㅣ No.4361

 
2009년 5월 배론성지 가다.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황사영알렉시오는 1801년 2월 말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살던 김귀동의 집으로 왔다.
그는 옹기 저장고로 위장한 토굴속에 8개월간 은신해 있으면서 9월 22일 백서(帛書)를 완성했다.
백서는 모두 122행으로 구성된 13,384자의 글자를 비단에 쓴것으로 북경교구장 구베아(Gouvea,1751-18080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되었다.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1-5행), 신유박해 발단과 그 진행과정(6-32행),
주문모 야고보,1752-1801)신부와 총회장 최창현요한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열전(32-90행),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90-119행), 관면 요청과 맺음말(119-122행),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나 황사영은 9월 29일 의금부에 의해 체포되었고 백서도 압수되었으며,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황사영은 같은 해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처형되었다.
백서는 1925년 79위 시복식(諡福式)때 교황 비오 11세께 증정되었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토굴은 1987년서울대 이원순 교수의 고증에 의거하여 복원된 것이다.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묘
최양업은 1821년 3월 1일 충남 청양 화성면 농암리 누곡(다락골)에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5-1840)사이에서 태어났다.

최양업은 1836년 12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에 유학을
떠났다

1844년 12월 중국 小八家子 본당에서 부제품을 그리고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입국하기 전까지 만주에서 7개월간 중국 신자들에게 사목활동을 했다.
그해 12월 입국한 그는 11년 6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 살고 있는 127개 교우촌의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굳건한 신심과 영혼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정 그리고 분별력을 가지고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며,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에 80~100리를 다니는 사목방문, 성직자 양성, 교리서의 번역과
<천주가사>의 저술,순교자 자료 수집 등을 수행했다.
최양업 신부는 1861년 6월 15일 교우촌 순방을 마치고 교구장에게 사목 활동 결과를 보고하려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배론에서 170리 떨어진 곳에서 과로로 선종했고, 그의 시신은 같은 해 11월 초 베르뇌(Berneux)
주교와 푸르티에(Pourthie) 신부 그리고 신자들에 의해 배론 신학교 뒷산 언덕인 이곳에 안장되었다.

 

 

 
 
 
즐거운 식사 시간
 
향기로운 쑥도 뜯어 보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십자가의 길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인생여정)
당신은 순례자 빨리 목적지에 다다르고 싶어 마음이 급하지요
인생길은 순례의 길 서두구지 마십시오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돌아 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도하면서 미로를 따라 걸어 보십시오.
인생여정에는 동서남북 사해팔방 춘하추동 생로병사 유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습니다.
어느 과정도 생략할 수 없고 모두 거쳐야만 목적지에 이릅니다.
인생여정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걸으면 반드시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2004년 6월 15일

                              배론성지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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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성지 ( 聖地)

 

충정북도 기념물 제 118호
소재지: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舟論)이란 지명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처럼생겼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와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이곳은 초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첫째,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가 쓰여진 토굴이 있는 곳이다
1801년 2월 황사영(알렉시오)은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서 토굴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토굴 속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을 세계교회에 전하고, 박해로 무너진 천주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간곡한 서신을 비단에 써서 (帛書, 13,384자) 북경에
있는 구베아(Gouvea)주교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보내지기 전에 백서는 압수되고 그 또한 체포되어 그해 11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 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둘째,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1855년 초 성인(聖人) 장주기 (張周基, 요셉)의 집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에서는
프랑스인 푸르티에(Pourthie),프티니콜라(Petitnicoㅣas)신부의 지도 아래 김 사도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등 10여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라틴어, 철학,신학 등 우리나라 처음으로 서양학문을 배운 신학생들이 사제양성의 열매를

맺을 무렵인1866년(丙寅年) 초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 결과 두 신부와 장주기가 각각 서울 새남터와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묘가 있는 곳이다.
그는 1836년 12월 중국 마카오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고,

184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2년 동안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혼을 구하려는 불같은 열정,

그리고 훌륭한 판단력 등으로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과로로 1861년 6월 문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성요셉 신학교 뒷산 언덕에 묻혀 사제의 길을 걸으려는 후학들의 길을 밝혔다.


이와 같이 바론성지는 종교적인 면에서 교회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있어서도 역사의 땅이요 교육의 땅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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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18일

어제까지도 비가 내렸는데 오늘은 활짝 개었다.

길에는 먼지가 하나도 없어 깨끗하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이 샛파랗다.

불어오는 바람도 산뜻하고 향기롭다.

오늘은 본당에서 레지오 단원들이 배론 성지로  순례의 길을 떠나는 날이다.

신부님과 수녀님도 모시고 같이 떠났다.

관광 버스 여러대에 나누어 타고 묵주의 기도를 드리면서 갔다.

도착하여 미사에 참례하니 전국에서 다섯 군데의 성당교우들이 모여와서 미사를 드렸다.

우리 신부님도 그곳의 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드리니 우리교우들은 마음이 흡족하다.

미사가 끝나고 맛있는 식사도 함께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잠시 휴식후 성모님을 모시고 까떼나를 바치고 나서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순교의 정신을 되새기며 자연의 품에 안겨 하루를 뜻있게 보냈다.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도시를 떠나 이 곳 배론에 와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한 번 뒤돌아보게 된다.

신부님을 비롯하여 수녀님 그리고 이 번 순례에 참석한 우리 성당의 레지오 단원들께

감사한 마음 하나 가득이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기를 빌어 본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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